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12강(13:1-52) 이방의 빛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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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12 강
말씀 | 사도행전 13:1-52
요절 | 사도행전 13:47
이방의 빛 바울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마포구에는 버려진 철길이 아름다운 숲길 공원으로 바뀐 연남동 숲길이 있습니다. 또 쓰레기 매립장에 흙을 쏟아 붓고 나무를 심고 물길을 만들어 월드컵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으로 바꾸었습니다. 버려진 땅을 사람들이 쉼을 얻고 생명을 회복하는 공원으로 바꾼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흙과 나무와 섬김 등 생명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버려진 땅과 같은 이방 나라에 하나님은 생명을 불어 넣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고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십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빼어난 성경 선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에 기둥과 같던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이들을 통해서 세계 선교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의 빛으로 쓰십니다. 이 시간 이방의 빛이란 의미가 무엇인가 배우고 우리도 이 시대를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검은 피부를 가진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피부색과 나라에서 모였고 왕족과 평민 등 출신성분이 달랐지만 한 교회에서 합심해서 동역하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는 문화적으로 풍성하였고 성경 공부에 열심이 있음으로 말씀이 풍성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헬라 문화에 익숙하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서 이방 선교를 하기에 적합했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성령께서는 선교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의 두 기둥과 같은 바나바와 사울을 세계 선교를 위한 개척자로 파송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선포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공동체가 세워질 때 전도와 선교는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우리 모임도 신촌 지역 캠퍼스 개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김아브라함, 사라 선교사님을 비롯하여 최봉림(폴), 양인실(페트라리), 이반석, 반드기드온, 최다니엘 등 개척자들과 믿음의 조상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교회의 기둥과 같은 분들이 계속 선교사로 파송됨으로 우리가 성장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본국과 선교지가 합심 동역해서 하나님 나라가 11개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올해도 윤혜림선교사를 미국 애틀란타에 파송하고 올 가을에는 박기성 형제님이 일본에 나아가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단기 선교사로 오스트리아 빈에 나아갔던 나경건자매님은 다시 그곳에 나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지난 주일에 발표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렀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이곳은 길이가 224km, 폭이 96km에 달하는 큰 섬인데 제주도보다 8.3배나 큰 섬입니다. 그들은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들어가서 전하였습니다. 그때 마가 요한이 수행원으로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렀습니다. 바보는 그 섬의 중심도시로서 총독 관저가 있었습니다. 특히 바보는 고린도와 같이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의 웅장한 신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원로원의 선거권을 가진 유력한 총독이요 로마의 문학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이 오자 그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총독은 서기오 바울이고 사울의 이름도 바울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뀝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당시 헬라 지역에서 이민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두 개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생후 8일이 되면 할례를 행하고 유대식 이름을 지어주었고, 9일째에는 로마식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유대 지역에 있을 때는 유대식 이름인 사울이라고 불렸지만, 헬라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로마식 이름인 바울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자 마술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하며 선지자 노릇을 하던 바예수가 이를 방해하였습니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 구세주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엘루마’인데 이름의 뜻은 마술사입니다. 그는 궁중 마술사로서 어찌하든지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을 썼습니다.
그러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저주하였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였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투사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를 훼방하는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충동질하여 말씀을 영접하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진화론이나 무신론 등 거짓 진리들이 그를 붙잡고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핍박도 있고 위협도 하고 사랑 공세를 퍼붓기도 합니다. 사탄은 양들에게 말씀을 듣는 것을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서 미루도록 하거나 의심을 심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의 잔재미들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돈 버는 일에 힘을 쏟도록 이끕니다. 탐욕을 자극하여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탐욕은 끝이 없는 욕심이기에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수들에 대한 영적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한 치도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편에 굳게 서서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한 영혼을 구출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다윗이 사자에게 물려간 양을 구출하기 위해서 사자의 입을 찢고 그 속에 있는 양을 구출하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도와 선교는 능력 대결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세상의 신인 마귀를 제압하고 쫓아냅니다. 우리는 한 말씀이 역사하여 양이 변화되도록 정성스럽게 말씀을 준비하여 심고,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기도에, 섬김에, 말씀에 스며 있어야 합니다. 총독은 바울이 선포한대로 엘루마가 눈이 멀자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말씀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1차전도 여행의 첫 열매였습니다. 그는 구브로 섬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은 복음 역사의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이런 장애물은 가는 곳마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기와 반대, 기존 세력들과의 충돌, 미신, 그 지역의 풍습 등. 이런 장애물을 만날 때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영적 싸움을 하고 하나씩 하나씩 극복해나갑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진리를 왜곡하고 의로움이 굽어져 있는 곳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곳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력들과 장애물들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복음 역사를 섬깁니다. 복음 역사를 훼방하는 세력을 만나면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위축되기 쉽습니다. 마음이 위축되면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복음 역사를 훼방한다고 해서 놀라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바울처럼 담대한 마음으로 대적하는 사람을 제압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유일하신 참 신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장애물들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약 280km의 여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수행했던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함께 전도 여행을 하던 마가 요한이 힘들다고 돌아갔을 때 바울과 바나나는 얼마나 힘이 빠졌겠습니까? 마가 요한이 전도 여행 중에 왜 되돌아갔을까요? 여러 가지를 추측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집에 대한 향수병 때문이다.”, “병에 걸려서 더 이상 전도여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촌인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주도권을 바울에게 빼앗기자 화가 나서 돌아갔다.”, “해발 1080미터나 되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이 험준하고 강도가 창궐해서 따라가지 않고 돌아왔다.” 등등.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가 요한이 부자집 과부의 외아들로 자라서 힘든 전도 여행을 견뎌낼 만큼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마가요한이 돌아가자 크게 실망하고 더 이상 그를 동역자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2차전도 여행 때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사울이 크게 다투고 갈라서게 됩니다(행15:36-41).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에 돌아간 후에 “내 자신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생각하며 자책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실패자요 낙오자라는 생각에 방황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실패했다고 영원히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그는 성숙해져서 베드로의 유익한 동역자가 되었고, 바울에게도 꼭 필요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인생 말년에 쓴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실패하지 않고 처음부터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이 되면 좋겠지만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낙오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청년의 때는 마가 요한처럼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라서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깨지면서 더딜지라도 성장해서 나중에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소망을 심고 이들이 장차 미래 선교의 주역들이 되도록 지원하고 키워야 합니다.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였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는 이스라엘 역사를 개관하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그를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님은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던 그 모든 일에서 풀려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과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의롭게 됨을 증거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했습니다. 모든 종교는 도덕과 선행을 통해서 하늘에 오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결코 율법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의롭게 되고자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가를 발견할 뿐입니다. 죄의 세력은 너무나 강해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하고 불법과 불의, 불평등이 판치는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억압, 학대, 폭력, 왜곡된 성, 우상 숭배, 교만, 탐욕스러운 소비가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할 때 죄로 인한 심판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사회가 정의롭게 변화되고, 경제가 풍성해지며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42-4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사도 바울을 통한 비시디아 안디옥 선교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세상은 우상을 숭배하고 진리를 몰라 방황하고 죄로 인해서 어둡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진리를 밝혀줍니다. 이방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이방의 빛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회복해줍니다. 이방의 빛은 하나님과 인간, 자연까지도 구속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합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이방 세계에 복음 빛을 비추어주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는 빛과 같은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선교사가 된 것이 강력한 증거입니다. 목자의 역할도 이와 같습니다. 갈 길 몰라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갈 길을 알려주는 것이 목자의 역할입니다. 일생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일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방의 빛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통해서 빛을 이 세상에 비추십니까?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과 윤리적인 삶, 감탄을 자아내는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만드십니다. 왜 저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살까? 어찌 저렇게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며 기쁨 가운데 살아갈까?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이요한선교사님 가정을 갑자기 방문한 저희를 마룻바닥에다 재워줘도 감사한데 안방 침대를 내주며 환대하였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폴최 선교사님은 바쁜 가운데 우리를 섬겨주셨고 메리최 선교사님은 불편한 손을 가지고 지극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이 분들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쁨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빛의 매력은 현재 변화되고 있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구별된 삶, 아름다운 삶, 희생적인 삶, 감탄할 만한 매력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신약교회의 신자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어디에서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331-363) 기독교가 남모르게 선행을 해서 세계를 영원히 차지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제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상수훈의 탁월함과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준 삶은 단지 우리가 보아야 할 이상일까요? 우리는 그 이상을 붙잡고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추어야 할 빛은 단순이 복음을 말로 선포하는 빛이 아니라 정의와 긍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해서, 자연 회복을 위해서도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의 이런 삶은 결국 그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들은 박해 속에서도 슬퍼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3:1-52
요절 | 사도행전 13:47
이방의 빛 바울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마포구에는 버려진 철길이 아름다운 숲길 공원으로 바뀐 연남동 숲길이 있습니다. 또 쓰레기 매립장에 흙을 쏟아 붓고 나무를 심고 물길을 만들어 월드컵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으로 바꾸었습니다. 버려진 땅을 사람들이 쉼을 얻고 생명을 회복하는 공원으로 바꾼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흙과 나무와 섬김 등 생명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버려진 땅과 같은 이방 나라에 하나님은 생명을 불어 넣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디옥 교회를 세우시고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십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빼어난 성경 선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에 기둥과 같던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이들을 통해서 세계 선교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의 빛으로 쓰십니다. 이 시간 이방의 빛이란 의미가 무엇인가 배우고 우리도 이 시대를 비추는 생명의 빛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검은 피부를 가진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피부색과 나라에서 모였고 왕족과 평민 등 출신성분이 달랐지만 한 교회에서 합심해서 동역하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는 문화적으로 풍성하였고 성경 공부에 열심이 있음으로 말씀이 풍성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헬라 문화에 익숙하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서 이방 선교를 하기에 적합했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성령께서는 선교의 주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의 두 기둥과 같은 바나바와 사울을 세계 선교를 위한 개척자로 파송하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선포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공동체가 세워질 때 전도와 선교는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우리 모임도 신촌 지역 캠퍼스 개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김아브라함, 사라 선교사님을 비롯하여 최봉림(폴), 양인실(페트라리), 이반석, 반드기드온, 최다니엘 등 개척자들과 믿음의 조상들을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교회의 기둥과 같은 분들이 계속 선교사로 파송됨으로 우리가 성장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본국과 선교지가 합심 동역해서 하나님 나라가 11개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올해도 윤혜림선교사를 미국 애틀란타에 파송하고 올 가을에는 박기성 형제님이 일본에 나아가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단기 선교사로 오스트리아 빈에 나아갔던 나경건자매님은 다시 그곳에 나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지난 주일에 발표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렀습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이곳은 길이가 224km, 폭이 96km에 달하는 큰 섬인데 제주도보다 8.3배나 큰 섬입니다. 그들은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들어가서 전하였습니다. 그때 마가 요한이 수행원으로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렀습니다. 바보는 그 섬의 중심도시로서 총독 관저가 있었습니다. 특히 바보는 고린도와 같이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의 웅장한 신전으로 유명했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였습니다. 그는 원로원의 선거권을 가진 유력한 총독이요 로마의 문학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바나바와 바울이 오자 그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총독은 서기오 바울이고 사울의 이름도 바울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뀝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당시 헬라 지역에서 이민 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두 개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생후 8일이 되면 할례를 행하고 유대식 이름을 지어주었고, 9일째에는 로마식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유대 지역에 있을 때는 유대식 이름인 사울이라고 불렸지만, 헬라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로마식 이름인 바울이라고 불리웠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자 마술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하며 선지자 노릇을 하던 바예수가 이를 방해하였습니다.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 구세주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엘루마’인데 이름의 뜻은 마술사입니다. 그는 궁중 마술사로서 어찌하든지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을 썼습니다.
그러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저주하였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였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투사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를 훼방하는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충동질하여 말씀을 영접하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진화론이나 무신론 등 거짓 진리들이 그를 붙잡고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핍박도 있고 위협도 하고 사랑 공세를 퍼붓기도 합니다. 사탄은 양들에게 말씀을 듣는 것을 갖가지 핑계를 만들어서 미루도록 하거나 의심을 심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의 잔재미들을 동원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돈 버는 일에 힘을 쏟도록 이끕니다. 탐욕을 자극하여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탐욕은 끝이 없는 욕심이기에 결코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수들에 대한 영적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한 치도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편에 굳게 서서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한 영혼을 구출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다윗이 사자에게 물려간 양을 구출하기 위해서 사자의 입을 찢고 그 속에 있는 양을 구출하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도와 선교는 능력 대결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세상의 신인 마귀를 제압하고 쫓아냅니다. 우리는 한 말씀이 역사하여 양이 변화되도록 정성스럽게 말씀을 준비하여 심고,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기도에, 섬김에, 말씀에 스며 있어야 합니다. 총독은 바울이 선포한대로 엘루마가 눈이 멀자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말씀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1차전도 여행의 첫 열매였습니다. 그는 구브로 섬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부터 바울은 복음 역사의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이런 장애물은 가는 곳마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기와 반대, 기존 세력들과의 충돌, 미신, 그 지역의 풍습 등. 이런 장애물을 만날 때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영적 싸움을 하고 하나씩 하나씩 극복해나갑니다.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하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진리를 왜곡하고 의로움이 굽어져 있는 곳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곳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력들과 장애물들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극복해 나가면서 복음 역사를 섬깁니다. 복음 역사를 훼방하는 세력을 만나면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위축되기 쉽습니다. 마음이 위축되면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복음 역사를 훼방한다고 해서 놀라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바울처럼 담대한 마음으로 대적하는 사람을 제압해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유일하신 참 신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장애물들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약 280km의 여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수행했던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함께 전도 여행을 하던 마가 요한이 힘들다고 돌아갔을 때 바울과 바나나는 얼마나 힘이 빠졌겠습니까? 마가 요한이 전도 여행 중에 왜 되돌아갔을까요? 여러 가지를 추측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집에 대한 향수병 때문이다.”, “병에 걸려서 더 이상 전도여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삼촌인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하면서 주도권을 바울에게 빼앗기자 화가 나서 돌아갔다.”, “해발 1080미터나 되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이 험준하고 강도가 창궐해서 따라가지 않고 돌아왔다.” 등등.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가 요한이 부자집 과부의 외아들로 자라서 힘든 전도 여행을 견뎌낼 만큼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마가요한이 돌아가자 크게 실망하고 더 이상 그를 동역자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2차전도 여행 때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사울이 크게 다투고 갈라서게 됩니다(행15:36-41).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에 돌아간 후에 “내 자신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생각하며 자책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실패자요 낙오자라는 생각에 방황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실패했다고 영원히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그는 성숙해져서 베드로의 유익한 동역자가 되었고, 바울에게도 꼭 필요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인생 말년에 쓴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실패하지 않고 처음부터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이 되면 좋겠지만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낙오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청년의 때는 마가 요한처럼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라서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깨지면서 더딜지라도 성장해서 나중에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소망을 심고 이들이 장차 미래 선교의 주역들이 되도록 지원하고 키워야 합니다.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였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는 이스라엘 역사를 개관하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그를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님은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던 그 모든 일에서 풀려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과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의롭게 됨을 증거했습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했습니다. 모든 종교는 도덕과 선행을 통해서 하늘에 오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결코 율법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의롭게 되고자 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가를 발견할 뿐입니다. 죄의 세력은 너무나 강해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하고 불법과 불의, 불평등이 판치는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억압, 학대, 폭력, 왜곡된 성, 우상 숭배, 교만, 탐욕스러운 소비가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할 때 죄로 인한 심판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사회가 정의롭게 변화되고, 경제가 풍성해지며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42-4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사도 바울을 통한 비시디아 안디옥 선교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세상은 우상을 숭배하고 진리를 몰라 방황하고 죄로 인해서 어둡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진리를 밝혀줍니다. 이방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이방의 빛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회복해줍니다. 이방의 빛은 하나님과 인간, 자연까지도 구속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합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런 이방 세계에 복음 빛을 비추어주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는 빛과 같은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선교사가 된 것이 강력한 증거입니다. 목자의 역할도 이와 같습니다. 갈 길 몰라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서 갈 길을 알려주는 것이 목자의 역할입니다. 일생동안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일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방의 빛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통해서 빛을 이 세상에 비추십니까? 우리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과 윤리적인 삶, 감탄을 자아내는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만드십니다. 왜 저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게 살까? 어찌 저렇게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며 기쁨 가운데 살아갈까?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이요한선교사님 가정을 갑자기 방문한 저희를 마룻바닥에다 재워줘도 감사한데 안방 침대를 내주며 환대하였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폴최 선교사님은 바쁜 가운데 우리를 섬겨주셨고 메리최 선교사님은 불편한 손을 가지고 지극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어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이 분들의 사랑에 감사하고 기쁨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빛의 매력은 현재 변화되고 있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구별된 삶, 아름다운 삶, 희생적인 삶, 감탄할 만한 매력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신약교회의 신자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어디에서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331-363) 기독교가 남모르게 선행을 해서 세계를 영원히 차지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제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상수훈의 탁월함과 믿음의 조상들이 보여준 삶은 단지 우리가 보아야 할 이상일까요? 우리는 그 이상을 붙잡고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힘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추어야 할 빛은 단순이 복음을 말로 선포하는 빛이 아니라 정의와 긍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해서, 자연 회복을 위해서도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의 이런 삶은 결국 그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들은 박해 속에서도 슬퍼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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