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16강(17:1-34) 이제는 다 회개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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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16 강
말씀 | 사도행전 17:1-34
요절 | 사도행전 17:30
이제는 다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오늘 말씀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 지역의 제 2 도시인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아테네 지역을 개척하는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의 이복누이를 기념하여 세운 도시인데 부산과 같이 마게도냐 제 2의 도시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도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전도(1-9). 바울 일생이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에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창세기 3:15 말씀을 비롯하여, 시편 22편, 이사야 53 장, 요나서 등을 인용해 가며, 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어야 했는가, 그가 왜 부활해야 했는가를 증명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살전 1:5). 그리고 내가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확신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바로 왕을 나타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러 세기에 걸쳐서 기다려왔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도록 증거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온 세계를 구속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복음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바울도 바로 이 소식을 전하고 있고 우리가 전하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이 소식은 세상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좋은 소식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우리는 보통 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자이고 잘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 없을까요? 세상 것들로 만족을 누려본 사람들도 인생의 공허함과 허무함, 무료하고 피곤함을 다 느낍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원없이 누려보았지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런 비유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차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뒷 좌석에 모시고 갑니다. 주님은 VIP 석에 편히 앉아 계세요. 모든 것은 내가 다 알아서 운전해 갈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옆 좌석에 모시고 갑니다. 예수님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도 하며 갑니다. 그러나 인생의 운전대를 자기가 잡고 갑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짐을 자기가 지고 갑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운전대를 맡기고 자기가 옆에 앉습니다. 주님과 대화를 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깁니다. 그는 주님을 믿고 평안과 기쁨, 그가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 나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나라와 세계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심을 믿고 그의 말씀을 순간 순간 들으며 순종할 때 우리는 그를 왕으로 모시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함을 받고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내가 경험한 예수님을 확신있게 증거하면 됩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여 기도 응답 받은 것을 증거하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을 증거하면 됩니다. 내가 성경을 다 공부하고 많이 알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나보다 성경을 더 모릅니다. 그러니 내가 체험한 왕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면 됩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생기자 유대인들은 무엇 때문에 성을 소동하게 합니까?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저자의 불량배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야손의 집을 침입하여 바울과 그 일행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하자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렀습니다. 천하는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신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왕 되신 예수님을 믿고 정직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죄와 타협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당시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나의 학과에 소동이 일어나고 나의 가정에 소동이 일어나고 나의 직장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된 삶,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끌리며 그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핍박도 있습니다. 내가 힘든 식구, 자녀, 부모, 친구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저 잘 품고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복음은 서서히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둘째, 베뢰아 전도(10-15).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입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더라도 3일 정도는 걸렸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중요한 도시는 아니지만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 와서도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너그럽다’는 것은 ‘편향적이지 않다’, ‘마음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에는 ‘마음이 트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이나 전통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말씀을 다 안다는 생각 때문에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목만 듣고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팔랑 귀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것은 다 믿습니다. 이단이 하는 말도 다 받아들여서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진지하게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검토했습니다. 바울의 말이 성경과 부합하는지 상고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정말 그런가 성경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이단에 넘어가지 않고 더욱 확실한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쓸 때 말씀이 자기 것으로 소화가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이렇게 말씀을 잘 듣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시기심을 여기까지 뻗쳤습니다. 그들은 베뢰아까지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게 했습니다.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렀습니다.
셋째, 아덴 전도(16-34).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지혜를 따를 때 마음이 어리석게 되어 여러 가지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종교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하고,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바울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변론에 능하였습니다. 그러나 변론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쟁론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과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쾌락이란 그저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염려가 없는 상태입니다. 즉 모든 고통, 욕정,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아타락시아라고 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죽음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먹고 마시자”라고 주장합니다. 즉 ‘오늘을 즐기라’는 것이 그들의 삶의 철학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자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삶만이 성공적인 삶,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되는데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감정과 열정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그릇된 반응을 하게 되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성으로서 자기를 통제하는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학을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거짓 철학자들이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이끌고 갑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성이나 논리를 최종적 권위로 사용하고자 고집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지성만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은 오늘을 즐기는 것이 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거부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죽음을 저급한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자유에 도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몸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와 부활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을 붙들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였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인데, 언덕 위에 있는 평평한 바위 광장으로서 공개 강연이나 재판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리스에서 대법원을 아레오바고라고 부릅니다. 이제 바울은 공적인 자리에서 많은 아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서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그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희미한 기억과 영생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래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랑은 이런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한계적이고, 조건적입니다. 또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한 고향은 가보았자 아는 사람도 없고, 장소도 다 변해 있어서 실망만 안겨줍니다. 레베카 훠비스 선교사님은 30년 만에 홍대에 찾아와서 그리워하던 옛날 모습을 찾았지만 다 변해서 실망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본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갔을 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내가 정말로 그리워했고 사모했던 곳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30,31절을 보십시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바울은 이제 아덴 시민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본격적으로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 하는 그들을 정죄해야 마땅하지만 참고 인내하시면서 비를 내리시고 결실케 하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전도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하도록 하시고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주 예수님을 알게 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와 구원의 때요 회개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우상숭배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둔 모든 것들이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고,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됩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경배하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아덴에서의 사역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상이 가득하고 잡다한 철학으로 무장한 아덴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중에 디오누시오는 30명으로 구성된 아레오바고 의원 중 한 사람으로서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또 소수이지만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영접하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고집이 세고 믿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면 바울과 같이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얼굴을 보고 복음을 전할지 말지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실 때 이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7:1-34
요절 | 사도행전 17:30
이제는 다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오늘 말씀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 지역의 제 2 도시인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아테네 지역을 개척하는 내용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의 이복누이를 기념하여 세운 도시인데 부산과 같이 마게도냐 제 2의 도시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도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전도(1-9). 바울 일생이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에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창세기 3:15 말씀을 비롯하여, 시편 22편, 이사야 53 장, 요나서 등을 인용해 가며, 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어야 했는가, 그가 왜 부활해야 했는가를 증명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살전 1:5). 그리고 내가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확신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바로 왕을 나타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러 세기에 걸쳐서 기다려왔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도록 증거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온 세계를 구속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복음은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좋은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바울도 바로 이 소식을 전하고 있고 우리가 전하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이 소식은 세상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좋은 소식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우리는 보통 이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자이고 잘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필요 없을까요? 세상 것들로 만족을 누려본 사람들도 인생의 공허함과 허무함, 무료하고 피곤함을 다 느낍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원없이 누려보았지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런 비유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차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뒷 좌석에 모시고 갑니다. 주님은 VIP 석에 편히 앉아 계세요. 모든 것은 내가 다 알아서 운전해 갈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옆 좌석에 모시고 갑니다. 예수님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도 하며 갑니다. 그러나 인생의 운전대를 자기가 잡고 갑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짐을 자기가 지고 갑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운전대를 맡기고 자기가 옆에 앉습니다. 주님과 대화를 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깁니다. 그는 주님을 믿고 평안과 기쁨, 그가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 나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나라와 세계를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심을 믿고 그의 말씀을 순간 순간 들으며 순종할 때 우리는 그를 왕으로 모시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권함을 받고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내가 경험한 예수님을 확신있게 증거하면 됩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여 기도 응답 받은 것을 증거하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을 증거하면 됩니다. 내가 성경을 다 공부하고 많이 알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나보다 성경을 더 모릅니다. 그러니 내가 체험한 왕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면 됩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생기자 유대인들은 무엇 때문에 성을 소동하게 합니까?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저자의 불량배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야손의 집을 침입하여 바울과 그 일행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하자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렀습니다. 천하는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신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왕 되신 예수님을 믿고 정직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죄와 타협하지 않고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당시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나의 학과에 소동이 일어나고 나의 가정에 소동이 일어나고 나의 직장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된 삶,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끌리며 그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핍박도 있습니다. 내가 힘든 식구, 자녀, 부모, 친구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저 잘 품고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복음은 서서히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둘째, 베뢰아 전도(10-15).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입니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더라도 3일 정도는 걸렸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중요한 도시는 아니지만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 와서도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어떠하였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너그럽다’는 것은 ‘편향적이지 않다’, ‘마음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에는 ‘마음이 트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이나 전통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말씀을 다 안다는 생각 때문에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목만 듣고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팔랑 귀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것은 다 믿습니다. 이단이 하는 말도 다 받아들여서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진지하게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검토했습니다. 바울의 말이 성경과 부합하는지 상고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정말 그런가 성경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이단에 넘어가지 않고 더욱 확실한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쓸 때 말씀이 자기 것으로 소화가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이렇게 말씀을 잘 듣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시기심을 여기까지 뻗쳤습니다. 그들은 베뢰아까지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게 했습니다.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렀습니다.
셋째, 아덴 전도(16-34).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지혜를 따를 때 마음이 어리석게 되어 여러 가지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종교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하고,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바울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변론에 능하였습니다. 그러나 변론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쟁론하였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과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쾌락이란 그저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염려가 없는 상태입니다. 즉 모든 고통, 욕정,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아타락시아라고 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죽음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먹고 마시자”라고 주장합니다. 즉 ‘오늘을 즐기라’는 것이 그들의 삶의 철학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자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삶만이 성공적인 삶,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되는데 이러한 삶을 위해서는 감정과 열정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감정에 사로잡히면 그릇된 반응을 하게 되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성으로서 자기를 통제하는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학을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거짓 철학자들이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이끌고 갑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성이나 논리를 최종적 권위로 사용하고자 고집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지성만으로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은 오늘을 즐기는 것이 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거부했습니다. 스토아 학파 사람들은 죽음을 저급한 몸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자유에 도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몸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와 부활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을 붙들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였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인데, 언덕 위에 있는 평평한 바위 광장으로서 공개 강연이나 재판을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리스에서 대법원을 아레오바고라고 부릅니다. 이제 바울은 공적인 자리에서 많은 아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서 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그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희미한 기억과 영생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래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랑은 이런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한계적이고, 조건적입니다. 또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속한 고향은 가보았자 아는 사람도 없고, 장소도 다 변해 있어서 실망만 안겨줍니다. 레베카 훠비스 선교사님은 30년 만에 홍대에 찾아와서 그리워하던 옛날 모습을 찾았지만 다 변해서 실망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본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갔을 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내가 정말로 그리워했고 사모했던 곳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30,31절을 보십시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바울은 이제 아덴 시민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본격적으로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 하는 그들을 정죄해야 마땅하지만 참고 인내하시면서 비를 내리시고 결실케 하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전도자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하도록 하시고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주 예수님을 알게 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와 구원의 때요 회개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우상숭배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둔 모든 것들이 우상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고,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됩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고 경배하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아덴에서의 사역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상이 가득하고 잡다한 철학으로 무장한 아덴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중에 디오누시오는 30명으로 구성된 아레오바고 의원 중 한 사람으로서 영향력이 큰 사람입니다. 또 소수이지만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영접하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고집이 세고 믿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면 바울과 같이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얼굴을 보고 복음을 전할지 말지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실 때 이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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