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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회 2008 청천여름수양회 주제3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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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2,866회 작성일 08-08-17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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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청천여름수양회 주제3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17
요절 /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번 수양회 제목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이 제목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많은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사랑, 인생의 목마름 가운데 고통하는 한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신 주님의 사랑등 수 많은 사랑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 이런 사랑이 있겠습니까? 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디베랴 바다를 배경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과 처음 만나 사랑의 관계성을 맺으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버리고 실의와 좌절가운데 옛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을 동일한 사랑으로 다시 찾아와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은혜를 배반하고 사명을 저버린 그들을 책망하시기보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다시금 제자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와서 조반을 먹으라 (1-14)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 그 후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후를 말합니다. 디베랴 호수와 게네사렛 또 우리가 잘 아는 갈릴리 호수는 다 같은 말입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찾아오시고 부르셨던 첫 만남, 첫 사랑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난 제자들이 현재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를 다니며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증거해야 할 제자들이 사명의 땅을 떠나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포기지 않으시고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은 디베랴 호수에 갔습니다. 디베랴는 제자들이 예전에 고기를 잡으면서 생업을 유지하던 고향입니다. 본래 고향은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성공하는 사람이야 좋은 곳이지 실패한 사람에게 괴로운 곳입니다. 그래서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밤에 몰래 왔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좋은 모습으로 오지 못하고 조용히 왔다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있지 못하고 고향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두번 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열한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사건을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꾸짖으시며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 두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며 도마를 도와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번이나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성경에 예언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보았는데도 왜 고향으로 내려가 버리는 것입니까? 이는 주님의 부활하신 것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틀림없는데 그건 예수님의 사건이고 내게는 아무런 사건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좌절하고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고통스럽고 여전히 의욕이 없어서 살아갈 인생이 막막해서 에라 안되겠다 갈릴리로 가야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거기에 3년전에 버려둔 배가 있고 그물이 있습니다. 할 것도 없으니 그거라도 해야 겠다하고 베드로가 가니 여섯 제자가 함께 갔습니다. 이것은 부활은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믿는데 그것이 나의 삶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활을 들어도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인생이 답답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동안 그들 마음속에 자기 허물로 인한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여전히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과 두려움, 패배의식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상처가 크니까 예수님께서 두번이나 그들을 찾아오셔도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도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밤이 하얗게 새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빈 그물만 건져 올려야 했습니다. 물고기들이 “용용 나 잡아봐라”하며 비웃는 거 같았습니다. 그들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텅 빈 그물을 말아 쥔 베드로의 심정은 왜 내 인생은 이렇게 실패뿐인가 낙심하였습니다. 제자 생활도 실패하고, 자기의 전공인 고기잡이에서도 실패한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는 실패자요 배신자였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결과가 이 빈 그물처럼 허망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의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크기때문에 서로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서시며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고 실패한 것을 보셨습니다. 빈그물 속에서 실패와 절망 속에 지쳐 낙심하며 돌아오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이해하신 주님은 다정하신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없나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물어보는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알고 묻는 것 같아 위로를 얻으며 ‘없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고자 하였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배 오른편에 던진다고 밤새 잡지 못한 고기가 잡힐리 만무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겸손히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됬습니까? 그들을 비웃으며 그물을 피하던 고기가 갑자기 그물을 향하여 돌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이 뛰어들었던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쩔줄 모르며 “고기다 고기” 환호를 지르며 좋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심령에 낙심과 슬픔과 사라지고 기쁨과 생기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3년 전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처럼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은 3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처럼 도와주시고, 처음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나 절망의 끝, 실패한 모습으로 있을지라도 거기까지 친히 찾아오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십니다. 때로 우리가 주님을 놓쳐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은 언제나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나중에야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고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그제서야 이 모든게 바로 주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물에 뛰어들어갈 때 겉옷을 벗어 버립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는 말을 듣자마자 도리어 겉옷을 몸에 두르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심을 나타냈습니다. 베드로는 박태환 빰치듯이 자유형, 배형, 버터플라이를 해가며 힘차게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유별나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사랑표현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를 타고 주님을 향해 육지로 왔습니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 보자 그곳에는 빨간 숯불이 탁탁소리를 내며따뜻하고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숯불 위에 맛있는 떡과 생선을 못자국난 손으로 친히 굽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주, 만유의 주께서 제자들을 위해 친히 아침밥을 짓고 계셨습니다. 괜스레 먼저 달려온 베드로는 온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숯불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온 제자들도 예수님의 시선을 피하며 몸들 바를 두지 못했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예수님을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듯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며 분위기를 바꾸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눈치를 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고기만 153마리까지 일일이 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마음껏 나아오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넘치는 사랑과 용서의 음성으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다같이 12절 상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종아리를 걷어라. 매좀 맞자!” 또는 “와서 훈련을 받아라”하시지 않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말씀 하셨습니다. 차라리 책망을 하시고 20page 회개 소감을 써오라 하시면, 그래도 마음이 편할텐데 예수님은 책망 한마디 안하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이해하시고 끝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죄와 허물 가운데 있을 지라도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조반을 당당하게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용서의 사랑은 알았지만, 죄책감 때문에, 지은 죄 때문에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속마음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다가가 그 못자국난 손으로 떡과 생선을 가져다가 한사람, 한사람 친히 먹여 주셨습니다. "요한, 자, 아, 해봐! 도마, 의심하느라 고생 많았지!"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고개숙이고 있는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한 그 입에도 떡과 고기를 넣어 주셨습니다. 은은히 타오르는 숯불은 예수님을 배반하여 멀리멀리 떠났던 그들의 발도 녹이고,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었습니다. 갈릴리 해변가에서 은은히 타오르는 것은 숯불이 아니라 변함없는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이 먹고 있는 것도 떡과 고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제자들은 목이 메어 울었습니다. 사나이 베드로도 마침내 눈물, 콧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의식에 눌리고, 실패와 절망감에 짓눌렸던 제자들의 심령에 주님의 사랑이 폭포수같이 흘러 넘쳤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마음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허다한 죄를 덮었습니다(벧전 4:8).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 13:8). 우리는 흔히 내가 뭔가 잘하면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인정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뭔가 좀 못하고 실수하고 범죄하여 넘어질 때면 혹시나 짤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변함없이 먹여주시고 섬겨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나의 죄와 허물, 절망과 두려움을 이기는 힘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만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요,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사랑의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II.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5-17)

  사랑의 Beach Party가 끝나갈 무렵 갈릴리 호수는 쏟아지는 태양빛으로 반짝거렸습니다. 사랑으로 충만해진 제자들의 눈빛도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베드로에게 잔잔한 음성으로 물으셨습니다. 15a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다른 많은 것도 물어 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베드로와의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모래'란 뜻인 '시몬' 그의 본명처럼 베드로는 원래가 부족하고 실수가 많은 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스피릿이 있을 때는 너무 천방지축 날뛰고, 스피릿이 없으면 옛 습관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한지 몇시간 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많은 허물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연약할 때에, 심지어 원수처럼 세 번 부인한 때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지금 현재도 베드로를 사랑하시고, 그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베드로가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놓으시기까지 절대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며 은혜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 첫 자리에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마음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 세상 물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좇아 살게 마련입니다. 이미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는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과거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자기 생각과 열심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앞장서 호언장담하며 큰소리를 잘 쳤습니다. 그러나 뼈아픈 죄악과 실수를 통해 그는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사랑고백 조차 주님을 겸손히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질문을 듣는 순간 베드로는 심히 근심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세 번 부인한 실수와 허물이 그의 심령을 아프게 때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서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근심스런 눈빛과 예수님의 자애로운 눈빛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주님, 3년 동안 저와 함께 하시면서 저를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연약하고 잘 넘어지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제가 영접합니다. 제가 이 주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꺼져가는 심지와 같던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을 때 파괴되었던 사랑의 관계성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졌습니다. 이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과거의 실패와 상처는 주님의 은혜로 변했습니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한없는 행복과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이 사랑의 관계성 속에 실패의 사람 베드로가 회복의 사람이 되었고, 배반자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베드로의 현재적 사랑고백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 사랑을 물으시면서 과거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혹은 미래에 "네가 나를 사랑할 것이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현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현재적 사랑고백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님과의 첫 만남, 첫사랑의 뜨거운 감격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차츰 이 감격이 사라지고 무덤덤한 신앙생활, 별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님 만난 양들은 메시지를 들으며 "아멘, 아멘"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어떤 신앙경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당연스럽게 '아멘' 하면서, '이 메시지 벌써 몇번 짼가!' 하고 졸기만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가슴이 식어지고 냉랭해질 때, 신앙은 더 이상 기쁨이 아니라 그저 의무요 형식이 되어 버립니다. 이때 우리 신앙생활에 이상한 감들이 생겨납니다. 양을 쳐야 된다는 부담감, 잘못한다는 죄책감, 해도 안되더라는 실패감,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회의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왠 감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이상한 감들에 시달리는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나를 뜨겁게 사랑하시는 주님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식어진 결혼생활이 위기이듯,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을 때 신앙생활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 초청하시고 숯불사랑으로 뜨거운 사랑의 조반을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생명력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나의 현재적 사랑고백을 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주님과 나와의 새롭고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 원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비록 식어진 가슴으로 살아왔을지라도, 또 이번 수양회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나 뭘 잘 몰라도, 주님께 나의 현재적인 사랑고백을 드려야겠습니다. 이 시간 베드로처럼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께 사랑 고백하는 고백의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묻고, 베드로처럼 사랑고백을 해 보겠습니다.  “00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주님 그러나아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3. 내 어린양을 먹이라 (15 ~17)

예수님은 사랑하는 베드로가 위대한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들으실 때마다 그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베드로에게 짐을 지우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에 기초해 양들을 말씀으로 먹이는 위대한 사명인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양들의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목자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이제 목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 영광스런 목자의 직분과 사명을 베드로에게 넘겨주시는 것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는 일생 물고기나 잡는 어부로 살았을 베드로에게 임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야, 넌 너무 부족하니 갈릴리 양들이나 감당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다만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를 믿고 온 세상의 양무리를 맡기셨습니다. 이로서 베드로는 사도행전의 놀라운 생명구원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명이 그의 인생을 위대하게 한 것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는 단지 베드로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한 모든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양치는 것이 UBF의 전유물로 여기고 다 좋은데 양치는 사명이 부담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양을 치는 것은 단지 신앙의 의무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감당하는 은혜일 뿐입니다. 또한 양치는 목자생활 자체가 자기 의가 될 수 없는 것도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될 때만이 우리는 양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정말 양들을 사랑하고 먹이고자 할 때, 주님은 사명을 감당할 지혜와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때문에 목자생활은 은혜가 있습니다. 의미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귀한 양무리들을 먹이는 영광스런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제가 어떠한 모습에 있던지 변함없이 저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졸업 후 군문제를 해결하고자 병역특례에 도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취업을 도전한지 일년이 지나도 취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도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때 제자양성의 아무런 열매도 없었습니다. 장막에서도 형제들이 아무런 성장이 없더니 나중에는 “목자님 저에 대해 얼마나 아세요?” 하며 떠나갔습니다. 또 그 당시 동역자들이 많이 떠남으로 목자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취업도 안되고 제자양성도 안되고, 형제들도 저를 비난하고 떠나는등 모든 부분에서 다 실패한 것 같아 깊이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장막에서 한 불미스러운 사건을 생겨 장막을 뛰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날밤 양화대교를 걸어가는데 하염없는 눈물이 났습니다. 어두운 강물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나 이해가 되는 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가 거기에 있길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이 있는 예양원에 찾아갔습니다. 며칠간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보며 목사님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앞에 어떻게 저런 사랑이 나오나 묵상하면서 제 안에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서 자기 성실과 자기의 로 가득한 교만한 저의 모습, 작은 고난앞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감사치 않는 저의 죄악, 작은 실패에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순종하며 살았던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여러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취업이 되지 않아 공익근무를 군복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을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그 기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였는데 이 경력 때문에 군복무를 마치고 바로 취업할 수 있었습니다. 토익시험 한번 본 적 없지만 카이스트, 서울 연고대등 쟁쟁한 사람이 많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 음악, 동영상편집등 다양한 것을 배우게 하셔서 하나님 역사에 여러모양으로 쓰임받게 하셨습니다. 또 제자양성에서도 다시 도전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장막에서도 자기 중심적이고 무정한 제가 형제들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내면성 있는 자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저를 친히 만나주시고 저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저의 모든 실패를 만회시켜 주시고, 제 삶에 승리를 주사 저의 심령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저를 햔한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은 저에게도 물으십니다. “남기문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바쁜 직장생활에 어느덧 적응을 하다보니 영적인 것에는 소원해지고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남들도 다하는 제태크를 하여 물질을 잘 벌고 싶은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사에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니 세상에 즐길거리가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많은 유혹을 받으니 세상에 마음이 가길 잘하였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향할때 영적인데는 둔감해져 점차 세상에서 소시민적으로 사는데 만족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회사에 중요한 프로젝트가 계속되는 실패로 인해 큰 실패감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불려가 “이렇게 책임값이 일하면 되겠어” 말을 듣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들으니 몇 달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잘하고자 열심히 했는데 모든 실패의 화살이 저한테 오니 모든 것이 허무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계속해서 제가 하는 일들에게 대해 의심하고 따지는 사람들이 느는 것 같아 일하는 것이 힘들고 내면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퍼듀 국제 수양회 참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저의 내면가운데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살면서 점차로 주님보다 세상에서 인정과 돈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사명보다는 제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습니다. 제 안에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 세상에서 실패하고 절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며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저의 허물과 죄악에도 저를 만나주시고 저의 내면의 실패와 절망대신 평강과 기쁨을 주시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제가 부족하고 허물이 많지만 주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주님 부족하지만 주님께 고백합니다.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저에게 맡기신 홍대 양무리를 섬기는 목자의 삶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수양회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되 이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생명을 얻고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때 양을 감당하는 사명을 은혜롭게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이 주님께 우리가 현재적 사랑고백을 드리며, 영광스런 사명인의 인생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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