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 2007 초평여름수양회 셋째날 저녁메시지 - 섬기러 오신 왕 (막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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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수양회 메시지
섬기러 오신 왕
말씀 마가복음 10:32-45
요절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마가복음 전체의 요절이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잘 요약해 놓은 구절이기도 합니다. “섬기러 오신 왕”이는 이번 여름수양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왕의 왕이요 주의 주시지만 이 땅에 섬김을 받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고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낮아져 남을 섬기고 희생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정신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모임이 예수님의 섬김으로 서로 섬기고 또 희생하는 분들로 채워질 때 우리 안에는 더욱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할 것입니다. 저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배우고 저희도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2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미 예수께서는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당신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은 이 말씀이 기억나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상에서 다시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 하반절부터 34절까지 보십시오.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예언은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할 것까지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는 자신에게 닥쳐 올 모든 일이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 속에 있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당하실 고난뿐 아니라 그 후에 있을 부활의 영광까지도 바라보시며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 뒤에는 승리와 영광이 있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담대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계시하시고 그들이 주님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마음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들 마음이 불안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입성과 함께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이 말씀에 몹시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으리라" 그들에게는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 이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영광을 얻으실 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 이것이 그들의 청탁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만만한데 베드로가 그들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면 베드로가 국무총리 자리를 차지할 것이 뻔했습니다. ‘으~ 베드로만 없다면 내가 No.1인데’ ‘베드로만 없다면 예수님의 인정은 다 내 차진데’ 그들은 베드로를 데리고 온 피싱목자 안드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좀 비겁하긴 하지만 그들은 청탁이라도 해서 주님 좌우편에 앉는 영광을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떤 자가 참으로 큰 자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참으로 큰 자는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고난이 없는 영광을 구한 것, 이것이 제자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구하는 그들에게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되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진정 영광을 얻기 원하다면 영광 자체를 구하기보다 고난의 쓴 잔을 마셔야 합니다. 고난이 없이는 결코 영광도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어떤 고난의 잔을 마시셨습니까?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과 죽음의 잔, 이 잔을 예수님은 마시셨습니다. 이 고난의 잔을 마심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고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8-11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진정 큰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합니다. 그 잔이 죽을 것 같이 쓰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이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39절을 보십시오. 잔을 마실 수 있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We can!” 그들은 비록 인간적인 야심에서 이렇게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이 말씀대로 후에 야고보는 초대교회에서 피를 뿌리며 순교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고, 요한은 최후까지 밧모섬에서 주님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잔을 그들이 마시겠으나 예수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예수님은 사정없이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들은 열 제자들은 뚜껑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화가 난 이유는 자신들도 두 제자와 같이 권력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일로 그들 사이는 더 냉냉~해지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싸움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3년 반이나 이들을 섬기신 예수님이 이들을 볼 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하시며 말씀으로 그들을 섬겨주셨습니다.
둘째로, 참으로 큰 자는 낮아져 겸손히 섬기는 자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당시 로마 황제는 세속적인 권세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위용과 영광이 넘치는 모습으로 높은 보좌에 앉아 손가락을 움직여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했습니다.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내리 꽂으면 뭐죠? '죽이라'는 것이고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면 '살려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세상 권세자들의 특징은 위에서 백성을 내리누르고 권세를 부려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not so with you. ‘너희들은 세상 권세자들과 달라야 한다. 그들이 하듯 권세를 부리고 위에서 남을 내리누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낮아져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큰 자는 누구입니까? 참으로 큰 자는 남의 위에서 명령하고 지시하고 권위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종과 같이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입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직분이나 타이틀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다른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외적인 요소를 보고 위대함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은 내적인 데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깁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깁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큰 자,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4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으뜸은 뭡니까? 리더를 말합니다. 종은 뭡니까? 섬기는 자, 즉 서번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섬김의 리더십, 즉 서번트 리더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리더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리드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많은 리더십 유형이 논의되고 연구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내외에서 단연 최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100대 기업 중 절반 이상이 교육훈련 프로그램에 이 서번트 리더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1977년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책을 처음으로 쓴 AT&T의 로버트 그린리프 부사장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의 컨셉을 성경과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라는 소설에서 얻어왔습니다. 이 소설에 레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순례단 여행의 일원이었는데 여행 중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당연히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 갑자기 그가 사라집니다. 그 후 순조롭게 진행되던 일들에 문제가 생기고 일행은 큰 혼돈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레오가 없어진 뒤에야 그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가 인식합니다. 결국 여행은 중단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몇 년을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레오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저 심부름꾼으로만 알았던 그가 교단의 책임자인 동시에 정신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훌륭한 서번트 리더도 예수님의 섬김에는 필적할 수 없습니다. 이는 빌게이츠 앞에서 돈 자랑하고 광랜 앞에서 모뎀 쓰는 겪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첫째,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45절을 다시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빌립보서 2: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던 천지만물의 창조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모든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왕이신 그 분께서 도리어 낮아져 인생들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탄생부터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까지 섬김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 비천한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니고데모를 밤늦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섬기셨습니다.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하시며 낮아져 대화를 청하시고 자신의 목마름을 해소하기보다 여인에게 영생수를 주시기 위해 섬기셨습니다.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2000마리의 돼지 떼가 번지점프하여 익사하도록 희생하시며 섬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주위에는 늘 섬김이 필요한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인내하시며 섬기셨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제자들, 그들의 때낀 발을 주와 선생되신 예수께서 손수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제자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잠수타서 사라지고 수제자 베드로는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저라면 배신 때린 제자들을 개거품 물때까지 갈릴리 호수를 돌게 했을 텐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을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왕이신 예수께서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이렇게 섬김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본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감화하여 섬기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 한번 맞춰 보세요. 왜소한 체구의 쭈글쭈글 늙으신 할머니 한 분. 바로 마더 테레사 수녀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지막 이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가시기까지 그녀는 가난한 자중에 가장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고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거둘 뿐 아니라 나병 환자의 악취나는 몸을 씻어주고 죽어가는 에이지 환자를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그녀의 섬김의 삶에 감동된 많은 이들이 세 명으로 시작한 사랑의 선교회에 동참하여 전 세계 105개국에 거대한 봉사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공동 창설자이신 사라 배리 선교사님은 미국 미시시피 주의 부호의 딸로서 얼마든지 평생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955년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 달 동안 배를 타고 한국 땅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가난한 대학생들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서 안전이 보장된 미국선교사 사택을 나와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의 단칸방에 살면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분은 대학생들을 섬기느라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캠퍼스 사역에 드렸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 모임에는 주님의 역사를 희생적으로 섬기신 수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이러한 분들의 섬김과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 모임이 있게 되었고 90개국에 1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섬기는 인생은 당장 그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또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참으로 위대한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섬기는 삶을 살므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위해 오셨습니다. 45절 하반절을 다시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대속물은 영어로 ransom으로, 즉 어떤 것을 값을 치르고 되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인생들이 죄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는 사망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죽음예찬론자들의 주장처럼 죽음도 아름답게 미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뒤에는 반드시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나 선을 통해서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그 대가로 희생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으로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 같이 희게 용서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나음을 얻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국가나 타인을 위해서 희생할 때 우리는 그 희생을 숭고하고 고귀하다 합니다. 여기에 한 예가 있습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미국인 선교사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국 땅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선교사는 급히 병균을 병 속에 채취해 면역체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공항에서는 승객 하나하나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발각이 되면 모든 것이 헛일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입 속에 그 병균을 털어 넣었습니다. 병에 감염된 그는 고열로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는 꺼져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죽을 힘을 다해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내 몸은 지금 중국에서 번지고 있는 이름모를 전염병에 감염되었습니다. 꼭 면역체를 만들어 주시오” 그 후 그는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숭고한 희생으로 전염병에 대한 면역체가 만들어서 중국 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이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에서부터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를 짓누르던 죄의 짐이 풀리고 가슴을 내리누르던 죄의 고통이 사라집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우리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인해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목자의 삶은 섬김의 삶입니다. 양들을 섬기고 동역자들을 섬기는 삶입니다. 이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이 삶을 위대하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가장 잘 섬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그도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말씀과 사랑으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있는 캠퍼스 양들을 일생 섬기는 참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본을 좇아 서로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도리어 섬기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까지 대속물로 내어 주신 그 놀라운 희생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섬기러 오신 왕
말씀 마가복음 10:32-45
요절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마가복음 전체의 요절이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가장 잘 요약해 놓은 구절이기도 합니다. “섬기러 오신 왕”이는 이번 여름수양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왕의 왕이요 주의 주시지만 이 땅에 섬김을 받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고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낮아져 남을 섬기고 희생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정신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모임이 예수님의 섬김으로 서로 섬기고 또 희생하는 분들로 채워질 때 우리 안에는 더욱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할 것입니다. 저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배우고 저희도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2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미 예수께서는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당신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은 이 말씀이 기억나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상에서 다시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32절 하반절부터 34절까지 보십시오.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예언은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할 것까지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는 자신에게 닥쳐 올 모든 일이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 속에 있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당하실 고난뿐 아니라 그 후에 있을 부활의 영광까지도 바라보시며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은 고난 뒤에는 승리와 영광이 있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담대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계시하시고 그들이 주님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마음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들 마음이 불안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입성과 함께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이 말씀에 몹시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으리라" 그들에게는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 이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영광을 얻으실 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 이것이 그들의 청탁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만만한데 베드로가 그들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면 베드로가 국무총리 자리를 차지할 것이 뻔했습니다. ‘으~ 베드로만 없다면 내가 No.1인데’ ‘베드로만 없다면 예수님의 인정은 다 내 차진데’ 그들은 베드로를 데리고 온 피싱목자 안드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좀 비겁하긴 하지만 그들은 청탁이라도 해서 주님 좌우편에 앉는 영광을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떤 자가 참으로 큰 자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참으로 큰 자는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고난이 없는 영광을 구한 것, 이것이 제자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구하는 그들에게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되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진정 영광을 얻기 원하다면 영광 자체를 구하기보다 고난의 쓴 잔을 마셔야 합니다. 고난이 없이는 결코 영광도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어떤 고난의 잔을 마시셨습니까?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과 죽음의 잔, 이 잔을 예수님은 마시셨습니다. 이 고난의 잔을 마심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고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8-11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진정 큰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합니다. 그 잔이 죽을 것 같이 쓰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이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39절을 보십시오. 잔을 마실 수 있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나이다. We can!” 그들은 비록 인간적인 야심에서 이렇게 대답했지만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이 말씀대로 후에 야고보는 초대교회에서 피를 뿌리며 순교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고, 요한은 최후까지 밧모섬에서 주님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잔을 그들이 마시겠으나 예수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예수님은 사정없이 딱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들은 열 제자들은 뚜껑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화가 난 이유는 자신들도 두 제자와 같이 권력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일로 그들 사이는 더 냉냉~해지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싸움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3년 반이나 이들을 섬기신 예수님이 이들을 볼 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하시며 말씀으로 그들을 섬겨주셨습니다.
둘째로, 참으로 큰 자는 낮아져 겸손히 섬기는 자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당시 로마 황제는 세속적인 권세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위용과 영광이 넘치는 모습으로 높은 보좌에 앉아 손가락을 움직여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했습니다.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내리 꽂으면 뭐죠? '죽이라'는 것이고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세우면 '살려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세상 권세자들의 특징은 위에서 백성을 내리누르고 권세를 부려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43,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not so with you. ‘너희들은 세상 권세자들과 달라야 한다. 그들이 하듯 권세를 부리고 위에서 남을 내리누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도리어 낮아져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큰 자는 누구입니까? 참으로 큰 자는 남의 위에서 명령하고 지시하고 권위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종과 같이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입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직분이나 타이틀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다른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외적인 요소를 보고 위대함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대함은 내적인 데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깁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깁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큰 자,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4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으뜸은 뭡니까? 리더를 말합니다. 종은 뭡니까? 섬기는 자, 즉 서번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섬김의 리더십, 즉 서번트 리더십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리더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리드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많은 리더십 유형이 논의되고 연구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국내외에서 단연 최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100대 기업 중 절반 이상이 교육훈련 프로그램에 이 서번트 리더십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1977년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책을 처음으로 쓴 AT&T의 로버트 그린리프 부사장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의 컨셉을 성경과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라는 소설에서 얻어왔습니다. 이 소설에 레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순례단 여행의 일원이었는데 여행 중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당연히 심부름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 갑자기 그가 사라집니다. 그 후 순조롭게 진행되던 일들에 문제가 생기고 일행은 큰 혼돈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레오가 없어진 뒤에야 그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가 인식합니다. 결국 여행은 중단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몇 년을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레오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저 심부름꾼으로만 알았던 그가 교단의 책임자인 동시에 정신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아무리 훌륭한 서번트 리더도 예수님의 섬김에는 필적할 수 없습니다. 이는 빌게이츠 앞에서 돈 자랑하고 광랜 앞에서 모뎀 쓰는 겪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첫째,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45절을 다시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섬기러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빌립보서 2: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셨던 천지만물의 창조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모든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왕이신 그 분께서 도리어 낮아져 인생들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탄생부터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까지 섬김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 비천한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니고데모를 밤늦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섬기셨습니다.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하시며 낮아져 대화를 청하시고 자신의 목마름을 해소하기보다 여인에게 영생수를 주시기 위해 섬기셨습니다.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2000마리의 돼지 떼가 번지점프하여 익사하도록 희생하시며 섬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주위에는 늘 섬김이 필요한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인내하시며 섬기셨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제자들, 그들의 때낀 발을 주와 선생되신 예수께서 손수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제자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잠수타서 사라지고 수제자 베드로는 주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저라면 배신 때린 제자들을 개거품 물때까지 갈릴리 호수를 돌게 했을 텐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을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왕이신 예수께서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이렇게 섬김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본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감화하여 섬기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 한번 맞춰 보세요. 왜소한 체구의 쭈글쭈글 늙으신 할머니 한 분. 바로 마더 테레사 수녀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마지막 이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가시기까지 그녀는 가난한 자중에 가장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을 돌보고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거둘 뿐 아니라 나병 환자의 악취나는 몸을 씻어주고 죽어가는 에이지 환자를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그녀의 섬김의 삶에 감동된 많은 이들이 세 명으로 시작한 사랑의 선교회에 동참하여 전 세계 105개국에 거대한 봉사조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공동 창설자이신 사라 배리 선교사님은 미국 미시시피 주의 부호의 딸로서 얼마든지 평생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955년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 달 동안 배를 타고 한국 땅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가난한 대학생들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서 안전이 보장된 미국선교사 사택을 나와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의 단칸방에 살면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분은 대학생들을 섬기느라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캠퍼스 사역에 드렸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 모임에는 주님의 역사를 희생적으로 섬기신 수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이러한 분들의 섬김과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 모임이 있게 되었고 90개국에 1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섬기는 인생은 당장 그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또 누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참으로 위대한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섬기는 삶을 살므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위해 오셨습니다. 45절 하반절을 다시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서 대속물은 영어로 ransom으로, 즉 어떤 것을 값을 치르고 되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인생들이 죄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는 사망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죽음예찬론자들의 주장처럼 죽음도 아름답게 미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뒤에는 반드시 둘째 사망 즉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나 선을 통해서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그 대가로 희생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으로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가 양털 같이 희게 용서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나음을 얻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국가나 타인을 위해서 희생할 때 우리는 그 희생을 숭고하고 고귀하다 합니다. 여기에 한 예가 있습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미국인 선교사가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국 땅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선교사는 급히 병균을 병 속에 채취해 면역체를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공항에서는 승객 하나하나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발각이 되면 모든 것이 헛일이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입 속에 그 병균을 털어 넣었습니다. 병에 감염된 그는 고열로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는 꺼져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죽을 힘을 다해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내 몸은 지금 중국에서 번지고 있는 이름모를 전염병에 감염되었습니다. 꼭 면역체를 만들어 주시오” 그 후 그는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숭고한 희생으로 전염병에 대한 면역체가 만들어서 중국 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이 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멸망에서부터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를 짓누르던 죄의 짐이 풀리고 가슴을 내리누르던 죄의 고통이 사라집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우리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인해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목자의 삶은 섬김의 삶입니다. 양들을 섬기고 동역자들을 섬기는 삶입니다. 이 삶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이 삶을 위대하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가장 잘 섬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그도 주님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말씀과 사랑으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있는 캠퍼스 양들을 일생 섬기는 참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본을 좇아 서로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도리어 섬기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까지 대속물로 내어 주신 그 놀라운 희생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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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회 다운로드 | DATE : 2007-07-22 15: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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