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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회 2009 여름수양회 주제2강 /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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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마태
댓글 0건 조회 2,269회 작성일 09-08-03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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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수양회 주제 2강
말씀/ 요한복음 19:1-42
요절/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아침에 저는 여러분들과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프면서도, 동시에 가장 기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유쾌하고 가볍게, 즐기고 가면 그만인 것일까요? 갈6:7-8절은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인생은 심고 거두는 것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심은 바로 그것을 또한 거두게 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영생을 거둘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I. 우리의 왕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1-16). 18장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모함을 받아 체포당하시고 공회 앞에서 철야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심문 결과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이심을 알았지만 예수님의 처벌을 원하는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채찍질하도록 하였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나무틀에 묶고는 무자비하게 채찍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채찍은 예수님의 등을 파고들었고 순간 예수님의 등살이 찢어지고 피와 살점이 튀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채찍에 무려 120대나 맞으셨습니다.

채찍질이 끝나자 이번에는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꾹 눌러 씌웠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 혈관을 뚫으면서 핏방울이 예수님의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군병들은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예수님께 입힌 후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조롱하며 손등으로 때렸습니다. 손등으로 얼굴을 때리는 일은 모욕중의 모욕입니다. 힘을 숭상하는 군병들은 힘없이 당하고만 있는 예수님을 보고 ‘유대인의 왕은 무슨 빌어먹을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을 제압할 힘이 없는 왕은 결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왕이신 예수님께서 왜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얼마 전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였습니다. 한때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받은 심한 모멸감과 박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고향인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온 나라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한 나라의 왕도 그럴진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님은 어떠했겠습니까? 더군다나 노무현 대통령은 혐의가 있어서 조사를 받았지만 왕이신 예수님은 채찍에 맞고 조롱과 멸시를 당할 분이 아니십니다. 죄가 없으신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신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사도 베드로도 벧전 2:24b에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고 증거 합니다. 우리는 나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상처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의 이혼으로인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 상사의 권위라는 채찍에, 어떤 사람은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로부터 맞은 채찍에 상처를 받아 괴로워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아내는 남편에게 상처를 줍니다. 우리 주변에는 온통 “나, 상처 받았어요!”하는 말뿐입니다. 상처로 인해 고통하고, 괴로워하며, 상처로 인해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상처를 끝내 치유 받지 못하고 한강물에 뛰어 들기도 하고, 지하철에 뛰어 들기도 합니다. 어떤 뛰어난 상담원도, 정신과 의사도 사람의 마음의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상처로부터도 나음을 입습니다.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눈물, 우리 죄악의 치욕과 부끄러움 때문에 생긴 상처를 잘 아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분께 손을 내미는 자들을 피 묻은 가슴으로 안아 주십니다. 상처를 안고 다른 데로 가지마시고 예수님께로 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나음을 위해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지만, 성난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제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을 다시 그들 앞에 세우며 말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동정심을 자극하여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를 본 늑대처럼 소리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빌라도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이 말을 듣자, 빌라도의 가슴이 섬뜩해졌습니다.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가 물었습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으십니다. 빌라도는 속이 탔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11) 하나님이 권한을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권한을 주셨다고 해서 예수님을 해하고 죽이는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죄가 더 크지만 빌라도의 죄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힘썼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더욱 답답해진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유대인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 고백은 유대인으로서, 특히 대제사장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외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기 입으로 스스로 가이사가 자기들의 유일한 왕이라고 주장합니다. 도저히 해서는 안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오직 한 가지 생각에 빠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과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자 하는 사람은 이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들은 “돈이 나의 왕”이라고 외칩니다. “내가 나의 왕”이라고 외칩니다. 심지어 “사탄이 나의 왕” 외치는 미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음을 입고 회복된 인생, 건강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II. 우리의 왕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17-30).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골고다)이라 하는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물론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보면 예수님이 골고다에 오르는 길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길임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고 또 쓰러지십니다. 마침내 구레뇨 시몬의 도움을 받아 골고다를 오르십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서 그 어떤 묘사도, 시몬의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은 골고다 길을 오르는 예수님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적극적인 모습입니다. 사도 요한이 볼 때, 예수님은 비참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골고다 길을 오르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으로서 적극적으로 그 길을 오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과 승리를 바라보시고 한 걸음 한 걸음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어깨에는 ‘자기 십자가’가 매여 있습니다. 길은 가파르고 숨은 차오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길을 적극적으로 갈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군병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만 혼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좌우편에 다른 두 사람도 함께 못 박았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처형당한 사람을 ‘강도’(마 27:38, 막 15:27) 혹은 ‘행악자’(눅 23:33)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마치 범법자 중 하나 같이 처형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이 두 사람의 신분을 일부러 밝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셨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볼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비참하게 처형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서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 달린 두 사람은 마치 왕의 수행원처럼 보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라는 짧은 언급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요한복음의 클라이맥스이자 신구약 성경 전체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구약 성경이 수천 년에 걸쳐 예언했던 그분이 드디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정말로 너무도 짧게 십자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우리의 가슴을 찢는 회개나 비통함이나 웅장한 찬송시가 등장한다면 바로 이 장면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을 이토록 간결하게 처리하도록 하셨을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십자가를 직접 목격한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십자가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손가락이라도 깨물어서 그 피로 자신의 복음서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면 읽는 자들에게 큰 감동과 은혜를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 너무도 짧게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약 십자가 사건에 대한 묘사가 상세했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그 설명에 갇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의미의 넓이와 깊이와 폭은 무한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장면을 기록할 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어쩌면 몇 날을 울며 금식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는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라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우리의 묵상과 찬양의 주제이며,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알아가야 할 주제입니다.

빌라도는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 3개 국어로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죽으셨다는 것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이때만큼은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무지한 군병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놓고 ‘도박판’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군인들의 무지한 행동을 통해서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하신 시편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고통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세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신 일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은 극한적인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자들에게 대한 정성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마리아 곧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시고 끝까지 섬겼습니다.

다음으로 성경을 성취하려고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사명이 완성된 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성경을 성취하시고자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고,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댐으로 마침내 성경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하시므로 자기의 사명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3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모릅니다. 오히려 죄를 가볍게 여기고 즐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날은 죄에 대한 개념조차 희미해서 죄를 지어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는 바로 그 순간 죄는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의 생각과 인격과 삶을 파괴시키고 영혼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못쓰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인간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면에 있는 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인간은 어떤 노력이나 어떤 행위로도 스스로는 결코 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심히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취하여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머리 위에 두시고 그 아들을 치셨습니다.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죽이셨습니다. 사53:6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위에서 내가 갚아야 할 죄 값을 몽땅 다 치루시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제 저와 여러분을 보실 때 “죄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므로 죄와 죽음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내가 십자가에서 승리했다!’는 승리의 선포입니다.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는 사단 마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 뒤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도대체 나사렛 예수의 범죄가 무엇입니까? 그가 어느 누구에게 해를 끼쳤습니까? 그의 가르침에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그는 선을 행하려 오셨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인간을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셨건만 오히려 무서운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오직 사단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야호! 이제 끝이다. 이제 내 세상이다.’며 승리의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냥 비참하게 마귀에게 패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죽음의 대가를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하고 죄와 죽음의 법으로 왕 노릇하던 사단 마귀의 권세를 박살내시고, 그 마귀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로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하고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거듭나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내가 십자가에서 사단 마귀를 멸하고 완전히 승리했다’는 승리의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 앞에 무기력한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죄와 죽음을 정복한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골로새서 2:15절은 말씀합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셋째, 100%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100%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할 것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이 있다면 이 메시지를 믿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믿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죄의 목록을 가지고 있는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이 가장 비열한 사람일지라도, 이 순간까지 죄악의 시궁창에서 살아왔으며, 모든 형태의 죄를 밥 먹듯이 지어왔다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깊이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사실을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나의 죄는 이미 끝났다. 이젠 나와 상관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바로 이 순간에 이제까지 행한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하고 완전하게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마치 우리의 생애에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모든 죄는 철저하게 도말되었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입니다.

이 시간 십자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십자가의 뿌린 피가 오늘날 누구를 향해 ‘오라’고 부르짖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 우리가 위로받고 쉴만한 곳이 있습니까?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오. 여기 여러분을 받고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안식을 주실 분이 여기 계십니다. 이 시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앉아서 십자가를 바라보라. 네 모습 그대로 나는 너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네 더러움과 누더기 같음과 비열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너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게 와서 쉬어라.” 이 초청에 우리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날 오라 부르시는 주님의 반가운 음성. 주의 보배로운 피. 갈보리 언덕에서 흘린 피로써 정결케 하라 하시네. 주여 내가 가오니! 이제 나 주께 가옵니다. 갈보리에서 흘리신 피로 날 씻어 정결케 하소서.’

어느 도시에 사고로 엄마, 아빠를 갑자기 잃고 두 소년이 남게 되었습니다. 형이래야 10살도 안된 어린 소년이었는데 밤마다 엄마를 찾고 우는 어린 동생을 얼르다가 어린 자신은 짐짓 어른이 된 것처럼 그렇게 울음을 참아야 했습니다. 10살짜리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습니다. 몇 년을 버틴 그 소년의 힘이 점점 소진되어 갈 무렵 하나님의 기가 막힌 은혜로 예배당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엄마, 아빠를 합친 것보다 더 놀라우신 예수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무게를 사랑하는 예수님 앞에 내어 드렸습니다. 상황은 바뀐 것이 없지만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동생 손을 잡고 늘 예배당에 나와 기쁨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꼭 형과 동생이 같을 수는 없었든지 형의 신앙은 점점 자라 가는데 동생은 청소년기가 되자 슬슬 반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으면 왜 우리를 고아로 만들었느냐? 우리를 이렇게 가난하게 한게 무슨 하나님의 사랑이냐?” 그러더니 결국은 아주 악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청년이 되었습니다. 형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게 되자 동생은 거침없이 죄를 짓고, 끝이 없는 방탕으로 내달았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동생에 대한 형의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고 날마다 기도가 더 길어졌습니다. 그 날도 자정이 넘어서도 들어오지 않는 동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문짝이 왈칵 열려 놀래서 눈을 뜨고 보는 형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생이 와들와들 떨며 서 있는데 온 몸이 피투성이었습니다. 놀래서 바라보는 형에게 “형, 내가 사람을 죽였어. 나 어떡하면 좋아? 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별짓을 다하다가 결국 혈기에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살인사건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기가 막힌 현실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형이 와들와들 떨고 있는 동생의 피 묻은 옷을 벗겼습니다. 그리고는 급히 벽장문을 열고 동생을 밀어 넣었습니다. 어지러이 널려있는 그 피비린내 나는 옷을 보고 있던 형이 사랑하는 주님 앞에 잠시 묵도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자기의 옷을 벗었습니다. 자기 옷을 다 벗고는 동생의 그 피 묻은 옷을 주섬주섬 걸치기를 시작했습니다. 옷매무새를 다 고칠 즈음 여러 사람의 거친 발자국이 들리더니 문짝을 ‘팍’차고 들어섰습니다. 그리고는 군화발로 그냥 차고 때리고 짓밟는 것이었습니다. ‘이 새끼 이거, 네 놈이 사람을 죽였지? 물을게 뭐 있어? 이놈 옷이 증거 아니야?’하고는 거칠게 낚아채고 끌고 나갔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도 잔혹했던 사건인지라 여론의 동정을 얻지 못한 채 재판은 신속히 진행이 됐고, 끌려간 형은 심문관이 ‘이거 네 놈이 한 짓이지?’ 물을 때마다 변함없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 저는 이 죄 때문에 형벌 받아야 됩니다.” 이 말은 곧바로 긍정으로 이어졌고 그는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 이상한 죄수가 감옥에 들어오고 난 후 감옥은 이상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가장 알려진 잔혹한 살인범인데 도대체 살인범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는 틈만 나면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 이상한 죄수가 사형 집행 날이 가까워 온 어느 날 교도소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죽어가는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이니 들어주겠다고 하고 소장과 만난 자리에서 한 부탁은 편지를 한 장 쓰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겉봉을 쓰더니 “소장님!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죽을 사형수의 부탁을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저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는 말고, 집행되고 난 후에 이 주소지로 편지를 전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사형집행 날이 다가왔습니다. 마지막 날 그 밤, 밤새 꼬박 사랑하는 주님 만날 생각에 설레기도 했지만, 어릴 때 엄마, 아빠 잃고 저보다 크지 못했던 형의 품에 안겨서 잠이 들던 동생, 한 번도 그 동생 외에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오직 자신의 전부를 쏟아서 사랑했던 동생이 그 죄책감에 두려워 떨며 숨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그것 하나가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동생의 영혼을 주님 앞에 간절히 부탁하고 그 다음 날 아침, 그는 사형집행이 되었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교도소장이 사형을 참관한 후 도대체 마음이 심란하고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왔다 갔다 하다가 마침 그 사형수가 부탁한 편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편지를 찾아서 부하 직원에게 얼른 주소지를 찾아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 사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마치 폐가처럼 된 집이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자 돌아가려고 하는데 판자 사이로 웬 놈이 문을 삐걱 열고 덜덜덜 떨면서 나오는데 머리는 있는 대로 기르고, 하얗게 빛을 못 본체로 완전히 송장처럼 된, 이것은 완전히 귀신이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편지봉투를 던져놓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잡으러 온줄 알고 ‘이제는 끝이구나!’ 싶어서 나왔던 그가 웬 사람이 던져놓은 편지봉투를 보는 순간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형의 필체가 보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급히 들어가 문을 잠그고 편지봉투를 쭉 찢었습니다. 그 첫줄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너의 죄의 옷을 입고 너 대신 죽노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읽고 또 읽고 또 읽다가 그 의미가 확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악!’하고 비명을 지르고는 미친 듯이 “안돼! 안돼! 우리 형 죽을 수 없어. 안돼!”하고 문짝을 걷어차고 좇아나갔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형의 편지를 움켜쥔 채로 온 도시를 설치고 다니다가 마침내 형무소에 도착했습니다. 바깥에서 웬 미친놈이 횡설수설 떠드는 도중에 이름을 말하는데 오늘 아침에 사형당한 그 이상한 죄수의 이름을 얘기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데리고 와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중 소장이 도저히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기를 했습니다. 사형수는 자기 형이고, 자기는 동생인데 형은 절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고, 그 살인은 자기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도소장이 심정적으로는 뭔가 숙제가 풀리는 것 같은 예감은 오지만 그는 더 이상 이 사실을 알아서도 안 되고, 알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기껏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야! 자식아! 이 더러운 자식아, 너 그만해. 더 이상 떠들지마. 너하고 이 죄하고는 상관이 없어. 이 죄는 이미 심판이 끝났기 때문이야. 꺼져, 꺼져 이 자식아!” 쫓겨난 그 불쌍한 동생이 확실하게 알게 된 한 가지는 형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떻게 할 줄 몰라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집에 돌아왔습니다. 있을 때는 모르겠는데 형이 사라지고 나니까 자기의 삶에서 형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형을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을 것만 같고 지옥도 이렇게 무서운 지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기 영혼 안에서 이런 절규가 나왔습니다. “어떡하면 형을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은 형이 그렇게 바랐던 천국에 가면 형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살인범인 자기가 들어갈 천국은 없었습니다. 이때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간절하게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우리 형의 하나님, 우리 형이 사랑한 하나님. 나는 천국갈 수 없고 지옥가야 할 놈이지만 나 지옥가더라도 한번만 우리 형 좀 만나게 해 주십시오. 우리 형을 만나는 길이 천국 가는 길이라면 제발 날 좀 천국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날 밤 그는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형을 통해서 십자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그는, 형이 죽을 때 죽었던 그는, 그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그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구겨져 있던 형의 편지를 펴서 다시 읽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 줄 밖에 못 읽었는데, 그 다음 줄이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너의 죄의 옷을 입고 너 대신 죽노라. 넌 이제 나의 옷을 입고 나처럼 살아다오.” 그날 아침 그가 깨달은 것은 형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자기의 이름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속해 있던 모든 것을 끌어다가 마당에서 죽음과 함께 다 불에 태웠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속옷까지도 다 벗어던지고 형의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형이 하던 짓을 고스란히 하였습니다. 주일날이 되면 형이 입은 옷을 입고, 형이 앉은 자리에 앉아서, 형이 예배를 드린 그대로 똑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서는 형이 입은 낡은 작업복을 입고 형이 했던 것처럼 정직하고 진실하게 일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아픔이 치유될 무렵 구질구질한 쓰레기 같은 놈들이 다시 찾아와서 그 동생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습니다. “야, 이 자식아. 너 명 길구나! 야! 야! 살았으면 다시 가서 즐겨야지? 가자구.” 이렇게 끄는 그들에게 그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옷 주인은 그런 짓 하지 않았어. 이 옷 주인은 그런데 가지 않았어. 이 옷 주인은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우리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옷을 입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이제 예수님의 의의 옷, 거룩한 옷을 입고 이 땅에서 온전히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삶을 힘써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우리의 왕이 장사됨으로 우리의 두려움도 묻혔습니다(31-42).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군인들이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다리는 꺾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이 일 또한 성경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35절에서 저자 요한은 자신의 증언이 참인 것을 강조합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8절을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변화되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가져갔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도 유대인들이 두려워 밤에 찾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변화되어 엄청난 양의 몰약과 유향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숨어 지내는 자도, 밤에 속한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려움을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하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무덤에 묻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새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도 모든 두려움을 묻어 버리고 담대하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므로 사단 마귀의 권세를 박살내고 승리하셨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던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눈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 시간이 우리에게는 은혜와 감격의 시간이며, 예수님에게는 대속을 다 이루신 시간이며, 하나님에게는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진노를 자기 아들에게 쏟으신 비통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께 전심으로 생명을 걸고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죄사함과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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