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 2005년 초평 여름수양회 주제 3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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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초평 여름 수양회 제 3 강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He is not here ; he has risen)
우리는 어제 요한복음 19장 공부를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사함을 얻고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만 끝난다면 이는 아름답지만 또 다른 슬픈 이야기 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는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부활 메시지를 통해 첫째, 예수님께서 왜 부활하셔야 했으며 둘째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세계 선교 사명에 대해서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각자의 심령에 찾아오셔서 부활의 기쁨과 새 소망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두 여인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1-4)
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막16:9절에 의하면 그녀는 과거 일곱 귀신 들린 자였습니다. 귀신이 하나만 들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녀는 일곱 귀신이나 들린 불쌍하고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도 한때는 성모 마리아처럼 순결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권유와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이기지못하고 육신적인 삶을 살다 보니 어느덧 하나도 아니고 일곱 귀신이 들어왔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공통점은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거라사인 광인도 귀신이 들리자 자기를 잃어버리고 귀신이 조종하는 대로 미친듯이 날뛰었습니다. 마리아는 여인의 아름다움이나 순결도 잃어버린 창기처럼 된 자신이 미웠지만 귀신의 힘에는 어찌할 수 없는 슬픈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자 본래의 여인의 아름다움과 순결성이 회복되었습니다. 정신도 온전해지고 삶에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동행하며 뒤에서 예수님과 그의 무리들을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골고다 언덕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귀하고 죄없으시고 좋으신 예수님께서 그 험악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마리아는 눈물을 흘렸지만 죽음의 세력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볼 때 더욱 슬피 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변함없는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 좋으신 예수님, 문둥병을 고치시고, 눈먼 자를 밝게 하시고, 많은 양무리를 먹이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 무엇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 문제를 아시고 용서하시며 새 생명주신 예수님, 그러나 우리도 마리아처럼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부딪쳤을 때 마리아처럼 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양들을 수양회에 초청합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양들을 볼 때, 마치 예수님의 무덤 앞을 막고 있는 돌과 같은 한계 상황에 부딪치면 마리아처럼 절망하고 웁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반복되는 죄악의 소욕으로 실패감에 빠져 마리아처럼 슬피웁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주는 세력 앞에 절망하고 슬픔 가운데 마리아처럼 웁니다. “사랑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목자 생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아름답지만 슬픈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마리아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아니 이게 왠일입니까? 울고 있는 마리아 앞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 또 다른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굴려낸 무덤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형상은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그의 형상이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번개는 우리에게 아주 빠른 신속한 느낌을 주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번개는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밝음을 상징합니다. 주의 천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각 장애를 일으킬 만큼 강렬한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의 옷은 눈같이 희다고 하였습니다. 눈은 홀리니스(Holiness), 즉 성결,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주의 형상은 곧 밝고 성결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 안에는 조금이나마 어두움이 없습니다. 주의 사자의 모습은 곧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그의 본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는 조금이나마 어두움이나 더러움이 없습니다. 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예수님의 모습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요 장차 우리가 상급으로 받을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부활의 예수님의 형상을 늘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어둡고 찌들린 실패자의 형상을 지워버리고, 영광스럽고 찬란하고 승리하신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 형상을 마음에 가지고 살 때에, 우리의 삶은 희망차고 진취적이며 거룩한 순례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수직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수직하는 자들이 무서워 떨려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원래 죽은 사람은 수직자세로 묶여서 관에 묻혀 집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할 때 모든 마귀 권세들이 수직자세로 죽은 자와 같이 되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둘째,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5-8)
그 여인들에게 전한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첫째로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짧은 순간에 많은 무서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며 주의 천사가 내려오고 무덤이 열리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수직하는 자들은 죽은 자와 같이 되어 쓰러졌습니다. 무엇보다 텅빈 무덤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는 그녀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었기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우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후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여러번 반복하셨습니다(마16:21, 20:18,19, 눅9:22, 18:32).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예고없이 우연히 돌연적으로 발생한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과 주관아래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함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사(고전15:3,4)”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줍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왜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물 먹듯이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죄에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여인은 처음에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의 꾀임에 빠져 미팅, 고팅, 채팅, 특히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한 형제님과 그만 정욕의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이면 족하리라 생각했던 육체적 관계가 계속 이어졌고 나중에는 어찌할 수 없는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간음죄로 잡힌 그 날도 홍대 앞에서 만난 어느 유부남과 잠을 자다 몰카에 찍혀 현장에서 잡히고 말았습니다. 공회에 개처럼 끌려나온 그녀는 수치심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감에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세인트 루이스에서 섬기는 한 형제님은 카드 전쟁 놀이에 능합니다. 시간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카드 놀이를 하다 지난 학기 미적분학에서 에프(F)학점을 맞았습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의 세력에 빠져 학기말 시험 중 카드 놀이를 하다 비싼 수업료만 축내고 재 수강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죄에는 세력이 있습니다. 죽음에는 또한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망 권세라 합니다. 사망 권세가 주는 질병은 두려움, 슬픔, 절망감, 좌절감, 이기심, 정욕, 게으름 등 많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 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높은 종교 지도자의 위치였고 산헤드린 의원으로서 정치적으로 국회의원과 같은 권위가 있었고 예루살렘 교외에 많은 아파트를 가진 부동산 재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 많은 명예와 지식과 부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늘 마음에는 두려움, 허무함, 그리고 무언가 모르게 마음 중심을 꾹 누르는 중압감에 시달려 나이 40에 칠순 노인처럼 늙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권세 앞에서 절망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남몰래 눈물 흘리며 괴로워 했습니다. “죽으면 그뿐인데, 나의 이 모든 명예와 부와 권세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과연 죽으면 어떻게 되며 어디로 갈까?” 그 날도 너무 답답한 심령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밤에 예수님의 방 문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이 처럼 죽음의 권세 앞에는 모두가 꼼짝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음의 세력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세력 앞에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필요 없습니다. 모두가 죽었고 죽어가고 있고 또 죽습니다. 공자도 죽었고 석가도 죽었고 소크라테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영원하신 하나님 보좌 옆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이 죄의 세력과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길은 간단합니다. 다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자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다신 예수님의 부활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능력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5-57).”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나 좌절이 없습니다. (There is no despair or failure in Jesus)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저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인 역전 드라마와 같습니다. 저는 축구를 참 좋아합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에도 눈을 부릅뜨고 모든 한국 축구를 시청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경기는 바로 8강 진출을 위한 이태리와의 게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경기 후반까지 1:0으로 패색이 짙었습니다. 이때 설기현 선수의 천금같은 동점골로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의 기막힌 헤딩골로 전세를 뒤엎고 우리는 월드컵 사상 4강 진출이라는 기적을 창출해 내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역전 드라마는 온 한국민 뿐만 아니라 이억 만 리에 있던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감동 드라마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것보다 더 감동적이고 영원한 승리의 역전 드라마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가운데 다시 사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세기의 역전 드라마를 이루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역전 드라마를 이같이 노래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3,24).” (Bu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freeing him from the agony of death, because it was Impossible that for death to keep its hold on him.) 우리가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서 매일 역전 드라마를 체험해야하겠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변화되지 않은 자신의 죄문제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안돼, 절대로 안돼, 죽어도 안돼.” 어떤 자매님은 교만하고 전혀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양들로 인해 절망하고 웁니다. “나는 목자 체질이 아닌가봐 홍대 생은 너무 육신적이야.” 어떤 학사 목자님은 계속되는 실패감에 무기력하여 중심이나 잘 지키자 하며 도전정신을 잊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그 부활의 능력으로 멋진 인생 역전 드라마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슬프고 절망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기쁘고 희망찬 매일 매일을 살아야겠습니다. 나는 안된다는 부정적인 자세를 바꾸어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이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홍대 신촌골 가운데 120명의 양떼와 12제자 그리고 2007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영원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저희에게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셨습니다. 사단과의 게임은 실제로 이미 끝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매일 매일 승리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저희에게 어떻게 영생을 줍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즉 다시 사신 자의 시초가 된 것이지요. 고전15:20절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는 곧 후속 열매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부활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고전15:51).”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나에녹목자님은 예수님을 만나기전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쳐다보며 다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럽고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님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영생을 덧입자 심령 가운데 새 희망과 새 힘이 솟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으로 이제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다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쳐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저희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천국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우리도 그때에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며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말씀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아멘”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사탄은 죽음의 세력을 앞세워 이 세상에서 왕노릇 하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세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그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 하나 살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나갈 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저는 문바울 목자님이 홍대 축제 때 세워 놓은 장승 두 개를 야밤에 몰래 잘라내어 와우산 뒤산에서 불에 태워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통쾌했습니다. 어찌 그렇게 통쾌할 수 있습니까? 그 우상을 잘라 불태웠으니 이는 구약 사사기에 나오는 용사 기드온이 밤에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낸 사건과 동일합니다(삿6:25). 저는 문 바울목자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용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문바울목자님 같은 많은 믿음의 용사를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천사의 메시지는 이어집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부활의 메시지를 받은 그녀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빨리 가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10절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인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Go and tell my brothers) 18절에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반복은 중요성과 심각성을 의미합니다. 빨리라는 부사는 복음 전파의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여야겠습니다. 일대일 할 때에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야 겠습니다. 휘싱할 때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야겠습니다. 버스 안에서나 전철 안에서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야겠습니다.
여자들이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무덤을 떠났을 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름질 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들고 경배하니” 여인들이 천사의 말에 순종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룻 목자님은 9년간 박사 공부를 하였지만 진전이 없어 절망감만 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종들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영광스러운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 홍대에서 교수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 실생활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심령에 큰 기쁨이 넘쳤다고 했습니다. 무덤에 올 때에는 마치 장례식에 오는 자들같이 슬프고 두렵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큰 기쁨으로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 갔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I have seen the LORD(요20:18))
11-15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이 가보고 난 뒤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제사장들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사실을 덮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주고 사실을 덮으려고 한다고 해서 진리를 감출 수 있을까요? 뇌물을 주고 거짓말하고 입을 틀어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들의 허사와 궤계는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세계 선교 사명(16-20)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갈릴리 한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17). 의심하는 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눈 앞에 나타나셨는데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때 대권을 꿈꾸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들의 이 모든 세상 꿈과 욕망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보고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두 놀라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들은 비겁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그들이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지도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과 땅 아래 존재 하는 모든 세상 권세를 복종시키며 다스릴 수 있는 절대 권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절대적인 영적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볼지 말지 한번 기도해 보고 생각해 보라고 하시지 않고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선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절대 순종해야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가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그러면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여러 족속들이 있습니다. 미국에만 230개국의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족속들을 제자 삼으라 명령하십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신자수를 불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Disciple)는 훈련(discipline)이라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훈련받은 자, 예수님을 배우고 그의 삶을 좇아 희생하고 섬기는 훈련된 자를 키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제자를 키울 수 있습니까?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20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는 양떼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믿어 순종케 해야 합니다. 그냥 전파(preaching)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한 순간 눈을 감고 믿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teaching)은 꾸준한 인내와 계속성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일대일을 하는 이유가 바로 제자 양성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계 선교 명령을 주시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20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저희와 항상 함께 하시고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계 선교를 할 때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선교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역이요 모든 복음서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시는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장차 2041년까지 230개국에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알게 된 정욕 행위로 인해 늘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는 정욕죄에 대해 담대해지고 합리화하며 죄의식으로부터 자유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죄의 세력은 저를 더욱 정욕의노예가 되게 하였고 결국 자매님들의 몸과 마음 가운데 상처를 입히는 흉악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사망 권세가 주는 두려움으로 매일 술을 마시며 아무데서나 뒹굴어 자는 쓸모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저는 영육간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을 볼 때 절망하여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칠암산 여름 수양회로 초청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8:29절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씀을 통해 제가 주님 앞에 죄인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한 순간 저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음엔 죄로부터 자유함과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하는 말씀으로 캠퍼스 목자요 성경 선생의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1985년부터 89년까지 5년 동안 홍대 개척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세계 선교에 드리고자 결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결혼과 함께 새 사명지인 미국으로 저희 가정을 보내셨습니다. 지난 16년 동안 미국 선교사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저는 놀라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울 밑에선 봉선화와 같은 제가 거대한 나라 미국 대학생들을 복음으로 믿어 순종케 하였습니다. 마약 판매업자였던 한 형제가 성경 공부를 통해 변화되어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챨스라는 형제는 고등학교 중퇴자로 길거리에서 낙서나 하고 다니던 형제였는데 성경 공부를 통해 변화되어 지금은 고등학교 교사 목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죄의 세력을 이기고 사망 권세를 물리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가정이 가는 곳마다 승리케 하시고 열매를 맺게 도우셨습니다. 작년에는 새 사명지인 세인트 루이스 개척 역사를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개척이란 많은 도전과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와시 유(Wash U.)와 음슬(UMSL) 가운데 한 명의 믿음의 조상과 열 두 명의 제자, 120명의 양떼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쓸모없는 저를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하시고 홍대 개척과 미국 개척 역사 가운데 쓰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으며,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옛수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승리와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나 좌절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또 우리가 이 부활 신앙으로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활 신앙으로 2007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어주시고 한국 UBF가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He is not here ; he has risen)
우리는 어제 요한복음 19장 공부를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사함을 얻고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만 끝난다면 이는 아름답지만 또 다른 슬픈 이야기 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는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부활 메시지를 통해 첫째, 예수님께서 왜 부활하셔야 했으며 둘째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세계 선교 사명에 대해서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각자의 심령에 찾아오셔서 부활의 기쁨과 새 소망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두 여인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1-4)
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막16:9절에 의하면 그녀는 과거 일곱 귀신 들린 자였습니다. 귀신이 하나만 들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녀는 일곱 귀신이나 들린 불쌍하고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도 한때는 성모 마리아처럼 순결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권유와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이기지못하고 육신적인 삶을 살다 보니 어느덧 하나도 아니고 일곱 귀신이 들어왔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공통점은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거라사인 광인도 귀신이 들리자 자기를 잃어버리고 귀신이 조종하는 대로 미친듯이 날뛰었습니다. 마리아는 여인의 아름다움이나 순결도 잃어버린 창기처럼 된 자신이 미웠지만 귀신의 힘에는 어찌할 수 없는 슬픈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자 본래의 여인의 아름다움과 순결성이 회복되었습니다. 정신도 온전해지고 삶에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동행하며 뒤에서 예수님과 그의 무리들을 섬겼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골고다 언덕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귀하고 죄없으시고 좋으신 예수님께서 그 험악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마리아는 눈물을 흘렸지만 죽음의 세력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볼 때 더욱 슬피 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변함없는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 좋으신 예수님, 문둥병을 고치시고, 눈먼 자를 밝게 하시고, 많은 양무리를 먹이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 무엇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 문제를 아시고 용서하시며 새 생명주신 예수님, 그러나 우리도 마리아처럼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부딪쳤을 때 마리아처럼 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양들을 수양회에 초청합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는 양들을 볼 때, 마치 예수님의 무덤 앞을 막고 있는 돌과 같은 한계 상황에 부딪치면 마리아처럼 절망하고 웁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반복되는 죄악의 소욕으로 실패감에 빠져 마리아처럼 슬피웁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주는 세력 앞에 절망하고 슬픔 가운데 마리아처럼 웁니다. “사랑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목자 생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아름답지만 슬픈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마리아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아니 이게 왠일입니까? 울고 있는 마리아 앞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 또 다른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굴려낸 무덤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형상은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그의 형상이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번개는 우리에게 아주 빠른 신속한 느낌을 주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번개는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밝음을 상징합니다. 주의 천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각 장애를 일으킬 만큼 강렬한 빛을 발하였습니다. 그의 옷은 눈같이 희다고 하였습니다. 눈은 홀리니스(Holiness), 즉 성결,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주의 형상은 곧 밝고 성결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 안에는 조금이나마 어두움이 없습니다. 주의 사자의 모습은 곧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그의 본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는 조금이나마 어두움이나 더러움이 없습니다. 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예수님의 모습이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요 장차 우리가 상급으로 받을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부활의 예수님의 형상을 늘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어둡고 찌들린 실패자의 형상을 지워버리고, 영광스럽고 찬란하고 승리하신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 형상을 마음에 가지고 살 때에, 우리의 삶은 희망차고 진취적이며 거룩한 순례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수직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수직하는 자들이 무서워 떨려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원래 죽은 사람은 수직자세로 묶여서 관에 묻혀 집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할 때 모든 마귀 권세들이 수직자세로 죽은 자와 같이 되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둘째,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5-8)
그 여인들에게 전한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첫째로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짧은 순간에 많은 무서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며 주의 천사가 내려오고 무덤이 열리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수직하는 자들은 죽은 자와 같이 되어 쓰러졌습니다. 무엇보다 텅빈 무덤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는 그녀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었기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우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후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여러번 반복하셨습니다(마16:21, 20:18,19, 눅9:22, 18:32).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예고없이 우연히 돌연적으로 발생한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과 주관아래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함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사(고전15:3,4)”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줍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왜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물 먹듯이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죄에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여인은 처음에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의 꾀임에 빠져 미팅, 고팅, 채팅, 특히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한 형제님과 그만 정욕의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이면 족하리라 생각했던 육체적 관계가 계속 이어졌고 나중에는 어찌할 수 없는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간음죄로 잡힌 그 날도 홍대 앞에서 만난 어느 유부남과 잠을 자다 몰카에 찍혀 현장에서 잡히고 말았습니다. 공회에 개처럼 끌려나온 그녀는 수치심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감에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세인트 루이스에서 섬기는 한 형제님은 카드 전쟁 놀이에 능합니다. 시간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카드 놀이를 하다 지난 학기 미적분학에서 에프(F)학점을 맞았습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죄의 세력에 빠져 학기말 시험 중 카드 놀이를 하다 비싼 수업료만 축내고 재 수강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죄에는 세력이 있습니다. 죽음에는 또한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망 권세라 합니다. 사망 권세가 주는 질병은 두려움, 슬픔, 절망감, 좌절감, 이기심, 정욕, 게으름 등 많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 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높은 종교 지도자의 위치였고 산헤드린 의원으로서 정치적으로 국회의원과 같은 권위가 있었고 예루살렘 교외에 많은 아파트를 가진 부동산 재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 많은 명예와 지식과 부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늘 마음에는 두려움, 허무함, 그리고 무언가 모르게 마음 중심을 꾹 누르는 중압감에 시달려 나이 40에 칠순 노인처럼 늙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권세 앞에서 절망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남몰래 눈물 흘리며 괴로워 했습니다. “죽으면 그뿐인데, 나의 이 모든 명예와 부와 권세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는 과연 죽으면 어떻게 되며 어디로 갈까?” 그 날도 너무 답답한 심령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 밤에 예수님의 방 문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이 처럼 죽음의 권세 앞에는 모두가 꼼짝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음의 세력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세력 앞에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필요 없습니다. 모두가 죽었고 죽어가고 있고 또 죽습니다. 공자도 죽었고 석가도 죽었고 소크라테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영원하신 하나님 보좌 옆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이 죄의 세력과 사망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길은 간단합니다. 다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사는 자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다신 예수님의 부활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능력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55-57).”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나 좌절이 없습니다. (There is no despair or failure in Jesus)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저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인 역전 드라마와 같습니다. 저는 축구를 참 좋아합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에도 눈을 부릅뜨고 모든 한국 축구를 시청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경기는 바로 8강 진출을 위한 이태리와의 게임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경기 후반까지 1:0으로 패색이 짙었습니다. 이때 설기현 선수의 천금같은 동점골로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 연장전에서 안정환 선수의 기막힌 헤딩골로 전세를 뒤엎고 우리는 월드컵 사상 4강 진출이라는 기적을 창출해 내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역전 드라마는 온 한국민 뿐만 아니라 이억 만 리에 있던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감동 드라마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이것보다 더 감동적이고 영원한 승리의 역전 드라마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가운데 다시 사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세기의 역전 드라마를 이루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역전 드라마를 이같이 노래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3,24).” (Bu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freeing him from the agony of death, because it was Impossible that for death to keep its hold on him.) 우리가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삶 속에서 매일 역전 드라마를 체험해야하겠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변화되지 않은 자신의 죄문제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안돼, 절대로 안돼, 죽어도 안돼.” 어떤 자매님은 교만하고 전혀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양들로 인해 절망하고 웁니다. “나는 목자 체질이 아닌가봐 홍대 생은 너무 육신적이야.” 어떤 학사 목자님은 계속되는 실패감에 무기력하여 중심이나 잘 지키자 하며 도전정신을 잊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그 부활의 능력으로 멋진 인생 역전 드라마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슬프고 절망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기쁘고 희망찬 매일 매일을 살아야겠습니다. 나는 안된다는 부정적인 자세를 바꾸어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이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홍대 신촌골 가운데 120명의 양떼와 12제자 그리고 2007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영원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저희에게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셨습니다. 사단과의 게임은 실제로 이미 끝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매일 매일 승리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저희에게 어떻게 영생을 줍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즉 다시 사신 자의 시초가 된 것이지요. 고전15:20절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는 곧 후속 열매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부활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고전15:51).”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나에녹목자님은 예수님을 만나기전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쳐다보며 다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럽고 두려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목자님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영생을 덧입자 심령 가운데 새 희망과 새 힘이 솟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으로 이제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다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쳐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저희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천국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우리도 그때에는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며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말씀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아멘”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사탄은 죽음의 세력을 앞세워 이 세상에서 왕노릇 하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세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꺾으시고 그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 하나 살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나갈 때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저는 문바울 목자님이 홍대 축제 때 세워 놓은 장승 두 개를 야밤에 몰래 잘라내어 와우산 뒤산에서 불에 태워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통쾌했습니다. 어찌 그렇게 통쾌할 수 있습니까? 그 우상을 잘라 불태웠으니 이는 구약 사사기에 나오는 용사 기드온이 밤에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낸 사건과 동일합니다(삿6:25). 저는 문 바울목자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용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문바울목자님 같은 많은 믿음의 용사를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천사의 메시지는 이어집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부활의 메시지를 받은 그녀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잘 말해 줍니다. 빨리 가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10절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인들에게 가서 내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Go and tell my brothers) 18절에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가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반복은 중요성과 심각성을 의미합니다. 빨리라는 부사는 복음 전파의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여야겠습니다. 일대일 할 때에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야 겠습니다. 휘싱할 때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야겠습니다. 버스 안에서나 전철 안에서도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야겠습니다.
여자들이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무덤을 떠났을 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름질 할 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들고 경배하니” 여인들이 천사의 말에 순종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룻 목자님은 9년간 박사 공부를 하였지만 진전이 없어 절망감만 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종들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영광스러운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 홍대에서 교수 목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일에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 실생활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심령에 큰 기쁨이 넘쳤다고 했습니다. 무덤에 올 때에는 마치 장례식에 오는 자들같이 슬프고 두렵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큰 기쁨으로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 갔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I have seen the LORD(요20:18))
11-15절을 보십시오. 여자들이 가보고 난 뒤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제사장들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사실을 덮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주고 사실을 덮으려고 한다고 해서 진리를 감출 수 있을까요? 뇌물을 주고 거짓말하고 입을 틀어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들의 허사와 궤계는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세계 선교 사명(16-20)
열 한 제자는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갈릴리 한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17). 의심하는 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눈 앞에 나타나셨는데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때 대권을 꿈꾸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들의 이 모든 세상 꿈과 욕망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보고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두 놀라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들은 비겁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그들이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지도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적 권세를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과 땅 아래 존재 하는 모든 세상 권세를 복종시키며 다스릴 수 있는 절대 권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절대적인 영적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무엇을 하라고 하셨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볼지 말지 한번 기도해 보고 생각해 보라고 하시지 않고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선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절대 순종해야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가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그러면 가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여러 족속들이 있습니다. 미국에만 230개국의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족속들을 제자 삼으라 명령하십니다.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신자수를 불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Disciple)는 훈련(discipline)이라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훈련받은 자, 예수님을 배우고 그의 삶을 좇아 희생하고 섬기는 훈련된 자를 키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제자를 키울 수 있습니까? 먼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20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우리는 양떼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믿어 순종케 해야 합니다. 그냥 전파(preaching)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한 순간 눈을 감고 믿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teaching)은 꾸준한 인내와 계속성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일대일을 하는 이유가 바로 제자 양성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계 선교 명령을 주시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20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저희와 항상 함께 하시고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계 선교를 할 때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선교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역이요 모든 복음서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시는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장차 2041년까지 230개국에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를 이루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알게 된 정욕 행위로 인해 늘 수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는 정욕죄에 대해 담대해지고 합리화하며 죄의식으로부터 자유코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죄의 세력은 저를 더욱 정욕의노예가 되게 하였고 결국 자매님들의 몸과 마음 가운데 상처를 입히는 흉악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사망 권세가 주는 두려움으로 매일 술을 마시며 아무데서나 뒹굴어 자는 쓸모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저는 영육간에 허물어져가는 자신을 볼 때 절망하여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칠암산 여름 수양회로 초청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8:29절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씀을 통해 제가 주님 앞에 죄인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한 순간 저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음엔 죄로부터 자유함과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하는 말씀으로 캠퍼스 목자요 성경 선생의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1985년부터 89년까지 5년 동안 홍대 개척 역사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세계 선교에 드리고자 결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결혼과 함께 새 사명지인 미국으로 저희 가정을 보내셨습니다. 지난 16년 동안 미국 선교사 생활을 하는 가운데 저는 놀라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울 밑에선 봉선화와 같은 제가 거대한 나라 미국 대학생들을 복음으로 믿어 순종케 하였습니다. 마약 판매업자였던 한 형제가 성경 공부를 통해 변화되어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챨스라는 형제는 고등학교 중퇴자로 길거리에서 낙서나 하고 다니던 형제였는데 성경 공부를 통해 변화되어 지금은 고등학교 교사 목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죄의 세력을 이기고 사망 권세를 물리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가정이 가는 곳마다 승리케 하시고 열매를 맺게 도우셨습니다. 작년에는 새 사명지인 세인트 루이스 개척 역사를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개척이란 많은 도전과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와시 유(Wash U.)와 음슬(UMSL) 가운데 한 명의 믿음의 조상과 열 두 명의 제자, 120명의 양떼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쓸모없는 저를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하시고 홍대 개척과 미국 개척 역사 가운데 쓰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으며,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옛수님의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승리와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결코 실패나 좌절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또 우리가 이 부활 신앙으로 세계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활 신앙으로 2007년까지 배가의 역사를 이루어주시고 한국 UBF가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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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회 다운로드 | DATE : 2005-07-28 11: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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