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 17강(18:1-23)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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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17 강
말씀 | 사도행전 18:1-23
요절 | 사도행전 18:9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오늘 말씀은 고린도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앙시장이 있어서 물자가 풍부하고 부유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살던 인구는 76만 명이 넘었는데 1850년대까지 세계에서 100만 명이 넘는 도시는 4군데 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매춘부를 ‘고린도 아가씨’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를 세계 선교를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로 생각해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시간 고린도가 어떻게 개척이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목숨을 건 동역.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부인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브기르길라는 애칭으로 브리스가라고 불리는데 로마 귀족이었습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굴라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로마로 가서 일을 하다가 브리스길라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아굴라의 신앙과 인품에 감동을 받고 브리스길라는 자기의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유대인 아굴라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유대인들이 소동을 많이 일으키므로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대에는 천막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의 부모는 다소에서 천막 제조업자였기에 로마 군대에 천막을 팔고 그 공로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평일에는 천막 제조업을 하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살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이들을 예수님의 제자요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로마서 16:3,4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은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4a)”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이런 친구가 있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잘 만났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들 외에도 빌립보 감옥에 같이 갇혔던 실라, 충성스러운 디모데, 그를 천거한 바나바, 등 좋은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저도 귀한 동역자들을 많이 만나고 지혜롭고 사랑이 많은 아내를 만나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를 드립니다.
유럽에서는 배 타고 바다로 나갈 때 한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터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전쟁터는 생사가 갈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우자나 동업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세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일생을 함께 할 배우자나 동업자를 잘 만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잠언 19:14에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배우자, 동역자, 동업자를 만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을 만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에 붙잡힌 사도 바울.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왔는데 그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키고 있다고 전함으로 바울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습니다. 실라는 빌립보에서 바울을 위한 선교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옴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줄이고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는 일에 더 힘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였습니다(5).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 20:9).”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될 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전기 제목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소회일지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선생님의 말씀은 골수를 찔러 형제자매들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한다. 그의 감동력 있고 도전적인 메시지는 UBF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메시지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여 드리고자 결단하도록 작용했다(p. 102).”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생명은 자라나고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기까지 연구하고 묵상하고 메시지를 성령의 감동과 능력으로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강권되어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은 구세주요 왕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였습니다.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다고 말하면서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회당 옆이었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당장까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니 회당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회심했는데 그 뒤를 이은 소스데네도 바울을 따르게 됩니다(고전 1:1). 유대인들의 보복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회당장들이 진리를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하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그냥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의 비방과 박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셋째,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9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이 말씀에 사로잡혀 구원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바울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까요? 고린도후서 1:8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에 충만하여 말씀을 전할 때 불꽃이 튀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대적자들의 비방도 거세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바울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우울한 마음도 생기고 영적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침체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잘 견뎌왔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훼방과 박해를 받을 생각을 하니 마음에 피곤한 생각, 힘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힘들게 복음역사를 섬겨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2장 3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원수들과 싸우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서 정신을 잃고 성 밖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후에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뚝이처럼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났습니다. 이런 바울을 생각하면 전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바울의 마음을 잘 아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고 상황만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험난합니다. 이런 세상만을 바라보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음에 믿음과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려워합니다. 대신 그냥 신자다운 행동을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복음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권면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사명을 주신 후에 혼자 알아서 감당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명을 주신 후에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해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수1:9).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말씀하셨습니다(사42:10).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주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마28:18-20).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가장 큰 은혜요 장래에 대한 보장입니다. 외국인이 우리 말을 배울 때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잘 산다는 말을 부자라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일까요? 가난한 사람은 잘 살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은 관계가 좋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 다음으로 이웃과의 관계가 좋습니다. 관계가 좋고 풍성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가난하고 복음 역사가 잘 되지 않아도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그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디모데와 실라, 회당장 그리스보와 소스데네, 경건한 성도 유스도, 그 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고린도에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성중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받아들일 것이요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배척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만이 그 사람이 택함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전한 그 말씀을 듣고 나중에 거듭나 새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서 세속적인 고린도 도시에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세워졌습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아가야 지방의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고후1:1). 또한 바울은 여기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두 편의 서신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개척 후에 여기서 3개월을 머물며 로마서도 집필을 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계 각처에서 전쟁에 참여하려고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비군을 같은 부대에 근무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20년 이상 함께 훈련을 받고 전투를 하기 때문에 나의 동료가 전쟁에 참여해서 싸우고 있는데 혼자서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쟁이 일어난 조국으로 몰려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과 함께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이런 전우애가 발휘될 때 우리는 외롭지 않게 복음 역사를 계속 섬길 수 있습니다. 동역자들을 나의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은 참으로 복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 갈리오의 재판.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갈리오는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입니다. 세네카의 기록에 의하면 갈리오는 매우 선량하고 친절하며 어느 쪽에도 치우지지 않은 공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법은 다른 민족의 종교에 대해서 관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법을 어기고 로마 시민들을 개종시키고 있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갈리오는 일반적인 범죄나 사기나 횡령 같은 불량한 행동을 했다면 그 일을 재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어’는 성경 해석의 문제이며, ‘명칭’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이며, ‘너희 법’은 율법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가리킵니다. 이런 문제에 관한 일이라면 스스로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이러한 일에 재판장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총독은 이렇게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하고 유대인들을 재판장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의 판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세계에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판결이 아가야 지방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형 세네카는 로마 제국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갈리오 총독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는 93년까지 유대교라는 우산 아래에서 로마 당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종교생활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 결과 고린도 성도들은 유대교와 같이 시민들에게 요구되었던 황제 숭배의 의무에서 면제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갈리오의 판결은 장차 바울이 로마황제에 상소하는데 밑바탕에 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였습니다. 사업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따라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 바울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충성은 선교역사를 어떻게 동역해야 하는가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에베소에 왔는데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작별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그들에게 돌아오리라 말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볼 때 개척도 중요하지만 믿는 사람들을 굳게 세우는 것도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머물게 하고 그들을 믿음 안에 굳게 세웠습니다. 새로운 양들을 얻어서 양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동역자들과 양들을 성숙한 신자들이 되도록 돕는 것 역시도 중요한 사역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고린도 도시와 흡사합니다.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갈수록 캠퍼스의 영적 상황은 좋지 못해서 복음 역사를 섬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동역자들을 사랑하며 함께 할 때 복음 역사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섬기는 홍대 캠퍼스에는 택하신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초청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잘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말씀 | 사도행전 18:1-23
요절 | 사도행전 18:9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오늘 말씀은 고린도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앙시장이 있어서 물자가 풍부하고 부유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살던 인구는 76만 명이 넘었는데 1850년대까지 세계에서 100만 명이 넘는 도시는 4군데 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매춘부를 ‘고린도 아가씨’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를 세계 선교를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로 생각해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시간 고린도가 어떻게 개척이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목숨을 건 동역.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부인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브기르길라는 애칭으로 브리스가라고 불리는데 로마 귀족이었습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굴라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로마로 가서 일을 하다가 브리스길라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아굴라의 신앙과 인품에 감동을 받고 브리스길라는 자기의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유대인 아굴라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유대인들이 소동을 많이 일으키므로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대에는 천막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의 부모는 다소에서 천막 제조업자였기에 로마 군대에 천막을 팔고 그 공로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평일에는 천막 제조업을 하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강론하였습니다. 바울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살면서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이들을 예수님의 제자요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로마서 16:3,4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은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4a)”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이런 친구가 있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이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사람을 잘 만났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들 외에도 빌립보 감옥에 같이 갇혔던 실라, 충성스러운 디모데, 그를 천거한 바나바, 등 좋은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저도 귀한 동역자들을 많이 만나고 지혜롭고 사랑이 많은 아내를 만나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를 드립니다.
유럽에서는 배 타고 바다로 나갈 때 한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터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전쟁터는 생사가 갈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우자나 동업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세 번 기도한다고 합니다. 일생을 함께 할 배우자나 동업자를 잘 만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잠언 19:14에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배우자, 동역자, 동업자를 만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을 만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에 붙잡힌 사도 바울.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왔는데 그들이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키고 있다고 전함으로 바울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습니다. 실라는 빌립보에서 바울을 위한 선교헌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옴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줄이고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는 일에 더 힘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였습니다(5).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말씀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 20:9).”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될 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전기 제목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소회일지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선생님의 말씀은 골수를 찔러 형제자매들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한다. 그의 감동력 있고 도전적인 메시지는 UBF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메시지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하여 드리고자 결단하도록 작용했다(p. 102).”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생명은 자라나고 변화시키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기까지 연구하고 묵상하고 메시지를 성령의 감동과 능력으로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강권되어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은 구세주요 왕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믿을 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였습니다.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다고 말하면서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은 회당 옆이었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당장까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니 회당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회심했는데 그 뒤를 이은 소스데네도 바울을 따르게 됩니다(고전 1:1). 유대인들의 보복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회당장들이 진리를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하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그냥 놔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의 비방과 박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셋째,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9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바울이 말씀에 사로잡혀 구원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바울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까요? 고린도후서 1:8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에 충만하여 말씀을 전할 때 불꽃이 튀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대적자들의 비방도 거세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돌로 쳐서 바울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피로가 누적되고 우울한 마음도 생기고 영적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런 침체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잘 견뎌왔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훼방과 박해를 받을 생각을 하니 마음에 피곤한 생각, 힘든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힘들게 복음역사를 섬겨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2장 3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원수들과 싸우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서 정신을 잃고 성 밖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후에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뚝이처럼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났습니다. 이런 바울을 생각하면 전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바울의 마음을 잘 아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고 상황만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험난합니다. 이런 세상만을 바라보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음에 믿음과 용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려워합니다. 대신 그냥 신자다운 행동을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복음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권면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사명을 주신 후에 혼자 알아서 감당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명을 주신 후에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해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수1:9).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말씀하셨습니다(사42:10).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주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마28:18-20).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가장 큰 은혜요 장래에 대한 보장입니다. 외국인이 우리 말을 배울 때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잘 산다는 말을 부자라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일까요? 가난한 사람은 잘 살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은 관계가 좋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 다음으로 이웃과의 관계가 좋습니다. 관계가 좋고 풍성할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가난하고 복음 역사가 잘 되지 않아도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그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디모데와 실라, 회당장 그리스보와 소스데네, 경건한 성도 유스도, 그 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고린도에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또한 고린도 성중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받아들일 것이요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배척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을 때만이 그 사람이 택함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전한 그 말씀을 듣고 나중에 거듭나 새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서 세속적인 고린도 도시에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세워졌습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아가야 지방의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고후1:1). 또한 바울은 여기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두 편의 서신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개척 후에 여기서 3개월을 머물며 로마서도 집필을 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계 각처에서 전쟁에 참여하려고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비군을 같은 부대에 근무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20년 이상 함께 훈련을 받고 전투를 하기 때문에 나의 동료가 전쟁에 참여해서 싸우고 있는데 혼자서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쟁이 일어난 조국으로 몰려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과 함께 영적인 전쟁을 하면서 이런 전우애가 발휘될 때 우리는 외롭지 않게 복음 역사를 계속 섬길 수 있습니다. 동역자들을 나의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은 참으로 복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넷째, 갈리오의 재판.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갈리오는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입니다. 세네카의 기록에 의하면 갈리오는 매우 선량하고 친절하며 어느 쪽에도 치우지지 않은 공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법은 다른 민족의 종교에 대해서 관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법을 어기고 로마 시민들을 개종시키고 있다고 고소한 것입니다. 갈리오는 일반적인 범죄나 사기나 횡령 같은 불량한 행동을 했다면 그 일을 재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어’는 성경 해석의 문제이며, ‘명칭’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이며, ‘너희 법’은 율법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가리킵니다. 이런 문제에 관한 일이라면 스스로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이러한 일에 재판장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총독은 이렇게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하고 유대인들을 재판장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준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의 판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세계에 전파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판결이 아가야 지방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선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형 세네카는 로마 제국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갈리오 총독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기독교는 93년까지 유대교라는 우산 아래에서 로마 당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종교생활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 결과 고린도 성도들은 유대교와 같이 시민들에게 요구되었던 황제 숭배의 의무에서 면제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갈리오의 판결은 장차 바울이 로마황제에 상소하는데 밑바탕에 되었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였습니다. 사업가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따라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 바울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충성은 선교역사를 어떻게 동역해야 하는가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에베소에 왔는데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작별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그들에게 돌아오리라 말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볼 때 개척도 중요하지만 믿는 사람들을 굳게 세우는 것도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머물게 하고 그들을 믿음 안에 굳게 세웠습니다. 새로운 양들을 얻어서 양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동역자들과 양들을 성숙한 신자들이 되도록 돕는 것 역시도 중요한 사역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고린도 도시와 흡사합니다.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갈수록 캠퍼스의 영적 상황은 좋지 못해서 복음 역사를 섬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동역자들을 사랑하며 함께 할 때 복음 역사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섬기는 홍대 캠퍼스에는 택하신 백성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초청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잘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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