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013년 빌립보서 7강(4:1-7)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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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7 강
말씀 | 빌립보서 4:1-7
요절 | 빌립보서 4:6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는 지난 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바울의 신앙 경주자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면서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달리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신자들의 실제 삶에 대한 권면들이 나옵니다. 첫째로 마음을 같이할 것을 권합니다(1-3). 둘째,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4-7).
첫째, 마음을 같이 하라(1-3).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정서로는 낮 간지러운 표현들이지만 바울은 담대하게 쓰고 있습니다. 마치 십대나 이십대 청소년들이 연애편지를 쓰면서 열병을 앓는 것처럼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청년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머나먼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지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으면 눈 앞에 빌립보 성도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잠들면 꿈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만나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양들이 말을 잘 듣고 약속도 잘 지키고 잘 성장해 주면 목자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양들의 어떤 행동이 기쁨이 아니요 양들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양들은 ‘나의 면류관’이라고 불렀습니다. 면류관은 최고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면류관은 마라톤 경주에서 승리한 사람의 머리에 감람나무 가지나 월계수 등으로 씌워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은 타이틀이나 경력이나 박사학위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열매로 맺은 양들이었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현재 느끼는 영광입니다. 또한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께로부터 받을 칭찬과 영광입니다. 우리가 다 이런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서라’는 단어는 군대 용어로서 임전태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사처럼 어깨를 딱 벌리고, 두 눈은 원수들을 째려보며, 두 발은 땅을 굳게 딛고 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전쟁터의 전사들처럼 굳게 서야 되는 이유는 앞장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의 가치관이 전도되어 물질과 쾌락과 인간의 사상들이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과 영향력이 끊임없이 성도들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물결 배후에서 사탄이 우리를 실족시키려고 쉬지 않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야 합니다. 주 안에 굳게 서라는 것은 창조주요 세상의 통치자이신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10,11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영적인 전신갑주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군화, 믿음의 방패, 그리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엡6:14-16). 우리가 이렇게 영적인 무장을 하고 굳게 설 때, 감히 대적들이 접근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여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두 자매님들은 교회에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심도 있고 캐릭터도 강했나 봅니다. 이들이 서로 분쟁함으로 교회가 하나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 복음에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합니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바울은 분쟁을 일으킨 그들을 책망하면서 동시에 도우라고 권합니다. 대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허물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공을 인정하고 세워줍니다. 이 자매 목자들은 빌립보를 개척할 때 헌신적으로 수고했습니다. 이들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기도해 주고, 권면하고, 돌이켜 합심하도록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허물을 보였을지라도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인하여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더라도 형제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려운 문제들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시고 영접하신 분들이니 나도 그들의 허물을 덮고 그들의 훌륭한 점을 찾아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다른 동역자들을 존중하지 않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문제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외심을 갖고 대할 때 하나 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둘째, 주 안에서 기뻐하라(4-7). 바울은 교회에 갈등을 일으킨 자매님들을 책망하고 격려하고 나서 다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좋은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련이 있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때에라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이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선하신 주권과 섭리를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 때,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마음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 5,6절에서 말씀합니다.
먼저, 관용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무엇 위에 덮는다’는 뜻입니다. 즉 관용은 남의 허물과 약점을 덮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맥 나이트라는 주석가는 관용을 설명하기를 ‘박해에 대한 온유성, 중상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 사무 처리에 있어서의 공정성, 남의 성격과 행동을 판단함에 있어서 공평성, 성격의 친절성, 감정의 전적인 절제 등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관용하되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라고 했습니다. 신자들 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리고 어울리기 좋은 사람, 편안한 사람 뿐 아니라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 영접하기 힘든 사람에게도 관용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각박하기 때문에 신자들마저도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기적으로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보이신 삶의 모범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고, 육신의 정욕에 넘어져 죄를 짓고 인생의 상처로 인하여 병들고 고통하는 자들을 영접하며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관용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다 그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주여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너는 세상에서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너에게 관용을 베풀겠느냐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끝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판을 받을 자인 것처럼 생각할 때 관용을 베풀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포함해서 우리를 위해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관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다음으로, 염려를 멈춰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KJV에서는 “Be anxious for no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즉 nothing과 everything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염려입니다. 염려는 누구나 버릇처럼 하기 쉽습니다. 안 해야지 하면서 다시 하고, 안 한다고 하면서 먼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를 안개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광화문 일대를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잔의 물이 600억 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 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를 멈추어야 합니다. 대신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기도제목으로 바꿀 때 삶은 놀랍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흘러넘치게 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가 많으면 기도 제목이 많다는 뜻입니다. 기도할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응답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쟌느 귀용은 「기도의 비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녀는 신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아주 쉽게 기도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유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미사여구를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떠듬거리며 말할지라도 마음이 담긴 기도가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 나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CCC를 창설한 빌브라잇 박사의 부인이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남편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했습니다. 신문기자가 빌 브라잇를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에게는 근심걱정이 없습니까?” 빌 브라잇이 대답하기를 “나에게는 근심걱정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집요하게 이 문제를 추궁하며 여러 번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러자 빌 브라잇이 “나는 근심걱정을 주님께 맡겨버렸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근심걱정과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쟌느 귀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두절을 소리내어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깨닫는 그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합니다. 천천히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기도합니다.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당장 주시지 않는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십니다. 또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기다리십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면 반복해서 구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나 헌신 등에 사용하고, 간구는 특별한 기도, 개인적인 특별한 요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염려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속한 것을 주시지 않으면 하늘 보화로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언어에 염려라는 말을 삭제하고 그 곳에 기도를 넣어야 합니다.
기도에 제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탐욕으로 구하는 것,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물질을 향할 때 마음이 산만해지고 염려가 생깁니다. 문제가 생길 때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면 염려가 되고 하나님을 향하면 기도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문제 앞에서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염려의 결과는 패배이지만 기도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무한한 기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절대적인 만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평화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평안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요 모든 표현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고 있는데 광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제자들은 물을 퍼내고 닻을 내리고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해도 자기들이 물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곤히 잠을 주무셨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어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성난 파도와 미친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잔잔한 호수와 같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들의 마음에도 기이한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뢸 때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킨다’는 단어는 군대용어로서 빈틈없이 지켜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운 상황, 염려가 되는 상황, 위기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일들로 염려하기보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을 준비하면서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만나는 친지들에게 평화를 선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빌립보서 4:1-7
요절 | 빌립보서 4:6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는 지난 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바울의 신앙 경주자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면서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달리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신자들의 실제 삶에 대한 권면들이 나옵니다. 첫째로 마음을 같이할 것을 권합니다(1-3). 둘째,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4-7).
첫째, 마음을 같이 하라(1-3).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정서로는 낮 간지러운 표현들이지만 바울은 담대하게 쓰고 있습니다. 마치 십대나 이십대 청소년들이 연애편지를 쓰면서 열병을 앓는 것처럼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이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청년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머나먼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지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으면 눈 앞에 빌립보 성도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잠들면 꿈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만나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양들이 말을 잘 듣고 약속도 잘 지키고 잘 성장해 주면 목자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양들의 어떤 행동이 기쁨이 아니요 양들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양들은 ‘나의 면류관’이라고 불렀습니다. 면류관은 최고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면류관은 마라톤 경주에서 승리한 사람의 머리에 감람나무 가지나 월계수 등으로 씌워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은 타이틀이나 경력이나 박사학위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열매로 맺은 양들이었습니다. 양들은 목자가 현재 느끼는 영광입니다. 또한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께로부터 받을 칭찬과 영광입니다. 우리가 다 이런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주 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서라’는 단어는 군대 용어로서 임전태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사처럼 어깨를 딱 벌리고, 두 눈은 원수들을 째려보며, 두 발은 땅을 굳게 딛고 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전쟁터의 전사들처럼 굳게 서야 되는 이유는 앞장에서 말한 대로 이 세상의 가치관이 전도되어 물질과 쾌락과 인간의 사상들이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가치관과 영향력이 끊임없이 성도들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물결 배후에서 사탄이 우리를 실족시키려고 쉬지 않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야 합니다. 주 안에 굳게 서라는 것은 창조주요 세상의 통치자이신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10,11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영적인 전신갑주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군화, 믿음의 방패, 그리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엡6:14-16). 우리가 이렇게 영적인 무장을 하고 굳게 설 때, 감히 대적들이 접근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여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두 자매님들은 교회에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심도 있고 캐릭터도 강했나 봅니다. 이들이 서로 분쟁함으로 교회가 하나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또 복음에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합니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바울은 분쟁을 일으킨 그들을 책망하면서 동시에 도우라고 권합니다. 대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허물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공을 인정하고 세워줍니다. 이 자매 목자들은 빌립보를 개척할 때 헌신적으로 수고했습니다. 이들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기도해 주고, 권면하고, 돌이켜 합심하도록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허물을 보였을지라도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인하여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더라도 형제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려운 문제들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시고 영접하신 분들이니 나도 그들의 허물을 덮고 그들의 훌륭한 점을 찾아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다른 동역자들을 존중하지 않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문제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외심을 갖고 대할 때 하나 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둘째, 주 안에서 기뻐하라(4-7). 바울은 교회에 갈등을 일으킨 자매님들을 책망하고 격려하고 나서 다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좋은 일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련이 있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때에라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라!’ 이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와 선하신 주권과 섭리를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실 때,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마음에는 기쁨도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 5,6절에서 말씀합니다.
먼저, 관용해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무엇 위에 덮는다’는 뜻입니다. 즉 관용은 남의 허물과 약점을 덮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맥 나이트라는 주석가는 관용을 설명하기를 ‘박해에 대한 온유성, 중상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 사무 처리에 있어서의 공정성, 남의 성격과 행동을 판단함에 있어서 공평성, 성격의 친절성, 감정의 전적인 절제 등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관용하되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라고 했습니다. 신자들 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그리고 어울리기 좋은 사람, 편안한 사람 뿐 아니라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 영접하기 힘든 사람에게도 관용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각박하기 때문에 신자들마저도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기적으로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보이신 삶의 모범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고, 육신의 정욕에 넘어져 죄를 짓고 인생의 상처로 인하여 병들고 고통하는 자들을 영접하며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관용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다 그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주여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너는 세상에서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너에게 관용을 베풀겠느냐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끝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판을 받을 자인 것처럼 생각할 때 관용을 베풀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포함해서 우리를 위해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관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다음으로, 염려를 멈춰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KJV에서는 “Be anxious for no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 즉 nothing과 everything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은 염려입니다. 염려는 누구나 버릇처럼 하기 쉽습니다. 안 해야지 하면서 다시 하고, 안 한다고 하면서 먼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염려를 안개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광화문 일대를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잔의 물이 600억 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 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를 멈추어야 합니다. 대신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기도제목으로 바꿀 때 삶은 놀랍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흘러넘치게 되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가 많으면 기도 제목이 많다는 뜻입니다. 기도할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응답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쟌느 귀용은 「기도의 비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녀는 신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아주 쉽게 기도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유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미사여구를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떠듬거리며 말할지라도 마음이 담긴 기도가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 전에 나의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CCC를 창설한 빌브라잇 박사의 부인이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남편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했습니다. 신문기자가 빌 브라잇를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에게는 근심걱정이 없습니까?” 빌 브라잇이 대답하기를 “나에게는 근심걱정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집요하게 이 문제를 추궁하며 여러 번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러자 빌 브라잇이 “나는 근심걱정을 주님께 맡겨버렸습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근심걱정과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쟌느 귀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두절을 소리내어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깨닫는 그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합니다. 천천히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기도합니다.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당장 주시지 않는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기다리십니다. 또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기다리십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면 반복해서 구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나 헌신 등에 사용하고, 간구는 특별한 기도, 개인적인 특별한 요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할 때 염려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속한 것을 주시지 않으면 하늘 보화로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언어에 염려라는 말을 삭제하고 그 곳에 기도를 넣어야 합니다.
기도에 제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탐욕으로 구하는 것,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물질을 향할 때 마음이 산만해지고 염려가 생깁니다. 문제가 생길 때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면 염려가 되고 하나님을 향하면 기도가 됩니다. 신앙생활은 문제 앞에서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염려의 결과는 패배이지만 기도의 결과는 축복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무한한 기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절대적인 만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평화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평화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평안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요 모든 표현을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고 있는데 광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제자들은 물을 퍼내고 닻을 내리고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해도 자기들이 물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곤히 잠을 주무셨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어나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성난 파도와 미친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잔잔한 호수와 같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들의 마음에도 기이한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뢸 때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킨다’는 단어는 군대용어로서 빈틈없이 지켜준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운 상황, 염려가 되는 상황, 위기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일들로 염려하기보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을 준비하면서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만나는 친지들에게 평화를 선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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