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013년 빌립보서 4강(2:12-30) 너희 구원을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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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4 강
말씀 | 빌립보서 2:12-30
요절 | 빌립보서 2:12,13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자기 비움, 섬김과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배울 때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공동체가 하나 되는 일에 힘쓰는 것과 동시에 각자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힘써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마음을 쓰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투쟁할 때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성숙하게 되고 교회는 평안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의 구원을 완성해 나갈 수 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남을 원망하고 시비를 붙이기보다 먼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할 때 좁은 의미로는 칭의 즉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로 구원은 칭의와 함께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서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엡4:13).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지극히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은 너희는 – 땅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벧후 1: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에서 이루라는 헬라어 동사는 ‘카테르가제스테’인에 이 단어의 어원은 노력+애씀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애를 쓰고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데에는 원대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이유는 그들을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으사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이 있었습니다. 다 같이 15,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즉 하나님께 반발하고 대적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합니다. 거룩함보다는 음란을 더 사랑합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물질과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소망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흠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들로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크고 값진 소원을 영접하게 될 때 우리는 기쁨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일은 나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성령께서 친히 행하고 계십니다. 즉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셔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죄의 소원을 심고 죄를 짓게 하고 멸망에 이르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거룩한 소원을 주셔서 그 소원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 형제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 양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말씀을 전하고 싶은 소원이 샘솟게 하십니다. 이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자기의지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아갈 때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8절에 보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이것을 깊이 체험한 사도 바울은 빌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바울은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섬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까?
첫째,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 같이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된 근본 이유는 아담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순종의 사람으로 키우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이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복종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이란 하나님을 떠난 데서 오는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존경하는 데서 오는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신앙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자기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겸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데서 자라야 합니다. 매주 주시는 주일 말씀에, 매일 주시는 일용할 양식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둘째, 원망과 시비를 없애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다 같이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하는 것은 불평하는 것입니다. 시비는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사람을 불신하는 데서 옵니다. 교만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원망의 마음을 가지도록, 불평하는 말을 하도록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항상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걸며 싸우는 정욕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것이 마귀가 부추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평이 올라오거나 시비걸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얼른 회개하고 죄의 싹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힘있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을 살 때 이 부패하고 어두운 시대에 별과 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순전하고 흠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모임 가운데서도 은혜를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셋째,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는 헌신의 자세를 배워야만 합니다. 다 같이 17,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이 말씀에서 자신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투쟁을 했는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전제는 제물을 바치고 마지막에 그 위에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의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자신을 전제로 부어드리겠다고 했으니 자신의 모든 것 즉 자신의 피라도 부어서 주님께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를 그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너희도 나와 함께 기뻐하고 기뻐하라’, ‘기쁨’이란 단어가 4번이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신앙생활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서 오는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자기 것을 꾸리고, 자기를 위해서 재산과 명예와 인기를 쌓아두는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기쁨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드리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가 지극히 값진 향유를 깨서 주님께 부어 드린 것처럼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깨서 주님께 쏟아 부어 드릴 때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 구원을 이루리라’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해 모든 것을 쌓고자 하는 자들은 결국 솔로몬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바울은 ‘기쁘다’는 말을 4번이나 반복했는데, 솔로몬은 ‘헛되다’는 말을 4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그만큼 많은 재물과 지식과 처첩들을 쌓아 둔 자가 없었지만 결국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쏟아 부어 드리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늘의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또한 하늘에서 상급이 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온전히 헌신된 두 사람의 동역자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디모데요 또 하나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힘있게 선교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원인도 훌륭한 선교 동역자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바울과 한 마음이 되어 빌립보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무엇이든지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아주 성격이 다른 사람입니다. 바울이 강한 추진력을 가지고 일하는데 비해 디모데는 조용하게 뒷감당을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음으로 동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데 디모데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바울과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 복음의 투사로 연단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다른 일꾼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복음사역을 던지고 가버렸을 때에도, 주님의 일을 섬기고자 여러 가지 환란과 시험 가운데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앞장섰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지 못하는 대신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고자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를 섬기던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의 추천을 받아 감옥에 갇힌 바울을 섬기기 위해서 로마에 왔습니다. 그는 바울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자신이 병이 나서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섬겼습니다. 바울은 에바드로디도에게 형제애와 함께 동지애를 느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에서 로마까지 긴긴 여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겠습니까? 로마에 가서 옥에 갇힌 바울을 섬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바울을 섬겼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바울의 마음은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전달되었고 그들도 심히 근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가 나음을 입게 되자 바울은 급히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그 편에 이 빌립보서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고 자신의 근심도 덜려하였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이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존귀하게 여깁니까? 돈을 많이 번 사람을 존경합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존경합니까? 아름다운 사람을 존경합니까? 누구를 존경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물질을 드리고 사랑의 수고를 하는 분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이 이런 분들에게 임하고 또 이런 분들을 통해서 생명의 풍성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일이란 바울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고 그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주의 종에 대한 동역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마음에 모든 원망과 불평의 쓴뿌리를 제거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의 연단을 받아야만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자기를 꾸리기보다 주님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자세를 배워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우리 속에 진정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또한 죄악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한 자들로 주님의 영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섭리를 영접하고 구원을 이루기까지 힘써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빌립보서 2:12-30
요절 | 빌립보서 2:12,13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자기 비움, 섬김과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배울 때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공동체가 하나 되는 일에 힘쓰는 것과 동시에 각자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힘써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마음을 쓰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투쟁할 때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성숙하게 되고 교회는 평안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의 구원을 완성해 나갈 수 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남을 원망하고 시비를 붙이기보다 먼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할 때 좁은 의미로는 칭의 즉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넓은 의미로 구원은 칭의와 함께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서 거룩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엡4:13).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지극히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은 너희는 – 땅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벧후 1: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에서 이루라는 헬라어 동사는 ‘카테르가제스테’인에 이 단어의 어원은 노력+애씀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애를 쓰고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데에는 원대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이유는 그들을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으사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이 있었습니다. 다 같이 15,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입니다. 즉 하나님께 반발하고 대적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합니다. 거룩함보다는 음란을 더 사랑합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물질과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소망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흠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들로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크고 값진 소원을 영접하게 될 때 우리는 기쁨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충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일은 나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성령께서 친히 행하고 계십니다. 즉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셔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사탄은 죄의 소원을 심고 죄를 짓게 하고 멸망에 이르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거룩한 소원을 주셔서 그 소원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 형제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 양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말씀을 전하고 싶은 소원이 샘솟게 하십니다. 이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자기의지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아갈 때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8절에 보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이것을 깊이 체험한 사도 바울은 빌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바울은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섬겼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까?
첫째,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다 같이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탄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된 근본 이유는 아담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순종의 사람으로 키우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예수님이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복종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이란 하나님을 떠난 데서 오는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존경하는 데서 오는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신앙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자기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겸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데서 자라야 합니다. 매주 주시는 주일 말씀에, 매일 주시는 일용할 양식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둘째, 원망과 시비를 없애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다 같이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원망하는 것은 불평하는 것입니다. 시비는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사람을 불신하는 데서 옵니다. 교만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원망의 마음을 가지도록, 불평하는 말을 하도록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항상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걸며 싸우는 정욕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것이 마귀가 부추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평이 올라오거나 시비걸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얼른 회개하고 죄의 싹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힘있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을 살 때 이 부패하고 어두운 시대에 별과 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순전하고 흠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한 모임 가운데서도 은혜를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셋째,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는 헌신의 자세를 배워야만 합니다. 다 같이 17,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이 말씀에서 자신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투쟁을 했는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치는 믿음의 제사와 제물을 위해서라면 나는 그 위에 내 피라도 쏟아 부을 것이며, 그것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전제는 제물을 바치고 마지막에 그 위에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의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자신을 전제로 부어드리겠다고 했으니 자신의 모든 것 즉 자신의 피라도 부어서 주님께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를 그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너희도 나와 함께 기뻐하고 기뻐하라’, ‘기쁨’이란 단어가 4번이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신앙생활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서 오는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자기 것을 꾸리고, 자기를 위해서 재산과 명예와 인기를 쌓아두는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기쁨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드리는 데 있습니다. 마리아가 지극히 값진 향유를 깨서 주님께 부어 드린 것처럼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깨서 주님께 쏟아 부어 드릴 때에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 구원을 이루리라’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해 모든 것을 쌓고자 하는 자들은 결국 솔로몬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바울은 ‘기쁘다’는 말을 4번이나 반복했는데, 솔로몬은 ‘헛되다’는 말을 4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그만큼 많은 재물과 지식과 처첩들을 쌓아 둔 자가 없었지만 결국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쏟아 부어 드리면 허무하지 않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늘의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또한 하늘에서 상급이 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온전히 헌신된 두 사람의 동역자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디모데요 또 하나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힘있게 선교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원인도 훌륭한 선교 동역자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바울과 한 마음이 되어 빌립보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무엇이든지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아주 성격이 다른 사람입니다. 바울이 강한 추진력을 가지고 일하는데 비해 디모데는 조용하게 뒷감당을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음으로 동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데 디모데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바울과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 복음의 투사로 연단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다른 일꾼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복음사역을 던지고 가버렸을 때에도, 주님의 일을 섬기고자 여러 가지 환란과 시험 가운데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앞장섰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지 못하는 대신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고자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를 섬기던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의 추천을 받아 감옥에 갇힌 바울을 섬기기 위해서 로마에 왔습니다. 그는 바울을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자신이 병이 나서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섬겼습니다. 바울은 에바드로디도에게 형제애와 함께 동지애를 느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에서 로마까지 긴긴 여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겠습니까? 로마에 가서 옥에 갇힌 바울을 섬기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바울을 섬겼습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바울의 마음은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전달되었고 그들도 심히 근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가 나음을 입게 되자 바울은 급히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그 편에 이 빌립보서를 보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고 자신의 근심도 덜려하였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이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존귀하게 여깁니까? 돈을 많이 번 사람을 존경합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존경합니까? 아름다운 사람을 존경합니까? 누구를 존경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물질을 드리고 사랑의 수고를 하는 분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이 이런 분들에게 임하고 또 이런 분들을 통해서 생명의 풍성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일이란 바울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고 그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주의 종에 대한 동역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마음에 모든 원망과 불평의 쓴뿌리를 제거하고 감사함으로 믿음의 연단을 받아야만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자기를 꾸리기보다 주님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는 자세를 배워야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우리 속에 진정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또한 죄악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한 자들로 주님의 영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섭리를 영접하고 구원을 이루기까지 힘써 투쟁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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