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23년 행4강(4:1-31)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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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 4 강
말씀 | 사도행전 4:1-31
요절 |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베드로의 말씀 선포와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밝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우리에게 없음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교회와 함께 일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알고 사람들이 그를 인식하도록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관리하고 성전 예배를 주관하고 성전 질서를 유지하도록 권위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였습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천사와 영혼과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현세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주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때에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은 요 2:19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누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으니 성전의 기능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한 구원 역사가 성장할수록 자신들의 입지는 사라지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 가문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 이튿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오늘날 외적인 핍박이 없지만 다른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의 인생을 살지 못하도록 사탄은 훼방하고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쿠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는 악마인 스쿠루테이프가 조카이자 신참 악마인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을 전수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스쿠루테이프가 전수해주는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논증을 통해서 사람들의 영적인 관심과 소원을 빼앗으려고 하지 말고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서 영적 관심을 빼앗으라고 충고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읽거나 신앙에 관심을 갖고자 할 때에는 식사를 한 후에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서 다른 일에 관심을 갖게 하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자 처음 교회에 오면 분위기나 다른 사람의 무례한 행동이나 결점을 보고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도록 어찌하든지 방해하지만, 한 번 영접했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예수님께 헌신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자꾸 세상 일에 관심을 쏟게 하고 먹고 사는 일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라고 합니다. 영적인 일에 열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내면 상태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라고 전수합니다. 자신의 내면만 바라보면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을 많이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생각과 느낌 속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결국 사탄의 전략은 자신과 상황과 세상 일에 관심을 빼앗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헌신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심문하고 죽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습니다. 이는 유대 최고 법정으로서 그 앞에 선다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제자들을 죽이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하였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는 제자들의 권위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물은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였습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베드로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권능을 받고 달라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이십니다. 그들이 죽인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시어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을 부은 자라는 뜻입니다. 왕이나 대제사장, 선지자들을 세울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분을 통합해서 섬기십니다. 그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습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오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으로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복주기 위해서 이 땅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선교를 성취하십니다. 그는 구약에서 야훼 하나님만의 특권으로 나오는 모든 능력을 수행하십니다. 창조자와 우주의 소유자, 역사의 통치자, 모든 민족의 심판자, 그분에게 의지하는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역할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알리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그 하나님의 권위로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자는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상 숭배와 대결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을 때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할 때에 그런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피조물일뿐임이 드러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바알과 아세라와 가나안의 많은 신들과 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한 가운데서도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를 통해서 바벨론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지만 성령으로 오셨고 지금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신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위대한 스포츠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경기장이나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포츠 영웅들의 삶, 록 음악 콘서트 무대나 인기 절정의 텔레비전 혹은 영화 스타들, 과학기술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숭배하도록 미혹하는 우상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달래거나 피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신으로 만들어 경배합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것들 즉 우리를 두려움에서 구해 주리라 믿는 것들, 사람 혹은 제도를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우상으로 만들어 경배합니다. 즉 태양신, 비의 신, 땅의 신, 성과 다산의 신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가 될 때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것들, 경외감에 떨게 만드는 것들을 신으로 만들어 숭배합니다. 이런 우상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을 가로챕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인간성과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해를 끼칩니다. 우상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오늘날은 절대 가치를 부인하는 절대상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가 우상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가 옳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도 여럿이 있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를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로 여깁니다. 다른 종교들은 다 포용적입니다. 자기의 신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자력구원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공로를 통해서 하늘을 감동시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면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내 죄를 속하기 위해서 누가 내 대신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총체적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선교의 모델입니다. 애굽 바로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적 부분에서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육신도 회복해 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대체할 수 없는 명의, 서울 아산 병원 흉부외과의사 주석중 씨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환자들은 그를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그가 쓰던 방의 벽에 있는 작은 게시판에 기도문 한 장이 영문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but what can I do in the actual healing process? Absolutely nothing. It is all in God’s hands(하지만 실제 치유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정성을 다해 수술하고 환자를 돌보지만 내 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십사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그렇게 적어두신 듯하다”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의사들을 통해서 치료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와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물질적인 가치관과 상대주의적인 세상 속에서 이런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돈을 신처럼 숭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자족과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열매가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영적인 권위가 나옵니다. 우리 가운데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악들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이 한 일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공회에서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위협하였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힘이 있습니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증거할 때 소감이 힘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형벌을 가하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하며 그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캘빈의 인생 좌우명은 ‘코람 데오(Coram Deo)'였습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어전에서’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다는 뜻입니다. 캘빈은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춤을 춥니다. 찬양을 합니다. 나중에 빌립보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기도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했습니다. 찬양 속에는 회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럽교회는 찬양의 회심적 능력을 통해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인트 루이스의 폴최 선교사님도 찬양 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거듭났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로마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는 가운데 거듭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3월에 켄터키 루이빌에 3세 선교사인 데이빗 주(David Choo) 형제가 12살인데 로봇자동차 경진대회에 출전하여 켄터키 주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계대회에 나가게 되는데 그 대회는 NASA, Google, Microsoft, MIT등이 후원하는 대회입니다. 그런데 그를 돕는 코치가 그를 우승하게 하고자 주일 아침에 와서 훈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데이빗은 주일 오전은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자신은 훈련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코치는 노발대발했습니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이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그러자 데이빗이 말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로봇대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코치가 화가 나서 그를 그 팀에서 퇴출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데이빗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가? 판단해 보았을 때 주일을 어기고 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일날 학생들을 불러 훈련시키는 것은 적그리스도적인 것이요, 사람들이 로봇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체험한 인격적인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백혈병, 혈액암에 걸려서 죽을 뻔 했는데 간절히 기도했을 때 주님이 기적적으로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코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코치가 마음을 고쳐먹고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 만나 훈련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데이빗의 분명한 믿음을 보시고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코치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사도들이 놓이자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빌기를 다하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합시다. R. A. 토리는 “위대한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위해 노력하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기도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4:1-31
요절 |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베드로의 말씀 선포와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이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밝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우리에게 없음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교회와 함께 일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알고 사람들이 그를 인식하도록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관리하고 성전 예배를 주관하고 성전 질서를 유지하도록 권위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였습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천사와 영혼과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현세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주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때에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은 요 2:19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누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으니 성전의 기능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통한 구원 역사가 성장할수록 자신들의 입지는 사라지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 가문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 이튿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오늘날 외적인 핍박이 없지만 다른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의 인생을 살지 못하도록 사탄은 훼방하고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쿠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에는 악마인 스쿠루테이프가 조카이자 신참 악마인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을 전수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스쿠루테이프가 전수해주는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논증을 통해서 사람들의 영적인 관심과 소원을 빼앗으려고 하지 말고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서 영적 관심을 빼앗으라고 충고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읽거나 신앙에 관심을 갖고자 할 때에는 식사를 한 후에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서 다른 일에 관심을 갖게 하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자 처음 교회에 오면 분위기나 다른 사람의 무례한 행동이나 결점을 보고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도록 어찌하든지 방해하지만, 한 번 영접했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예수님께 헌신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자꾸 세상 일에 관심을 쏟게 하고 먹고 사는 일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라고 합니다. 영적인 일에 열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내면 상태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라고 전수합니다. 자신의 내면만 바라보면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을 많이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생각과 느낌 속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결국 사탄의 전략은 자신과 상황과 세상 일에 관심을 빼앗아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헌신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심문하고 죽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습니다. 이는 유대 최고 법정으로서 그 앞에 선다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제자들을 죽이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하였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는 제자들의 권위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물은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하였습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베드로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권능을 받고 달라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이십니다. 그들이 죽인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시어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을 부은 자라는 뜻입니다. 왕이나 대제사장, 선지자들을 세울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분을 통합해서 섬기십니다. 그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자유를 얻습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오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으로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복주기 위해서 이 땅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선교를 성취하십니다. 그는 구약에서 야훼 하나님만의 특권으로 나오는 모든 능력을 수행하십니다. 창조자와 우주의 소유자, 역사의 통치자, 모든 민족의 심판자, 그분에게 의지하는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역할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알리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그 하나님의 권위로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자는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상 숭배와 대결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을 때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할 때에 그런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피조물일뿐임이 드러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바알과 아세라와 가나안의 많은 신들과 싸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한 가운데서도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를 통해서 바벨론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지만 성령으로 오셨고 지금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신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위대한 스포츠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경기장이나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포츠 영웅들의 삶, 록 음악 콘서트 무대나 인기 절정의 텔레비전 혹은 영화 스타들, 과학기술주의 등 이 모든 것들은 숭배하도록 미혹하는 우상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들을 달래거나 피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신으로 만들어 경배합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것들 즉 우리를 두려움에서 구해 주리라 믿는 것들, 사람 혹은 제도를 우상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우상으로 만들어 경배합니다. 즉 태양신, 비의 신, 땅의 신, 성과 다산의 신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가 될 때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것들, 경외감에 떨게 만드는 것들을 신으로 만들어 숭배합니다. 이런 우상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을 가로챕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시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인간성과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해를 끼칩니다. 우상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오늘날은 절대 가치를 부인하는 절대상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가 우상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두가 옳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길도 여럿이 있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를 편협하고 배타적인 종교로 여깁니다. 다른 종교들은 다 포용적입니다. 자기의 신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자력구원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공로를 통해서 하늘을 감동시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면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내 죄를 속하기 위해서 누가 내 대신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구원은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총체적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선교의 모델입니다. 애굽 바로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적 부분에서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육신도 회복해 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대체할 수 없는 명의, 서울 아산 병원 흉부외과의사 주석중 씨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환자들은 그를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그가 쓰던 방의 벽에 있는 작은 게시판에 기도문 한 장이 영문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but what can I do in the actual healing process? Absolutely nothing. It is all in God’s hands(하지만 실제 치유 과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정성을 다해 수술하고 환자를 돌보지만 내 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십사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그렇게 적어두신 듯하다”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의사들을 통해서 치료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와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물질적인 가치관과 상대주의적인 세상 속에서 이런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돈을 신처럼 숭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자족과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열매가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 영적인 권위가 나옵니다. 우리 가운데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악들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이 한 일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공회에서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의논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위협하였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힘이 있습니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을 증거할 때 소감이 힘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형벌을 가하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하며 그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캘빈의 인생 좌우명은 ‘코람 데오(Coram Deo)'였습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어전에서’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다는 뜻입니다. 캘빈은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춤을 춥니다. 찬양을 합니다. 나중에 빌립보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기도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했습니다. 찬양 속에는 회심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럽교회는 찬양의 회심적 능력을 통해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인트 루이스의 폴최 선교사님도 찬양 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거듭났습니다.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로마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는 가운데 거듭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3월에 켄터키 루이빌에 3세 선교사인 데이빗 주(David Choo) 형제가 12살인데 로봇자동차 경진대회에 출전하여 켄터키 주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계대회에 나가게 되는데 그 대회는 NASA, Google, Microsoft, MIT등이 후원하는 대회입니다. 그런데 그를 돕는 코치가 그를 우승하게 하고자 주일 아침에 와서 훈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데이빗은 주일 오전은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자신은 훈련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코치는 노발대발했습니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이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그러자 데이빗이 말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로봇대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코치가 화가 나서 그를 그 팀에서 퇴출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데이빗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가? 판단해 보았을 때 주일을 어기고 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일날 학생들을 불러 훈련시키는 것은 적그리스도적인 것이요, 사람들이 로봇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체험한 인격적인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백혈병, 혈액암에 걸려서 죽을 뻔 했는데 간절히 기도했을 때 주님이 기적적으로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코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코치가 마음을 고쳐먹고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 만나 훈련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데이빗의 분명한 믿음을 보시고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코치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사도들이 놓이자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습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빌기를 다하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합시다. R. A. 토리는 “위대한 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위해 노력하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기도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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