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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빌립보서 3강(2:1-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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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69회 작성일 13-08-1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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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3 강
말씀 | 빌립보서 2:1-11                                       
요절 |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 교회는 여러모로 훌륭한 교회였지만 내부적인 갈등이 있었고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빌립보 성도들에게 바울은 한 마음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 삶을 함께 나눕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은혜를 받습니다. 성도의 교제 속에서 위로를 얻고 진실한 우정을 나눕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교훈과 기도는 곧 “하나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각자 다르고 개성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큰 소리를 내면서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조용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을 해도 CCM을 해야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요즘 CCM은 너무 빨라서 따라 하기 힘들다면서 찬송가를 해야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양회를 위해서 설문 조사를 하면 생각들이 다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힘써야 할 점 네 가지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성도가 하나 되는데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 안에서의 교제, 긍휼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권면은 헬라어로 파라클렙시스로서 ‘곁으로+부르다’라는 합성어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권면할 때는 곁으로 불러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형제가 낙심에 빠졌을 때 곁으로 불러서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낙심에 빠져있는데 무관심하거나 죄에 빠졌을 때 방치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할 때 듣는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권면’만 해서는 안 되고 사랑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위로’란 단어의 본래적인 뜻은 ‘사랑의 부드러운 설득’을 말합니다. 때로는 바른 말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사랑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화를 내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속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를 녹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의 위로입니다. 그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하면서 위로할 때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교제를 하는데 인간적인 교제가 아니라 성령과 함께하는 교제를 해야 합니다. 본문에 ‘성령의 무슨 교제’라고 했는데 이는 ‘성령과 함께 하는 교제’(fellowship with the Spirit), 혹은 ‘성령의 통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를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소감을 나누고 기도하는 모임을 통해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사실 이런 모임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주님께서 이런 모임 속에 함께 하시며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갑니다.

  우리가 교제를 할 때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긍휼이나 자비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형제의 허물과 죄를 볼지라도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면 다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게 됩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 있는 모습 그대로 감당해주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다툼’이란 ‘selfish ambition’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로 경쟁하거나, 자기고집만 주장할 때 다툼이 생깁니다. 이기심에 기초한 다툼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허영’이란 ‘헛된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알맹이 없이 겉을 치장하는 것입니다. 내용보다 더 크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은 근본적으로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은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데서 온 것입니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죄악의 근원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무서운 죄입니다. 인간들의 내면에는 교만이 뿌리 깊이 박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자신의 교만을 예수님의 피 앞에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그는 늘 교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인간 관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겸손할 때 교회의 문제가 해결 됩니다. 진정한 겸손은 나를 우습게 여기고 나를 비하하면서 다른 사람을 높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며 섬기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우리 신자들은 먼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남에게 폐를 안 끼치고 부담을 안 주고 자기 일을 잘 하면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의 공동체에서는 50점밖에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고 요구만 하다면, 하나 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의 상처와 아픔이 크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동역자의 상처와 아픔은 얼마나 더 클까? 생각하고 남의 일을 돌아보면 나뉘었던 마음이 하나 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한 가지 고통이 있다면 그들의 분열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든지 분열을 없애고 하나를 이룸으로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결국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가장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는 것에, 성공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첫째, 겸손입니다. 우리 죄인들과 하나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디까지 낮아지셨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자기 목숨을 포기하셨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무엇입니까? 겸손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진정한 낮아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겸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합니다. 내 마음에 무엇을 품었는가에 따라서 행동이 나오고 인격이 형성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품으면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원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교만을 넣고자 하고 음란한 생각을 넣고자 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넣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4:23절에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오직 너의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날마다 예수님을 배워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겸손의 왕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때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처럼 영광스러운 존재의 상태를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이는 군대에서 대장이 이등병이 되는 것보다 더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사람이 개미가 되는 것보다 더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자기를 비워’를 영어로 보면 ‘made himself nothing’입니다. 이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었지만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와 사탄의 독소에 찔려 신음하며 죽어가던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지 못합니다. 누가 나를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취급하는 것 같으면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언젠가 똑 같이 갚아주리라’ 생각하며 마음에 칼을 갈게 됩니다. 나의 인간 조건 때문에 무시 받는 것이라 생각하며 어찌하든지 인간 조건을 개선해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자 생활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삶입니다. 목자 생활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존심을 포기하는 삶입니다. 목자 생활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낮아지는 삶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자 생활 하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섬겼는데~’ 되새기면 자기를 비우기가 어렵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섬김과 사랑을 몰라주고 교만하게 굴 때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예수님처럼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계속해서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인간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까지 낮아지시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신 예수님의 비움을 배울 때만이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가정교회로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종이 되어 섬기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는 종으로서 폼만 잡은 것이 아니라 종의 마음을 가지셨고, 실제로 종처럼 낮아져 죄로 냄새나는 인간들을 섬기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는 시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사람은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모임이 있는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모임에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이 있는데도 육신을 사랑하여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 일에 파묻혀 잊어버립니다. 세상 일에 몰두하여 시간과 힘을 다 쏟다보니 주님을 섬길 시간과 힘이 없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 모임에도 갈수록 선데이 크리스천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즉 겸손, 자기 비움, 섬김 위에 죽기까지 복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복을 받고 성공하고 싶고 자기 성취를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고 섬기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여러분은 언제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먹고 마실 권리,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롭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고전9:19). 그가 모델로 삼은 예수님의 겸손은 인간적인 겸양의 미덕을 훨씬 넘어섭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복종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해서 절대적인 자세로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일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흉악범으로 취급되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죽음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신 섬김과 순종으로 우리의 가치관, 인생관이 바뀌고 주님을 같이 닮아가는 영적인 축복과 삶의 분명한 방향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마음을 너희 속에도 거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자아를 죽이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에 영접함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주장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진정 겸손할 수 있고 자기를 비울 수 있고, 섬길 수 있고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지극히 높으신 이름. 자기를 비우고 종이 모습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 예수님을 하나님은 높이시되 어느 정도까지 높이셨습니까? 9-1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을 무덤에 묻힌 지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엡 1:21,22).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인간들이나 지하에 잠든 모든 자들 곧 모든 피조물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전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그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수많은 귀신들을 내쫓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로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죄로 고통하던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고 뛰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모든 왕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고, 죽은 자들, 천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때 응답해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높이 되고자 애를 썼을 때, 제자들과 경쟁하며 뼈가 썩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웠을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마더 배리 선교사님은 매우 겸손하십니다. 그는 고이사무엘 선교사님과 함께 UBF를 세우셨지만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비서와 같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리더들이 자라서 일을 감당할 때 자신의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뒤로 물러가서 일대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 분을 높이셨습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돌아가시자 2대 세계 총재가 되어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이 분은 은퇴하신 후에도 일주일에 12팀 이상의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비우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될 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고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존귀히 여겨 주시고 나를 높여 주십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를 풍성히 맛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겸손함에서 자라고자 적극적으로 투쟁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고 일하고 있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것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자기 비움과 섬김과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을 배워서 가정이 하나가 되고, 요회가 하나가 되고,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로 학생들을 섬기고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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