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 청천 여름수양회 2일 저녁강의 '영생수되시는 예수님' (요4:1-29)
페이지 정보

본문
영생수 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4:1-30
요절/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즘 입추가 지나면서 날씨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더울수록 사람들은 갈증을 많이 느끼고, 갈증을 해소할 만한 시원한 것들을 찾습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냉장고부터 열고 시원한 생수를 벌컥 벌컥 들이켜야지 좀 살 것 같습니다. 우리 몸의 70% 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일정량 이상의 수분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목마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영적인 목마름을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잠시나마 갈증은 해소될 수 있을 지언정 또 다시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마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또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특별한 생수를 준비해두셨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적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시원하게 마실 수 있길 기도합니다.
Part 1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
이 사건은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작은 마을 근처에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되었을까요?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시간과 노력을 양들을 구원하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양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러자 역사가 흥왕히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와 무리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은 아직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떠나셨습니다. 한편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는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볼 때 사마리아인은 피가 섞인 잡놈들이고 자기들은 정통이라는 자기 의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결코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특정 민족이나 특정 나라를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당신만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이곳에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준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은 이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마다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인 야곱을 생각하며 감사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역사적인 현장에 오셨습니다. 시간은 유대 시간으로 여섯시, 곧 정오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몸 상태는 어떠하셨습니까? 6절을 보면 ‘예수께서 길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방금 전까지의 긴 도보여행으로 몸이 매우 지치셨습니다. 오늘 날이었다면 버스나 지하철, 혹은 콜택시를 불러서라도 편하게 여행을 하셨겠지만, 당시 예수님은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없이 걸어서 여행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는 표현은 너무나도 지쳐서 바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피곤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우리를 돕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이 시간에 혼자 나타난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중동지역은 햇볕이 무척 뜨거워 어떨 때에는 섭씨 43도까지 올라가곤 합니다. 이런 더위에는 바위에 계란 후라이도 해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인들 또한 이 시간을 피해 보통 아침이나 저녁에 삼삼오오 모여 물을 길으러 가곤 합니다. 이 시간은 여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간을 통해 유용한 정보가 오가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A:어머, 사모님, 어제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 딴거 보셨어요? 어쩜 그렇게 수영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지 몰라~ 안그래요 사모님? 호호. 그래요. 우리 심사무엘도 내일부터 당장 수영 보내려구요. 그건 그렇고 요새 정모세가 성결목자님과 일대일 공부한다는데, 잘 하고 있나요? 어머 그러믄요. 우리 모세가 성결목자님한테 배운 뒤로는 몰라보게 성장했어요. 성결목자님한테 한턱 쏴야겠어요‘ 여인들에게는 이처럼 우물가 수다시간이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뜨거운 대낮에 홀로 물을 길으러 왔을까요?
18절을 보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현재는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별로 나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같은 자유연애시대에는 오히려 여인의 능력을 부러워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중동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라니. 아마 사마리아 신기록이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에게는 우물가에 오는 일이 즐거운 사교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부도덕한 여인이라고 멸시하고 따돌렸기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의 낯을 피해 우물가에 혼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날도 여인은 거기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한 낮에 우물가에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이 거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물동이를 이고 야하게 걸어오다 놀란 행동)이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가가셨습니까? 다 함께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
그 당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무시했습니다. 사마리아 남자들은 사마리아 여자들을 무시했고, 사마리아 여인들은 이 여인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무시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여인보다 자신을 더 낮추시고 그녀에게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목이 바짝 타거나 물 길을 그릇이 없어서 그녀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깊은 내면의 상처와 목마름의 문제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생수를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마음을 열고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셨습니다.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 이 말씀에는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류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습니다. 더군다나 공공장소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어딘가 좀 부족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하셨습니까? 다함께 1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선물을 좋아하고, 특히 여자가 선물에 더 약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화제를 하나님의 선물로 돌리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에 관심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어떤 특별한 물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관심을 가지고, 그렇지만 아직까지 미심적인 마음을 품은 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야곱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내 라헬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로미오와도 같은 남자였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야곱을 매우 이상적인 남자로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남과 비교를 당하게 되면 기분이 나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대신 자신이 주고자 하시는 생수에 대해 소개하셨습니다. 다같이 13,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리 되리라’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다시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러 마시는 대표적인 한 사람입니다. 여인은 남편의 사랑에 목말라 있던 자였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섬겨줄 진정한 남편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지만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여인과 같이 우리 모두 또한 매일 우물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목마름을 잠시 채우지만 또 다시 목마름이 찾아옵니다. 다시 목마른 것, 이것이 바로 여인의 인생이요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목마름이 있을까요? 여인과 같이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랑을 주고 받아도 사랑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목이 마릅니다. 또 물질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예전에 히트를 친 모 카드회사 광고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요’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부자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디 부자 되기가 쉽습니까? 그리고 혹 어렵게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무언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고민이 생깁니다. 세계적인 부호 카네기의 소원은 돈을 좀더 버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꼭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적당히 벌어서 즐기며 살면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말이 심령 깊이 들어옵니다. 소개팅에서 퀸카, 킹카를 만나 남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니고 싶습니다. 쌔근한 BMW를 몰고 사랑하는 연인과 도심을 빠져나가 한적한 호숫가를 거닐며 멋과 여유를 즐겨보고 싶습니다. 고시를 패스하고 남들 앞에서 큰 소리치며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고 싶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멋진 삶을 산다면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행복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토익과 인턴, 자격증에 올인합니다. 정욕에 대한 목마름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정욕에 대한 목마름은 매우 강력하여 밤새도록 인터넷 음란물을 보며 목마름을 채우고자 하지만, 남는 것은 깊은 허무감과 수치심뿐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분명히 다시 목마르다고 하십니다. 다시 목마르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 물을 처음 마실 때는 잠시 목마름이 해갈된다는 뜻입니다. 뭔가 만족도 있고, 성취감과 행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시 곧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우리 인생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목마름도 작았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이나 인형놀이 하나면 우리의 목마름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점점 자라면서 우리의 목마름도 커져갑니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싶고, 친구들에게 인기 짱으로 통하고 싶은 갈증도 생겨납니다. 사춘기 때는 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 앞으로의 인생을 보장받고 싶은 욕구도 생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항상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작은 목마름이 해결되면 더 큰 목마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목이 마른 것일까요? 예레미야 2장 13절은 말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인간이 목마르게 된 원인 두 가지는 바로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간의 목마름은 바로 생수의 근원, 영혼에 참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떠난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습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으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돈의 웅덩이, 쾌락의 웅덩이, 이성친구의 웅덩이, 성공의 웅덩이, 자아성취의 웅덩이, 공부의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것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들은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분명 물이 고이는 듯 합니다. 처음 팔 때는 그 웅덩이라면 계속해서 시원한 물이 있어 모든 갈증을 다 해소해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그 웅덩이는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또 다른 웅덩이를 팝니다. 본문의 여인은 이러길 무려 다섯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웅덩이들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잠시 갈증을 해소하고는 또 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더 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야곱의 우물가에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은밀하게 돈과 쾌락과 사랑의 물을 기르기 위해 두레박을 내리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른 우물가에서 죄의 열매와 더 큰 목마름, 피곤으로 고통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3절과 14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성을 회복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맺을 때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천국의 기쁨과 평화의 생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제2장 내가 그로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인도 목마른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없는 이 낮에 사람들을 피해 우물을 긷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참 만족과 기쁨, 넘치는 생명력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는 여인의 진실된 고백이요 피맺힌 절규요,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이 같은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제까지 예수님은 은혜로우셨습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은혜, 은혜없는 진리는 사람을 바로 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아픈 부분, 즉 죄문제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남편 문제는 하나님과 여인과의 관계를 막는 죄 문제요, 구체적으로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여인은 그 동안 진정한 남편만 만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상처를 받고 계속해서 새로운 남편을 찾아 해맸습니다. 여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여인의 문제를 건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곪은 곳을 수술 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건드려야 하듯이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예수님이 아픈 곳을 건드리자 여인은 본능적인 자기방어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거짓말쟁이! 너 회개 안하면 지옥에 가!’라고 거칠게 몰아부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목자들이 양들을 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말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셨습니다.
17b, 18절을 보십시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말씀은 ‘정말 남편다운 남편이 없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녀가 진정으로 의지하고 사랑할,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남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이는 예수님이 최소한 선지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면 깊이 해결되지 않은 예배 문제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진짜 문제는 남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문제는 잘못된 대상을 예배한 데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순결과 헌신, 사랑 그리고 신실함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닌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인이 그렇게 죄를 짓고 목마르게 된 이유였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예배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이에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21-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정죄받아 마땅할 것 같은 사마리아 여인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녀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하나님은 그녀가 당신께 나아오길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시자 그녀는 영적인 소원으로 가득해졌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녀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메시아가 오셔서 그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녀를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직접 그녀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내가 그라’ ‘I am he’ 예수님은 자신이 여인이 그토록 찾던 메시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모든 목마름을 해결하는 영생의 샘이요, 참 남편이 되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여인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녀는 놀라면서도 예수님께서 그녀의 진정한 남편이요 참된 예배의 대상이신 메시아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내면에 기쁨의 생수가 흘러 넘쳤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좇아 헤매던 부도덕한 여인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귀한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치 베이징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세요. 이 분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저는 1979년 경기도 파주에서 이란성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그리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특별히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당신께서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이 있으셨기 때문에 너희는 꼭 공부를 잘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말씀을 지겹도록 늘어놓으셨습니다. 저는 이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시험성적이 발표될 때마다 제 이름이 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며, 친구들의 부러움과 선생님의 칭찬을 즐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전 아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전 온갖 더러운 것들로 내면이 가득찬 자였습니다. 중학교 때 우연히 알게 된 자위행위는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탈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한 때는 이러한 행동을 청소년기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 적도 있었으나 몰려오는 죄의식과 수치심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건전한 모범생이요 속으로는 온갖 음란한 상상으로 가득찬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욕에 대한 목마름과 더불어 자매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 또한 남달랐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예쁜 자매와 사귀는 상상을 하곤 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예쁜 자매에게 터프하게 대쉬하여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우성 같은 외모가 안됐던 저는 공부를 통해서라도 자매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만 좋은 데 들어가면 여자는 줄줄이 따라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믿고 자매에 대한 목마름을 참고 공부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항상 1등만을 추구했던 저는 대학 또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에 교장추천제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면접과 논술에서 떨어지고 1998년 당시 제일 인기있는 학과 중 하나였던 신방과가 있는 연세대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하였습니다. 비록 전 목표로 했던 서울대는 떨어졌지만, 별로 슬프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왠지 고리타분해 보이는 서울대보다 자유로워보이는 연세대가 저의 목마름의 욕구를 훨씬 더 잘 채워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구독하던 학습지를 통해 알게 됐던 예쁜 누나가 연대 신방과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저의 목마름에 대한 갈증을 대학에서 마음껏 풀어보리라는 벅찬 기대감을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은 화려한 대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공부는 지금까지 많이 했으므로, 대학생활의 목표를 사람들과의 관계성 형성으로 잡았습니다. 신입생 때부터 온갖 모임을 쫓아다니며 사람들과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일주일에 2-3번은 선배 자취방에서 술에 취해 자곤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동안 참아왔던 자매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각종 미팅, 소개팅을 통해 나만의 줄리엣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소개팅을 할 때마다 만족하지 못하고 다음에는 좀더 괜찮은 자매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계속해서 소개팅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덧 저는 저희 과에서 소개팅 킹이 되어 있었고, 입대 전 3학기 동안 무려 미팅, 소개팅 100번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자매의 사랑을 찾아 쫓아다녔지만 저에게 남은 것은 채울 수 없는 목마름에 대한 깊은 허무감과 3학기 평균 2.0이라는 초라한 성적표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2학년에 올라갈 때쯤 부모님께서 크게 다투시고 이혼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저는 모든 것을 잊고자 군입대를 결심하고 공군에 지원하였습니다. 입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1999년 9월, 자매의 사랑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있던 저는 미팅에서 만났던 한 홍대자매를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 홍대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야곱의 우물을 찾아 해매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사 그곳 벤취에서 마리아목자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본문 요한복음 말씀을 주심으로 영생수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2년 6개월 동안의 외롭고 긴 군생활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성을 맺게 해준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주었습니다. 군생활 동안 목자님은 신앙서적과 말씀이 담긴 편지를 보내주시고, 그 먼 충주까지 5번이나 심방을 오시는 등 저를 헌신적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목자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저는 조금씩 예수님에 대해 배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생활 중 만난 한 자매에게 빠져 자매와 서로 몸을 더듬는 등 정욕죄를 짓고, 깨어진 관계성에서 비롯된 내면의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 시기이도고 했습니다. 2002년 4월 제대 후 처음 참석한 여름수양회에서 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말씀을 통해 제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의 정욕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을 더욱 깊이 있게 배우고자 다니던 교회에서 센터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대1 말씀공부와 팀모임, 주일 말씀 등을 통해 조금씩 예수님을 배워나가며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생수의 단 맛을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생수는 놀라운 능력으로 저를 변화시켰고, 넘치는 축복을 부어주셨습니다. 입대 전 항상 바닥의 성적을 밑돌던 제가 제대 후 계속해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던 제가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사이의 관계성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받은 이 생수의 은혜를 저처럼 야곱의 우물을 찾아 헤매고 있는 캠퍼스 양들에게 나눠주고자 결단하고 2005년 목자의 삶을 결단하였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을 통한 생수의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이 시대 생수의 은혜를 나눠주는 목자로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맛은 봤지만, 야곱의 우물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100% 참맛을 알기 위해서는 여인이 남편문제를 예수님 앞에 온전히 드러내야 했듯이 내면의 죄 문제를 드러내야 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야곱의 우물은 어떤 특별한 노력없이도 너무나도 가까이서 쉽게 그 시원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약 2달 전 친한 친구 한 명이 자기 생일날 저를 강남의 어느 곳으로 초대를 하여 가보니 말로만 듣던 룸사롱이었습니다. 최근 영적인 상태가 안좋았던 저는 아가씨를 불러준다는 친구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못하고 그곳의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회사 동료의 소개로 사내의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가 마음에 들어 자칫하면 적극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의 방법을 통해 자매가 먼저 관계성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저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다시 한번 느끼고 저의 세상적인 목마름의 문제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퍼듀수양회를 통해 심령의 회복을 이뤄주시고 요한복음 4장 메시지를 맡겨주심으로서 이제는 제가 양들에게 말씀의 생수를 나눠주는 목자로 쓰고자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끊임없이 세상의 사랑과 정욕에 대한 목마름으로 허덕이고 있던 저를 먼저 찾아와주시고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인격적으로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믿음으로 목자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야곱의 우물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야곱의 우물로부터 남는 것은 피곤함과 죄의 열매들뿐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들고 찾아오십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거짓 남편을 내려놓고 "내가 그로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참된 만족과 기쁨, 참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영생의 샘을 소유하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4:1-30
요절/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즘 입추가 지나면서 날씨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날씨가 더울수록 사람들은 갈증을 많이 느끼고, 갈증을 해소할 만한 시원한 것들을 찾습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냉장고부터 열고 시원한 생수를 벌컥 벌컥 들이켜야지 좀 살 것 같습니다. 우리 몸의 70% 이상이 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일정량 이상의 수분을 섭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 인간은 육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목마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영적인 목마름을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잠시나마 갈증은 해소될 수 있을 지언정 또 다시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마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또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특별한 생수를 준비해두셨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적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시원하게 마실 수 있길 기도합니다.
Part 1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
이 사건은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작은 마을 근처에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되었을까요?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시간과 노력을 양들을 구원하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양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러자 역사가 흥왕히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와 무리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시기하여 음모를 꾸몄습니다. 예수님은 아직은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떠나셨습니다. 한편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는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볼 때 사마리아인은 피가 섞인 잡놈들이고 자기들은 정통이라는 자기 의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결코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특정 민족이나 특정 나라를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큰 뜻을 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당신만의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이곳에는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준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은 이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마다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인 야곱을 생각하며 감사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역사적인 현장에 오셨습니다. 시간은 유대 시간으로 여섯시, 곧 정오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몸 상태는 어떠하셨습니까? 6절을 보면 ‘예수께서 길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방금 전까지의 긴 도보여행으로 몸이 매우 지치셨습니다. 오늘 날이었다면 버스나 지하철, 혹은 콜택시를 불러서라도 편하게 여행을 하셨겠지만, 당시 예수님은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없이 걸어서 여행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는 표현은 너무나도 지쳐서 바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피곤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우리를 돕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물 곁에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이 시간에 혼자 나타난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중동지역은 햇볕이 무척 뜨거워 어떨 때에는 섭씨 43도까지 올라가곤 합니다. 이런 더위에는 바위에 계란 후라이도 해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인들 또한 이 시간을 피해 보통 아침이나 저녁에 삼삼오오 모여 물을 길으러 가곤 합니다. 이 시간은 여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간을 통해 유용한 정보가 오가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A:어머, 사모님, 어제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 딴거 보셨어요? 어쩜 그렇게 수영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지 몰라~ 안그래요 사모님? 호호. 그래요. 우리 심사무엘도 내일부터 당장 수영 보내려구요. 그건 그렇고 요새 정모세가 성결목자님과 일대일 공부한다는데, 잘 하고 있나요? 어머 그러믄요. 우리 모세가 성결목자님한테 배운 뒤로는 몰라보게 성장했어요. 성결목자님한테 한턱 쏴야겠어요‘ 여인들에게는 이처럼 우물가 수다시간이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뜨거운 대낮에 홀로 물을 길으러 왔을까요?
18절을 보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현재는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별로 나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같은 자유연애시대에는 오히려 여인의 능력을 부러워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중동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라니. 아마 사마리아 신기록이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에게는 우물가에 오는 일이 즐거운 사교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부도덕한 여인이라고 멸시하고 따돌렸기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의 낯을 피해 우물가에 혼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날도 여인은 거기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한 낮에 우물가에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이 거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물동이를 이고 야하게 걸어오다 놀란 행동)이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다가가셨습니까? 다 함께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
그 당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무시했습니다. 사마리아 남자들은 사마리아 여자들을 무시했고, 사마리아 여인들은 이 여인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무시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여인보다 자신을 더 낮추시고 그녀에게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목이 바짝 타거나 물 길을 그릇이 없어서 그녀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깊은 내면의 상처와 목마름의 문제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에게 생수를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마음을 열고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셨습니다. ‘물 한잔만 주시겠습니까?’ 이 말씀에는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류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습니다. 더군다나 공공장소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어딘가 좀 부족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하셨습니까? 다함께 1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선물을 좋아하고, 특히 여자가 선물에 더 약하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화제를 하나님의 선물로 돌리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에 관심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어떤 특별한 물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관심을 가지고, 그렇지만 아직까지 미심적인 마음을 품은 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야곱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내 라헬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로미오와도 같은 남자였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야곱을 매우 이상적인 남자로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남과 비교를 당하게 되면 기분이 나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대신 자신이 주고자 하시는 생수에 대해 소개하셨습니다. 다같이 13,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리 되리라’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는 누구든지 다시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러 마시는 대표적인 한 사람입니다. 여인은 남편의 사랑에 목말라 있던 자였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섬겨줄 진정한 남편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지만 여전히 목말랐습니다. 여인과 같이 우리 모두 또한 매일 우물가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목마름을 잠시 채우지만 또 다시 목마름이 찾아옵니다. 다시 목마른 것, 이것이 바로 여인의 인생이요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목마름이 있을까요? 여인과 같이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과 마음을 바친 사랑을 주고 받아도 사랑의 갈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목이 마릅니다. 또 물질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예전에 히트를 친 모 카드회사 광고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요’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부자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디 부자 되기가 쉽습니까? 그리고 혹 어렵게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무언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고민이 생깁니다. 세계적인 부호 카네기의 소원은 돈을 좀더 버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꼭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적당히 벌어서 즐기며 살면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라는 말이 심령 깊이 들어옵니다. 소개팅에서 퀸카, 킹카를 만나 남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니고 싶습니다. 쌔근한 BMW를 몰고 사랑하는 연인과 도심을 빠져나가 한적한 호숫가를 거닐며 멋과 여유를 즐겨보고 싶습니다. 고시를 패스하고 남들 앞에서 큰 소리치며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고 싶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멋진 삶을 산다면 우리에게 참된 만족과 행복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토익과 인턴, 자격증에 올인합니다. 정욕에 대한 목마름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정욕에 대한 목마름은 매우 강력하여 밤새도록 인터넷 음란물을 보며 목마름을 채우고자 하지만, 남는 것은 깊은 허무감과 수치심뿐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예수님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분명히 다시 목마르다고 하십니다. 다시 목마르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 물을 처음 마실 때는 잠시 목마름이 해갈된다는 뜻입니다. 뭔가 만족도 있고, 성취감과 행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시 곧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정말 우리 인생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목마름도 작았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이나 인형놀이 하나면 우리의 목마름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점점 자라면서 우리의 목마름도 커져갑니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싶고, 친구들에게 인기 짱으로 통하고 싶은 갈증도 생겨납니다. 사춘기 때는 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 앞으로의 인생을 보장받고 싶은 욕구도 생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항상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작은 목마름이 해결되면 더 큰 목마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끊임없이 목이 마른 것일까요? 예레미야 2장 13절은 말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인간이 목마르게 된 원인 두 가지는 바로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간의 목마름은 바로 생수의 근원, 영혼에 참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떠난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습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것으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돈의 웅덩이, 쾌락의 웅덩이, 이성친구의 웅덩이, 성공의 웅덩이, 자아성취의 웅덩이, 공부의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것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웅덩이들은 물을 저축할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분명 물이 고이는 듯 합니다. 처음 팔 때는 그 웅덩이라면 계속해서 시원한 물이 있어 모든 갈증을 다 해소해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그 웅덩이는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또 다른 웅덩이를 팝니다. 본문의 여인은 이러길 무려 다섯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웅덩이들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잠시 갈증을 해소하고는 또 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더 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야곱의 우물가에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은밀하게 돈과 쾌락과 사랑의 물을 기르기 위해 두레박을 내리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른 우물가에서 죄의 열매와 더 큰 목마름, 피곤으로 고통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3절과 14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하나님과의 깨어졌던 관계성을 회복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맺을 때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천국의 기쁨과 평화의 생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제2장 내가 그로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인도 목마른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없는 이 낮에 사람들을 피해 우물을 긷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참 만족과 기쁨, 넘치는 생명력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는 여인의 진실된 고백이요 피맺힌 절규요,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이 같은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제까지 예수님은 은혜로우셨습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은혜, 은혜없는 진리는 사람을 바로 도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아픈 부분, 즉 죄문제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남편 문제는 하나님과 여인과의 관계를 막는 죄 문제요, 구체적으로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여인은 그 동안 진정한 남편만 만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진정한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상처를 받고 계속해서 새로운 남편을 찾아 해맸습니다. 여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여인의 문제를 건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거룩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곪은 곳을 수술 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건드려야 하듯이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여인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예수님이 아픈 곳을 건드리자 여인은 본능적인 자기방어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거짓말쟁이! 너 회개 안하면 지옥에 가!’라고 거칠게 몰아부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목자들이 양들을 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말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셨습니다.
17b, 18절을 보십시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말씀은 ‘정말 남편다운 남편이 없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녀가 진정으로 의지하고 사랑할,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남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이는 예수님이 최소한 선지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면 깊이 해결되지 않은 예배 문제에 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의 진짜 문제는 남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문제는 잘못된 대상을 예배한 데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순결과 헌신, 사랑 그리고 신실함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닌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인이 그렇게 죄를 짓고 목마르게 된 이유였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예배에 대해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이에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21-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정죄받아 마땅할 것 같은 사마리아 여인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녀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도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고, 하나님은 그녀가 당신께 나아오길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시자 그녀는 영적인 소원으로 가득해졌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녀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메시아가 오셔서 그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녀를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직접 그녀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다같이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내가 그라’ ‘I am he’ 예수님은 자신이 여인이 그토록 찾던 메시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모든 목마름을 해결하는 영생의 샘이요, 참 남편이 되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여인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녀는 놀라면서도 예수님께서 그녀의 진정한 남편이요 참된 예배의 대상이신 메시아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내면에 기쁨의 생수가 흘러 넘쳤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그녀는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좇아 헤매던 부도덕한 여인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귀한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치 베이징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세요. 이 분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저는 1979년 경기도 파주에서 이란성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그리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특별히 부족한 것 없이 잘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당신께서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이 있으셨기 때문에 너희는 꼭 공부를 잘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말씀을 지겹도록 늘어놓으셨습니다. 저는 이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시험성적이 발표될 때마다 제 이름이 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며, 친구들의 부러움과 선생님의 칭찬을 즐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전 아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전 온갖 더러운 것들로 내면이 가득찬 자였습니다. 중학교 때 우연히 알게 된 자위행위는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탈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한 때는 이러한 행동을 청소년기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 적도 있었으나 몰려오는 죄의식과 수치심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건전한 모범생이요 속으로는 온갖 음란한 상상으로 가득찬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욕에 대한 목마름과 더불어 자매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 또한 남달랐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예쁜 자매와 사귀는 상상을 하곤 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예쁜 자매에게 터프하게 대쉬하여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우성 같은 외모가 안됐던 저는 공부를 통해서라도 자매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만 좋은 데 들어가면 여자는 줄줄이 따라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믿고 자매에 대한 목마름을 참고 공부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항상 1등만을 추구했던 저는 대학 또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에 교장추천제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면접과 논술에서 떨어지고 1998년 당시 제일 인기있는 학과 중 하나였던 신방과가 있는 연세대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하였습니다. 비록 전 목표로 했던 서울대는 떨어졌지만, 별로 슬프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왠지 고리타분해 보이는 서울대보다 자유로워보이는 연세대가 저의 목마름의 욕구를 훨씬 더 잘 채워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구독하던 학습지를 통해 알게 됐던 예쁜 누나가 연대 신방과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참아왔던 저의 목마름에 대한 갈증을 대학에서 마음껏 풀어보리라는 벅찬 기대감을 가지고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은 화려한 대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공부는 지금까지 많이 했으므로, 대학생활의 목표를 사람들과의 관계성 형성으로 잡았습니다. 신입생 때부터 온갖 모임을 쫓아다니며 사람들과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일주일에 2-3번은 선배 자취방에서 술에 취해 자곤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 동안 참아왔던 자매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각종 미팅, 소개팅을 통해 나만의 줄리엣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소개팅을 할 때마다 만족하지 못하고 다음에는 좀더 괜찮은 자매가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계속해서 소개팅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덧 저는 저희 과에서 소개팅 킹이 되어 있었고, 입대 전 3학기 동안 무려 미팅, 소개팅 100번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자매의 사랑을 찾아 쫓아다녔지만 저에게 남은 것은 채울 수 없는 목마름에 대한 깊은 허무감과 3학기 평균 2.0이라는 초라한 성적표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2학년에 올라갈 때쯤 부모님께서 크게 다투시고 이혼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저는 모든 것을 잊고자 군입대를 결심하고 공군에 지원하였습니다. 입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1999년 9월, 자매의 사랑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있던 저는 미팅에서 만났던 한 홍대자매를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 홍대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야곱의 우물을 찾아 해매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사 그곳 벤취에서 마리아목자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본문 요한복음 말씀을 주심으로 영생수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2년 6개월 동안의 외롭고 긴 군생활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성을 맺게 해준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주었습니다. 군생활 동안 목자님은 신앙서적과 말씀이 담긴 편지를 보내주시고, 그 먼 충주까지 5번이나 심방을 오시는 등 저를 헌신적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목자님의 사랑과 섬김으로 저는 조금씩 예수님에 대해 배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생활 중 만난 한 자매에게 빠져 자매와 서로 몸을 더듬는 등 정욕죄를 짓고, 깨어진 관계성에서 비롯된 내면의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 시기이도고 했습니다. 2002년 4월 제대 후 처음 참석한 여름수양회에서 누가복음 23장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말씀을 통해 제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의 정욕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을 더욱 깊이 있게 배우고자 다니던 교회에서 센터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대1 말씀공부와 팀모임, 주일 말씀 등을 통해 조금씩 예수님을 배워나가며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생수의 단 맛을 맛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생수는 놀라운 능력으로 저를 변화시켰고, 넘치는 축복을 부어주셨습니다. 입대 전 항상 바닥의 성적을 밑돌던 제가 제대 후 계속해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던 제가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사이의 관계성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저는 제가 받은 이 생수의 은혜를 저처럼 야곱의 우물을 찾아 헤매고 있는 캠퍼스 양들에게 나눠주고자 결단하고 2005년 목자의 삶을 결단하였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을 통한 생수의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이 시대 생수의 은혜를 나눠주는 목자로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맛은 봤지만, 야곱의 우물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의 100% 참맛을 알기 위해서는 여인이 남편문제를 예수님 앞에 온전히 드러내야 했듯이 내면의 죄 문제를 드러내야 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야곱의 우물은 어떤 특별한 노력없이도 너무나도 가까이서 쉽게 그 시원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약 2달 전 친한 친구 한 명이 자기 생일날 저를 강남의 어느 곳으로 초대를 하여 가보니 말로만 듣던 룸사롱이었습니다. 최근 영적인 상태가 안좋았던 저는 아가씨를 불러준다는 친구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거절하지 못하고 그곳의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회사 동료의 소개로 사내의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가 마음에 들어 자칫하면 적극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의 방법을 통해 자매가 먼저 관계성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저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다시 한번 느끼고 저의 세상적인 목마름의 문제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퍼듀수양회를 통해 심령의 회복을 이뤄주시고 요한복음 4장 메시지를 맡겨주심으로서 이제는 제가 양들에게 말씀의 생수를 나눠주는 목자로 쓰고자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끊임없이 세상의 사랑과 정욕에 대한 목마름으로 허덕이고 있던 저를 먼저 찾아와주시고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인격적으로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믿음으로 목자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야곱의 우물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나 야곱의 우물로부터 남는 것은 피곤함과 죄의 열매들뿐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들고 찾아오십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거짓 남편을 내려놓고 "내가 그로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참된 만족과 기쁨, 참 생명을 공급해 주시는 영생의 샘을 소유하길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