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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회 2005년 예수마을 봄수양회 주제강의 제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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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901회 작성일 05-05-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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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예수마을 봄수양회 주제강의 제2강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말씀: 창세기16:1-17:27                                                            요절: 창세기 17: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오늘 말씀은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키우고자 하시는 비전과 소망이 가득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반적인 언약(言約)은 당사자인 쌍방이 지키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특별한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재롱을 즐기면서 아기자기한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던 아브람에게 먼저 찾아 오사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자 하시는 언약(12:2, 15:18)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아브람과 맺으신 언약은 아브람 한 사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원대한 소망이자 비전입니다. 이 시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시대 열국의 아비요 어미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비전을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자식 한 명도 낳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녀의 번성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겼습니다(출23:26). 그러므로 여자가 가문의 대를 이을 후손을 생산치 못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큰 수치였습니다. 아무런 언약도 받지 않은 아브람의 동생인 나홀과 하란도 자식만은 잘 낳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언약을 받은 아브람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온 지 10년이 경과했지만 아직 자식이 없었으므로 사래의 마음은 매우 초조했습니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에게는 “10년이 지나도 아들이 없으면 집을 떠난다”라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관례대로 하면 사래도 후사를 낳지 못하면 아브람을 떠나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사래의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사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이집트 출신 여종이 있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2). 사래의 심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아기를 갖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인의 책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종을 소실로 드려서라도 자녀를 얻고자 하는 사래의 마음은 간절했을 것입니다. 사래가 자기 여종 이집트 출신 하갈을 데려다가 아브람에게 아내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산지 1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3). 하갈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어 아브람과 함께 사느냐, 사랑하는 아브람의 곁을 떠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래는 후사를 낳지 못한다는 수치심, 죄책감과 책임감 때문에 잠못이루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하갈을 통해 자식을 얻는 최후의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아브람도 사래의 마음을 다 알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사래의 말대로 따랐습니다. 결국 아브람은 젊은 여종 하갈과 동침하였고 하갈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4). 사래는 안도의 숨을 쉬고 아브람은 후손을 얻는다는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갈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여 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갈은 자신의 본분을 잃고 거드름을 피면서 사래를 조롱했습니다. 사래 앞을 지날 때면 점점 불러오는 배를 더 내밀면서 거름걸이의 템포를 한 템포 늦추고 갈지 자 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갈은 마치 자신이 안방마님이나 되는 것같이 착각을 하고 사래의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결국 사래는 참다 참다 못 참고 억울함을 어떻게 표출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가 이렇게 호소하자 아브람은 어떤 조치를 내렸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하갈의 신분을 그의 소실에서 다시 사래의 여종으로 원위치 시켰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지금까지 참았던 울분을 한꺼번에 폭발시켜 마음껏 보복을 했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백년만의 더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갈도 견딜 수 없어서 사래로부터 도망을 했습니다(6).
문제의 발단은 사래의 조급함에 있었습니다.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하갈을 아브람의 소실로 추천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아브람의 소실로 추천한 것은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 하셨으니]하는 하나님께 대한 쓴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도 사래의 말을 듣고 기도하기 보다는 사래의 말에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람의 가정에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불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람의 가정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나님은 하갈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도록 도우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그녀에게 어떤 방향을 주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은 하갈이 그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 복종하라는 방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본주인 사래에게 돌아가게 하시고, 가정의 질서를 세우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녀를 통해서 태어날 이스마엘이 큰 민족이 될 것도 예언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갈은 이집트에서 사래의 여종으로 왔습니다. 여종으로 일생을 살 운명이었는데 아브람의 소실이 되어 자식을 갖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사래의 미움을 받고 아바람 집에서 쫓겨나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고 함께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방 여인으로 몸종에 불과했던 그녀는 광야 도피생활 중에 자신을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13:14).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찰하십니다. 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됩니다. 먼저 찾아오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브람의 나이 86세 때에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13년간 아브람에게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오사 하신 첫 말씀은 무엇입니까? 17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기 위해 믿음으로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로 24년간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를 책망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인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지만 바로의 손에서 아브람과 사래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13년 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하시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 엘샤다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이는 아브람의 내면 깊은 곳에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려 13년 동안 아브람은 과연 무엇을 하면서 지냈을까요? 이 기간 동안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에게 어떤 기록할만한 신앙적이고 복의 근원다운 행적이 전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90살이 다되어 그렇게도 갈망하던 아들 이스마엘을 얻은 아브람은 자식 키우는 재미에 푹 빠졌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뒤집기를 하고 옹알이를 하면서 ‘아빠 아빠’하는 말에 자식이 없어 당한 수모와 아픔이 한 순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손을 잡고 사우나를 갈 때면 콧노래가 절로 나고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스마엘을 바라보고 있는 아브람의 얼굴은 스마일 마크는 저리가라였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에 푹 빠져서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히 잊고 지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사로 삼고자 했습니다(18). 아브람은 자신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사 만민의 복의 근원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24년이라는 기다림의 세월에 지치고 99세라는 나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저 한 촌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한 10년만 젊었더라면...’하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아브람도 아마 이런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한 10년만 젊었더라면 새로운 일도 시도해보겠는데 99세나 된 내가 인생의 말년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나타 나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하시며 아브람의 불신앙을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즉 아브람의 나이가 99세일지라도 하나님은 그와 맺으신 약속의 말씀을 완전하게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아브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과 이를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과 자신의 나이를 보고 현실에 안주해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곁길로 행하며 표류하고 있는 아브람을 바로잡아 주시는 말씀이요,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거룩성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그의 나이가 비록 99세가 되었지만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소원과 두신 뜻을 끝까지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2-3절에서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내용과 목적이 무엇입니까? 4-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하나님은 이미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12:2, 15:18). 그러나 아브람이 언약을 잊고 불신과 자족함에 빠져 지내자 언약을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반드시 열국의 아비로 삼으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나라와 열왕들이 나오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아브람은 ‘I want to be a father of one son. ' 그러나 하나님은 ‘I have made you a father of many nations. I will make you exceedingly fruitful.' 하십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강한 의지요, 그에게 두신 간절한 소원이요,  원대한 비전이요,  절대적인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이름이란 그 존재자체요 정체성을 의미했습니다. 본래 ‘아브람’이란 고상한 아비란 뜻으로 아기자기하고 소시민적인 존재입니다. 반면 히브리어의 ‘루함’은 큰 무리를 의미하는데,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 큰 무리의 아버지란 의미를 갖습니다. 이름이란 우리의 삶을 인도해가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아브라함이다’라고 불러주실 때, 그는 아기자기하고 고상한 촌부에서 이제는 수많은 무리를 품고 섬기며 구원역사의 복의 근원이며 열국의 아비가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며 고상한 아비인 아브람으로 살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원대한 비전가운데 그를 열국의 아비인 아브라함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는 자식 한명에 자족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고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물론 99세나 된 촌로 아브람에게, 그것도 만년에 얻은 이스마엘을 키우는 재미에 폭 빠져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언약은 심히 부담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또 이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기위해서 그는 이스마엘에게 빼긴 마음을 부인하고 아기자기한 소시민의 잔재미를 포기해야하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영접하고 자기를 부인하고자 할 때는 작은 희생의 아픔과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영접하는 길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를 향하여 “너는 이 시대에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현재 자신의 인간적인 조건과 환경을 탓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존을 위한 일로 찌들어 있지 않습니까? 인터넷과 세상 잔재미에 폭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길 원하십니다. 좁아진 내면을 찢어 넓혀 세계 캠퍼스 영혼들을 품고 살리는 열국의 아비의 내면성을 소유하길 원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원을 품은 열국의 아비가 되라고 하십니다. 다같이 “이제 후로는 나는 열국의 아비니라.”라고 외쳐보겠습니다.
제 이름은 식자돌림으로 이름을 짓다보니 行(다닐 행) 植(심을 식)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름에 대해서 그럴만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름에 의미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발 길 닿는 곳으로 정처 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니며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인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로 저를 구원하사 새 생명을 주시고 캠퍼스 복음역사에 귀하게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도 약대 무릎을 가진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제임스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는 귀국하고서부터 한계적인 상황과 타협하면서 일시적으로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창원에서 서울까지 매주 순례자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와 주일만 센터에 올 수 있기 때문에 센터 역사에 동역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요회 동역자들과 센터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겨야 하는데 마음만 있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부담감만 가중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게이오 센터의 임기도선교사님을 매주 말씀으로 섬기고 니시우라, 고마쯔자끼형제님들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지원해야 하지만 바쁜 업무로 인하여 기도하고 전화하는 것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비전과 소망을 잃고 일에 치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제임스와 같이 기도의 사람이요 주님의 양들을 품고 섬기는 열국의 아비요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을 먼저 찾아 오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하시며 저의 안일과 비전이 없음을 꾸짖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행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제가 한계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중보기도하며 열국의 아비로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크신 비전이 저의 인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순례자 훈련을 기쁨으로 감당하면서 승리를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7,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대대 후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 영원한 기업’이라 하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견고한 언약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3: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약속한 것을 밥먹듯이 어기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언약의 말씀을 폐하지 않고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우리를 아브라함과 같이 열국의 아비로 삼으실 뿐 아니라 우리 후손 대대로 믿음의 자손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과 맺은 성서 한국과 세계 선교의 약속, 전 세계 233개국 7,000캠퍼스와 양떼들을 우리의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 그리고 2041년까지 우리 가운데 10만명의 훈련되고 비전이 넘치는 선교사를 양성하여 땅 끝까지 증인 삼으시겠다는 약속대로 우리와 함께 하사 이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약속으로 믿고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9-1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굳게 하시기 위해 할례를 받도록 하시는 내용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서로 언약식을 하고 커플링을 교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살에 약속을 새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 뿐만아니라 자손들과 집 안에 있는 이방사람들까지도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 하셨습니다(12). 또 이를 행치 않을 때 그 언약을 배반한 자로서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하셨습니다(14). 할례는 깨끗하게 한다는 뜻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선민이 된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할례는 육신의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된 자가된다는 표징입니다. 또 할례는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겠다는 순종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이를 신약적으로 해석하자면 우리 마음의 할례 곧 회개와 믿음의 결단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시대를 섬기는 열국의 아비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기만을 위해 살고자하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욕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소원과 비전을 영접하는 구체적인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마음의 할례의 표징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사래에게도 동일한 소원을 두셨습니다.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으로 아브람의 사랑하는 연인의 이미지가 많고, 공주병의 원조격입니다. 사래는 그 이름처럼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아브람에게 공주처럼 섬김 받고 사랑받으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사래가 공주병이 들어서 살면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를 병들이고 자신도 만족이 없고 진정한 행복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주심으로 열국의 어미가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래의 이름중 모음 하나만 바꾸어서 완전한 존재의 변화를 이루시는 언어의 마술사이십니다. 사라 곧 ‘열국의 어미’는 수많은 무리를 품고 감당하며 섬기는 어머니를 뜻합니다. 영국의 한 여론기관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말이 무엇인가를 조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어머니’ Mother였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고 교육하는 생명의 수여자요 진정한 인생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영적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해산하고 키울 영적인 어미들이 공주병에 들어 형제들이나 병들이고 아기죽 거릴 때 그 모임은 소망과 비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사라의 이름도 열국의 어미로 바꾸신 것은 그만큼 영적인 어미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어떻게 돕고 동역하느냐에 따라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로 성장할 수도 있고, 그저 소시민적인 졸장부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임이 세계적인 선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자 목자님들의 믿음과 함께 묵묵히 기도하고 열국의 어미로서 섬겨 오신 Mother Sarah Barry선교사님과 Grace Lee선교사님과 같은 분들이 많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임의 자매목자님들이 열국의 어미 사라의 내면을 품고 홍대, 육사와 산업대, 그리고 세계캠퍼스의 영혼들을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매님들만 “이제 후로는 나는 열국의 어미다”라고 외쳐봅시다.
17,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역사상 가장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갖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아브라함의 웃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리고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아브라함이 웃은 웃음의 의미는 아직 아무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웃음이라고 하는데, 정황으로 볼 때 그의 웃음은 아마 코웃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하심으로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아브라함을 떠나 올라가셨습니다(22).
23-27절 말씀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 있는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다고 했습니다. 1절 말씀에서 아브라함 나이 99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했는데, 이제 24절에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였다고 강조하여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나이와 조건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의 순종은 나이와 조건을 극복한 믿음의 순종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당일에 순종한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때로 소시민적 생활에 빠져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기도하고, 불신으로 코웃음을 짖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는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로 소시민적인 꿈에 사로 잡혀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불신으로 코웃음을 칠때도 있으나, 이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서 내게 두신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서의 크신 비전과 소원을 믿음으로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즉각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소시민적인 내면을 회개하고, 나를 열국의 아비요 어미로 부르신 하나님의 크신 비전과 소원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좁아진 심령을 찢어 넓혀서 우리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 방황하는 캠퍼스 영혼들을 품고 살리는 열국의 아비, 어미로서의 위대한 축복된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이 우리 각자의 인생을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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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양회 웨슬레조 3494 08-25
12 수양회 권한진 3312 08-24
11 수양회 섬김이 2866 08-17
10 수양회 정베드로 4112 07-25
9 수양회 이요한 4391 07-22
8 수양회 구마가 3850 07-22
7 수양회 구마가 4403 03-09
6 수양회 이엘리야 3762 07-28
5 수양회 섬김이 3559 05-16
열람중 수양회 섬김이 3902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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