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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013년 빌립보서 6강(빌3:12-21) 푯대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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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53회 작성일 13-09-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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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6 강
말씀 | 빌립보서 3:12-21                                         
요절 |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는 지난 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함을 배웠습니다.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는 그것이 아픔을 동반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사실을 아는데 있어서 아픔을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깨달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신앙을 알고 있는가 깨달았는가를 판단하는 기준도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는가 아닌가로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타성에 젖어서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푯대를 분명하게 인식하면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푯대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한 사도 바울의 믿음을 잘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신앙의 경주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는 경기하는 자가 일등을 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많은 교회를 세웠고, 제자들을 얻었습니다. 인격적으로도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구원의 완성을 얻은 것도 아니요 무엇을 이룬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로 살았습니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여 예루살렘부터 일루리곤까지 편만하게 복음을 전했고 또 로마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바나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땅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에는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가 예수님을 알고자 할수록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위대성과 함께 자신의 초라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수록 자기발견이 깊어져서 겸손해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바울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자족하지 않고 오직 전진에만 몰두했습니다. 자족할 때 더 이상 노력하지 않습니다. 자족하는 삶은 더 이상 성장이 없습니다. 바울은 끝없이 성장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는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이 성공한 것도 잊어먹고 실패한 것도 잊었습니다. 그는 성공으로 인해서 교만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날 주님께 헌신하여 맺은 열매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과거만을 회상하며 ‘왕년에는 나도 한 가닥 했는데!’하며 살기 쉽습니다. 혹은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죄의식에 얽매여 살기도 쉽습니다. 물론 언제나 용서받은 죄인의 태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식 자체에 얽매여 사는 것은 온전히 주님의 용서의 복음을 믿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실패한 과거의 상처에 머물러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상처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여러 사람들에게 수없이 상처를 받았지만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열매 없는 자신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힘을 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매가 없었다면 앞으로 열매를 맺을 소망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허물을 회개하고 버린 후에 잊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인생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란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경주자가 경주에 집중하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은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히12:1,2)만을 바라보고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달려야 합니다. 바울은 세계 선교와 구원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달려왔습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상급은 영생과 썩지 않을 면류관입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대학에 들어왔으나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분명하지 않아서 방황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인생 목적과 목표가 없으니 모든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가야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 않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가야 할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문을 가진 도마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서 만나게 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나를 알게 됩니다. 자기 발견이 됩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때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완수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바울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씀했습니다. 은혜와 함께 사명도 받습니다. 전도자는 젊은 청년들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전12:1,12). 역사가 토인비는 내세를 인정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양심과 역사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자기가 행한 일에 따라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5:9-10).” 또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은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갈6:8).

  1950년 6.25 남북 동란이 발발하자 15살의 한 소년은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이념 차이로 시작된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의로운 전쟁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싸워야 합니까? 우리가 왜 죽어야 합니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왜 살상을 해야 합니까? 나는 도대체 어찌해야 옳은 겁니까?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신다면 우리를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북한과 중국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쟁 후에 유럽 유학을 하고, 미국에 가서 사업을 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의 초청으로 ‘경제개혁’과 관련된 강의를 하면서 중국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에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스파이로 몰아 죽이려던 북한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유서를 썼습니다. 첫째, 총장이 죽었다고 절대 곡이나 장례식을 하지 말고 천국으로 가는 송별식을 하고 풍악을 울리라. 둘째, 아내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과 정리할 부분들에 대해서 썼습니다. 셋째, 미국 정부에 대해서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북한을 보복하지 말라. 끝으로 자신의 육신을 평양과기대에 기증해 달라. 그는 사랑으로 공산주의자들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펄펄 살아서 대학생들을 교육하고 사랑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분명한 푯대를 향하여 지금도 달리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김진경 총장입니다.

  바울은 성숙한 신앙인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성숙한 사람은 자기의 불완전을 느끼면서 부단히 성장하고자 노력합니다. 자신이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그대로 달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형제들에게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완전해서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는 바나바와 함께 선교를 하면서 마가 문제로 인해 갈등하였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장하면서 마가를 영접하고 선교역사를 함께 동역하다가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골4:10). 이를 볼 때 바울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고 일생 성장하는 자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을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고 말합니다.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이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본받고자 몸부림치고 있음을 간증했습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쾌락주의자들, 반도덕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죄를 짓고 회개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쾌락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는 말에서 ‘배’는 인간 욕망의 전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기적인 사람을 ‘자기 배만 채운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당시 로마 사람들은 노아 시대 사람들과 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가는 일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것이 도를 넘어서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로마가 멸망한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덕적인 타락이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수인권법을 통과시키고자 하다가 좌절되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합니다. 방송에서 커밍아웃을 선언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자랑합니다. 또 사람들은 이 세상이 천국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즐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세상 쾌락들을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돈과 연관지어서 생각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강구합니다. 그들에게 물질적 욕망을 채우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예수님을 욕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원수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물질을 좇고 쾌락을 좇는 인본주의적이고 형식적인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생명의 길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듭니다. 동시에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유혹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며 조롱하고 핍박합니다. 물질과 육신을 좇는 삶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마침은 구원과 영생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전도되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외면당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물질과 육신을 좇는 그릇된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 있든지 미국의 강력한 보호를 받습니다. 미국 시민권자로서 북한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억류를 당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전직 대통령들이 나서서 그들을 데리고 나옵니다. 미국은 어린 아이와 노인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 만큼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의 힘이 많이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영적인 타락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호적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80년 - 120년의 짧은 생애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거룩한 나그네의 여행길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우리 신자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즐겁고 행복한 일들도 많지만, 동시에 마음 상하고 괴로운 일도 많습니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와 평화도 있으나, 미움과 오해와 갈등과 불화도 있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실낙원 된 세상이기 때문에 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시민권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한 자세로 살아야겠습니다. 땅의 일에만 마음을 두고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며 사는 세상 조류를 좇지 않고 푯대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바라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가진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장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채로 그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의롭다함을 받고 영생의 부활을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강한 몸을 입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하여 달려가야겠습니다. 썩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영적인 경주를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이 경주를 할 수 있으려면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다 가고 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의 낮은 몸을 예수님의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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