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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013년 빌립보서 5강(빌3:1-11) 그리스도를 알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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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31회 작성일 13-09-0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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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5 강
말씀 | 빌립보서 3:1-11                                         
요절 | 빌립보서 3:10,11


그리스도를 알고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보다 더 경건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1380년에 태어나 92세에 죽을 때까지 청빈, 정결, 복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대속의 신비, 예수님의 사랑, 특히 예수님의 고난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을 알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떤 점이 그로 하여금 이런 삶을 살게 했는지 배우고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에 붙잡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2:17,18절에서 그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자신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말하면서 성도들에게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다시 1절에서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기쁨, 음악을 듣는 기쁨, 운동하는 기쁨, 독서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로 인한 기쁨도 있습니다. 히11:25절에 보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라고 말씀했는데 죄악의 낙을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죄 짓는데 기쁨이 있기 때문에 정욕에 빠지고 탐욕에 빠지고 도박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웃음 치료라는 것이 있어서 억지로 웃으면 기쁨이 생기고 마음의 치료도 잘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행복전도사라는 분들이 자살하는 것을 볼 때 이런 것들이 한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상황을 뛰어 넘는 기쁨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갇혔는데 기뻐하고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혔어도 기뻐하였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형제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할 정도로 기뻐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은 근원적인 기쁨입니다. 죄로 인해 사형판결을 받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이 복음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체험했을 때는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고 항상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날마다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은혜를 기쁨으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또 주님께 헌신할 때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거나 진실되게 회개했을 때 마음이 상쾌해지고 기쁨이 솟아납니다.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길 때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이런 기쁨을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혼란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개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개는 애완견이 아니라 들개입니다. 들개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토한 것을 먹습니다. 마음대로 부끄러운 짓을 합니다. 사납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몸을 상해하는 자들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어도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형식은 그럴싸한데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외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고,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간음을 행하고 도둑질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은 도둑질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합니다. 참된 할례자는 성령의 힘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선을 행합니다. 성령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합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 남편을 자랑하듯이 어디가든지 사랑하는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정통 신자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자랑이 배설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바울은 그들보다 자랑할 것이 더 많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이란 상업 용어로서 이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어찌하든지 지키고자 하고 손해가 되는 것은 빨리 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은 최선의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좋은 것들도 아낌없이 버립니다. 어중간하게 아는 사람들만이 다 가지려고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발견했습니다. ‘가장 고상하다’는 것은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이란 모든 지식의 원천이 되는 지고의 지식을 말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까?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시는 참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기묘한 모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알고 이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는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의 근본 인생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파멸시키는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줍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삶의 참된 의미와 가치와 방향과 목적을 제시해 줍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고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담겨져 있습니다(골 2:2,3).

  저는 학생 시절에 최신 기술과 지식을 갖춘 항공기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대학도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저에게 이 길은 일생 비행기 연통 쑤시는 삶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제트엔진을 수리하고 만드는 일이 내가 일생동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삶이 너무 허무하고 무의미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부터 하나님과 자신과 역사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학창 시절에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전공 공부보다 성경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했고 그를 아는 일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의 마음을 아시고 일생 목자로 살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세상 지식도 배워야 합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한계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생들은 취직을 위한 공부에는 열심을 내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는 마음의 소원이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a)”라고 탄식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습니다. 왜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세울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 의가 없으면 세상에서 어떤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도 벌거숭이가 되어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영원히 타는 불 못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발견될 때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 의는 율법을 행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대해 알고자 했습니다. “I want to know Christ.” 그는 먼저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앎이 아니요, 실제 생활 속에서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고 싶어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는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되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상, 그의 아름다운 생애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 그의 온유, 그의 사랑, 그의 인내, 그의 섬김, 그의 자기 비움, 그의 비전과 일하는 방식 등등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그를 알기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 안에 자신이 예수님 안에 산다고 고백했습니다(갈2:20).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신자들은 그의 신부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양육하고 제자로 훈련하면서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그가 에베소를 개척할 때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눈물과 겸손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목자 생활은 일주일에 한 번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인 것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면서 제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되, 부분적으로 알고자 하지 않고 전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상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의 절정인 그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알고자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부활의 생명력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맛보기를 원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을 보면 그는 불사조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는 당시 소아시아에 복음을 편만하게 증거했습니다. 그는 중요한 도시마다 개척하고 리더들을 세워서 교회를 이끌어가게 했습니다. 그의 선교 사역은 정말 눈부신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그의 이런 결과는 그의 삶에서 부활의 권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이 부활의 권능으로 충만한 그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이 한번 뿐인 인생을 정말 가치 있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부활의 권능을 가진 삶을 살게 된 이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는 삶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0b,11)”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자진해서 고난을 받고자 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있는 문제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자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거창한 고난을 당하지 않지만 일상적인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먼저 섬기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불평하기보다 침묵하고, 때로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견디는 것도 작은 고난입니다. 높임 받고, 인정 받고, 세상의 것을 다 누리고 싶은 욕심을 죽이고, 자존심을 죽이는 것도 예수님의 고난을 배우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여 노동하며 땀을 흘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극복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죄에는 쾌락이 있기 때문에 이를 부인하는 것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고난을 감당할 때 거룩함에서 오는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몇 사람을 일대일 성경 공부로 섬기고자 할 때 고난이 따릅니다. 시간을 맞추고, 말씀을 준비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또한 양으로 인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애가 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크고 작은 고난들을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감당할 때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얻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스탭목자요 UBF 대표로 헌신하고 은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퇴한 후에 지금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짐바브웨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400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자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 200명을 뽑아서 한국어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충만한 증거입니다. 그의 노년은 우리 후배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캠브리지 세븐 중에 한 사람인 챨스 스터드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열정적이 될 필요가 있다. 해가 갈수록 더 열정적이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해가 갈수록 열정적이 되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 하고,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해서는 그를 알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소원은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갑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진리의 하나님! 영원한 사랑으로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소서. 많은 것들을 읽고 듣는 것에 지쳤습니다. 바라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온갖 선생들을 잠잠하게 하소서. 만물이 당신 앞에 겸허히 침묵하게 하소서. 제게 자세히 말씀하소서!”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삶 속에서 그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기쁨이 우리의 삶 속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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