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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23년행13강(14:1-28)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윤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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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6회 작성일 23-09-1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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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13 강
말씀 / 사도행전 14:1-28
요절 / 사도행전 14:22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첫째, 구원받을 만한 믿음.
8절~10절입니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였습니다. 그에게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 까요.
 
구원받는 다는 것은 내 힘으로 어떻게 못하는 어떤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깊은 물 속에 빠진 사람이 그 물에서 벗어나는 것, 불이 났는데, 불구덩이 속에서 벗어나는 것, 수백년 노예로 살던 백성이 노예된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발을 쓰지 못하는 이 사람에게 구원은 무엇일까요? 발을 쓰지 못해서 받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발을 쓰지 못하는 이 사람,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이 사람의 삶은 어땠을까요?
먼저는 신체적인 제약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일어서고 걷는 것,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당연하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발을 쓰는 것에 아주 익숙합니다. 발로 걷고 뛰고 운동하고, 탁구도 칩니다. 황창연 신부님은 나이 들어서 늙으면 자기 발로 화장실을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복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발을 쓰지 못하면, 대소변을 볼 때도 누가 도와주어야 하고 운동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테니스 운동도 손으로 하는 거 같지만 사실 발로 뛰는 것이라고 합니다. 탁구도 그렇습니까? 물론 요즘엔 휠체어가 있어서 지체장애인들도 휠체어를 타고 테니스도 하고 탁구도 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휠체어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불편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했으니까, 불편하긴 해도 그 삶이 익숙해져 있을 것입니다. 손으로 땅을 짚고 이동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집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바깥에 나와서 바울이 전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구원이 절실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신체적인 제약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두 번째,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대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무시와 모욕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맛있는 외식을 하고 싶어도 식당에 가면 “왜 오셨어요? 무슨 일이시죠?” 하며 그의 입장을 꺼려하거나 거부했습니다. 사람이 북적대는 러시아워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왜 하필 이 시간에 타는 거야”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그를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정상으로 단정지었고 박대하였습니다.
 
세 번째, 원치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했습니다. 발은 이동수단입니다. 발이 묶이면 어디 가지를 못합니다. 손으로 팔로 움직일 수는 있겠지만 아주 피곤합니다. 어디에 가려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늘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뭘 해보려고 하면 돕는 사람들도 힘들어했습니다. “뭘 또 하려는 거지?”, “넌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가까운 이에게 민폐를 끼치는 만큼 그는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네 번째, 경제적으로 제한이 있었습니다.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웠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무능한 존재로 취급받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힘든 건 스스로 내 존재에 대한 절망감과 회의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스스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립적인 삶을 꿈꾸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해보고 싶은 것도 정말 많았습니다. 직장도 다니고, 연애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꿈 같지 않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어디에 서있을지, 어디로 가야 할지 내 인생의 선택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의 시선이 이미 내면에 들어와 나는 쓸모없는 존재, 가치없는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단지 발을 쓰지 못할 뿐인데, 인생의 깊은 회의가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내 삶, 내 존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누구도 답을 주지 못했고, 스스로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말했습니까?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바울이 말한 것은 주께서 증언하신 ‘자기 은혜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어는 ‘주’입니다. 바울의 개인적 은혜가 아니라 주의 은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주의 은혜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주의 은혜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조건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생명, 지혜, 사랑, 온유함, 용서, 치유, 이 모든 것을 값없이 조건없이 주십니다. 은혜는 대가나 보상과는 다릅니다. 사람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전한 주의 은혜의 말씀은 율법에 맞선 말씀입니다. 행위의 율법은 사람의 행위를 요구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를 해야 복을 받는다, 착하고 의롭게 살아야, 경건하게 살아야 복을 주신다, 사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다소 조건적인 말입니다. 그런 말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이 사람을 더 혼란에 빠뜨릴 뿐입니다. 회개를 해야 한다면 누구의 죄 때문인가, 착하게 살아야 하면 얼마나 착하게 살아야 이 삶에서 벗어나는가. 그러나 주의 은혜의 말씀은 조건이 없습니다.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너의 과거와 상관없이 네가 희망하면 하나님은 너에게 풍성한 생명과 삶을 주실거야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바울을 통해 어떤 은혜의 말씀을 전했는 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주의 은혜의 말씀들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백세된 아브라함, 죽은 자와 같은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아들 이삭을 주셨는 지 은혜로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욕심쟁이 야곱을 축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도 은혜입니다. 400년간 노예로 산 그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그 백성이 어떻게 홍해를 건널 수 있었습니까? 말과 병거를 탄 애굽군대를 어떻게 그 바다에 빠뜨리셨습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백성을 40년 광야 생활 동안 어떻게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셨는 지, 자기 땅 하나 없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떻게 그 큰 가나안 땅을 주셨는 지 은혜로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주의 은혜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 주의 은혜의 말씀을 들을 때 발을 쓰지 못하는 이 한 사람,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이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 하나님이 정말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면 ‘발에 묶인 삶에서 벗어나서 발이 성한 사람의 세계,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삶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발을 못써서 발생하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가는, 그 삶에 대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스스로 걷고 뛰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 내 인생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충분히 나도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Stand up on your feet!” 자기 발 위에 선다는 것. 이전까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삶이 열렸습니다. 더 이상 그가 일어서기 위해, 걷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발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발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먼저는 신체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발로 걷고 뛰고 운동하고, 탁구도 칩니다. 가고 싶은 식당에 가서 밥도 먹고, 자기 발로 화장실을 갑니다.
 
두 번째, 사람을 의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원하는 곳에 갈 수가 있습니다.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가족과 친구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무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 서 있을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립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꿈꾸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밝아졌고 그의 인생이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도 성경 말씀을 통해 주의 은혜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양들에게,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의 은혜의 말씀이 역사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 생명력이 풍성한 삶의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하시고 그 믿음을 체험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 하면서 제사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두 사도는 이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절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서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이런 헛된 일은 무엇입니까? 제우스, 헤르메스는 사람이 만든 신입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그런 신이라 하는 것도 헛된 일이고, 그런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도 헛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드리는 것이 잘못되었으니까 반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들이 신을 모시고 제사를 드리고 무언가를 갖다바치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두려움으로 제사를 드리고 섬기는 것이 헛된 일입니다.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런 일을 헛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속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7절.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하나님,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이 꼭 무언가를 잘 하지 않아도 사람의 행위에 상관없이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먹을 양식을 주시고 삶 속에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비와 열매, 양식과 물, 어디서 왔는 가 생각해보아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바울은 증거합니다. 이들이 할 일은 그 하나님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벌 주실 것이라 생각하여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고 결실을 주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벌 주실 거라 생각하여 두려워하는 사람은 죄를 많이 생각합니다. 죄를 생각하고 죄로 인해 받을 형벌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어둡습니다. 그런데, 비와 결실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생각합니다. 비 온뒤에 싹이 트고 줄기가 나서 잎이 무성해지고 과일이 풍성히 열리기까지 또 그 과일이 식탁에 오르고 우리가 그것을 먹고 기쁨을 얻기까지 그 모든 과정 중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인생의 과정 중에, 내 가족, 자녀들의 삶 속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밝아집니다.
 
바울은 과거 율법의 세계 속에 있었습니다. 의인은 복받고 죄인은 벌받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통해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높은 율법의 기준을 요구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화가 났습니다. 기준에 벗어나는 사람을 판단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은 살기가 가득했고, 어두웠습니다. 그런 그가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율법이 아닌 은혜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 세계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풍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두려움일까요? 아이를 키울 때 무섭게 혼내키고 계속해서 화를 내면 처음에는 아이들이 말을 잘 들을 지 몰라도 부모의 눈치를 보게 되고 가족간에 마음의 대화를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런 두려움입니까? 저도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 가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내 말을 듣는 게 하는 게 중요한가 아니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가, 저는 후자를 선택했고, 지금도 그부분은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 내가 그린 그림대로 살아가지는 않더라도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조건 없이 비와 결실과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헛된 율법적인 신앙에서 돌이켜 은혜의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셋째, 환난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해서 무리가 돌로 바울을 쳤습니다. 바울이 죽은 줄 알고 그를 시외로 끌어서 내쳤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은 일어나 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며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면합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훼방하면서 언제든지 또 돌로 침을 당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 머무를수록 더 괴로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괴로움을 당할 줄 알면서도,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과 박해를 겪어야 할 것이라.” 영어 성경을 보면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이라고 표현합니다. 많은 박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방해하는 것, 못믿게 하는 것입니다. 어디 가나 훼방을 놓고 악감을 갖게 하고 돌로 치는 것은 결국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로 못믿게 하는 것,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도록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환난과 박해를 겪으면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환난과 박해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박해하면 할수록, 환난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께서 더 열심히 일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그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을까요?
바울은 돌에 맞는 경험을 통해 스데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이를 주동했던 사람이 바로 과거의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무리들이 바로 수많은 바울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과거 자기 모습을 돌아보며. 지금 나를 돌로 칠 수 밖에 없는 그들을 깊이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런 중에도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순교자 스데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바라보았던 그 주님, 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영광의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환난의 때마다 주께서 주의 은혜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시고 주의 제자들이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의 삶에 일생의 동반자가 되고 동역자가 되어 그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환난과 박해가 있습니다. 나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해를 받고 가까운 사람들로 하여금 악감을 품게 하기도 합니다. 상처주는 말을 듣고 마음에 돌을 맞기도 합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내게 가깝고 친밀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 그 상처는 매우 깊습니다.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 놓여질 때 마음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속에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를 양육할 때 어려움이 있지만 이를 통해 자기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됨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환난을 통해 어린아이와 같은 나를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일하심이 있습니다. 목자님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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