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 2강(1:19-30)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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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제 2 강
말씀 | 빌립보서 1:19-30
요절 | 빌립보서 1:20,21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요즘 대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의 간절한 소망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안정된 직장에 취직을 하는 것입니다. 또 빨리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평범한 소원 외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가진 학생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파스칼은 20대에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세웠고 그 이후에는 실천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왜 살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분명할 때 그 인생은 참으로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존귀케 하고자 하는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가진 사도 바울의 신앙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는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 전파의 진전을 이루었다는 기쁜 소식도 들었습니다. 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시련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신자들이 고난에 처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훈련을 잘 받으면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에게 그 원인을 돌리거나, 고난을 피하려 하면 그야말로 고생만 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5:3,4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격의 연단을 받아서 성숙한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생 크고 작은 시련들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고쳐나가는 가운데 영적인 성숙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없이 위대한 인생을 산 인물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위대성은 얼마나 고난을 극복하고 선한 열매를 맺었는가로 나타납니다. 모든 인생이 고난을 겪기 때문에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큰 감동을 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이긴 것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동역자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하고 또 그들의 중보기도로 인해서 감사를 표합니다. 또 성령은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 내주하시면서 도우십니다. 우리에게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내 속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바울은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자기 자랑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를 깊이 이해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겸손하였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채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체가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입니다. 또 매를 맞고, 습기가 차고 차가운 바닥에서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빨리 감옥에서 나가기를 소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합니다. 그를 감옥에 결박해 쳐 넣은 로마의 권력도 그를 부끄럽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의 비방도 그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려고 합니다. 21절도 보십시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생사관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사울과 다윗의 인생관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기념비를 세워 자기 이름을 보존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지만 그 명령에 불순종하여 살찌고 기름진 가축들은 살려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그를 버리셨다고 하자 백성들 앞에서 자기 이름을 높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으면 눈물로 통회자복해야 마땅하지만 자기 영광을 지키려고 합니다. 또한 전쟁 후에 자매님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는 말을 듣고 다윗에 대한 시기심이 발동하여 일생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기의 영광, 자기의 왕권을 지키는데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자신과 아들까지 죽음에 내몰리게 하고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는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가서 골리앗의 꼴통을 부수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종이라는 생각 때문에 도망자로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도망을 갈 때 시므이가 모욕적인 언사를 지껄입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아비새가 그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당장 건너가서 이 죽은 개의 머리를 베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을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말합니다(삼하 16:9-13). 그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시편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시32:11).”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고 산 다윗을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귀하게 쓰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인생 목적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자기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본래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배우기 위해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신으로 인해서 절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며 탄식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는 신자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까지 가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고 기독교를 박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수년 동안 말씀을 다시 공부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음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그가 바나바와 합심해서 안디옥에 가서 성경을 가르치고 수많은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고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동기요 목적이요 힘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인생목적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서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제자 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하여 열매를 맺고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또 이 일을 하다가 지치고 상처받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선교사로서 그런 삶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께 드려졌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미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결국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24).”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삼층천을 다녀왔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을 위해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고자 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는 일입니다. 그는 성도들과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자랑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복음전파와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자신의 평안보다는 양들의 유익과 행복을 더 앞세우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닮은 목자였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인데 병자를 고치면 현장범으로 고소하고자 엿보고 있었고, 그 회당에는 오른 손이 말라붙은 장애인이 무리 중에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악한 의도를 다 아셨으나 목숨을 걸고 그 불쌍한 한 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도 자기 목숨을 온전히 희생하여 대속물로 주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목자 상을 배워 나의 평안보다 양들의 유익과 행복을 더 앞세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삶에 기쁨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어떻게 생활하기를 원합니까? 27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어떤 삶일까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잘해서는 안 되고 팀웍을 이루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신앙이 중요하지만 신앙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양치는 것도 혼자서 하기는 어렵지만 함께 하면 훨씬 수월합니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너를 보면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어진다’고 말한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엡4:2,3). 골로새서 3장에서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2-17).”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의 공동체가 일심으로 협력할 때 대적하는 자들을 막고 복음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탄은 복음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사탄은 조금이라도 틈새가 보이면 두려움을 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 어떤 대적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서 대적하는 자들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자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담대함을 갖는 것은 원수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거입니다. 이 믿음의 용기와 담대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마음에 조각되고,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소망을 두고 살았을 때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뿐인 인생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께 미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 열 명만 있어도 홍대는 뒤집어 질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 때 예수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은혜와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에게 인생을 걸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 비밀을 간직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빌립보서 1:19-30
요절 | 빌립보서 1:20,21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요즘 대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의 간절한 소망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안정된 직장에 취직을 하는 것입니다. 또 빨리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평범한 소원 외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불태울 수 있는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가진 학생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파스칼은 20대에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세웠고 그 이후에는 실천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왜 살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분명할 때 그 인생은 참으로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존귀케 하고자 하는 분명한 인생 목적을 가진 사도 바울의 신앙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는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 전파의 진전을 이루었다는 기쁜 소식도 들었습니다. 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시련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신자들이 고난에 처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훈련을 잘 받으면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에게 그 원인을 돌리거나, 고난을 피하려 하면 그야말로 고생만 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5:3,4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격의 연단을 받아서 성숙한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생 크고 작은 시련들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고쳐나가는 가운데 영적인 성숙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없이 위대한 인생을 산 인물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위대성은 얼마나 고난을 극복하고 선한 열매를 맺었는가로 나타납니다. 모든 인생이 고난을 겪기 때문에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큰 감동을 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이긴 것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동역자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하고 또 그들의 중보기도로 인해서 감사를 표합니다. 또 성령은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 내주하시면서 도우십니다. 우리에게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내 속에서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바울은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자기 자랑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 세계를 깊이 이해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겸손하였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채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체가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입니다. 또 매를 맞고, 습기가 차고 차가운 바닥에서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또 빨리 감옥에서 나가기를 소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합니다. 그를 감옥에 결박해 쳐 넣은 로마의 권력도 그를 부끄럽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를 중상모략하는 자들의 비방도 그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그리스도를 존귀히 되게 하려고 합니다. 21절도 보십시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생사관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사울과 다윗의 인생관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기념비를 세워 자기 이름을 보존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지만 그 명령에 불순종하여 살찌고 기름진 가축들은 살려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그를 버리셨다고 하자 백성들 앞에서 자기 이름을 높여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으면 눈물로 통회자복해야 마땅하지만 자기 영광을 지키려고 합니다. 또한 전쟁 후에 자매님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는 말을 듣고 다윗에 대한 시기심이 발동하여 일생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기의 영광, 자기의 왕권을 지키는데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자신과 아들까지 죽음에 내몰리게 하고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그는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나가서 골리앗의 꼴통을 부수고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종이라는 생각 때문에 도망자로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도망을 갈 때 시므이가 모욕적인 언사를 지껄입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아비새가 그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당장 건너가서 이 죽은 개의 머리를 베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을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말합니다(삼하 16:9-13). 그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시편을 보면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시32:11).”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고 산 다윗을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귀하게 쓰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인생 목적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자기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본래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배우기 위해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신으로 인해서 절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며 탄식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따르는 신자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까지 가서 신자들을 잡아들이고 기독교를 박멸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수년 동안 말씀을 다시 공부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음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그가 바나바와 합심해서 안디옥에 가서 성경을 가르치고 수많은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고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자 힘썼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동기요 목적이요 힘이요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인생목적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오대양 육대주로 나아가서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제자 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하여 열매를 맺고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또 이 일을 하다가 지치고 상처받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선교사로서 그런 삶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께 드려졌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미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결국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친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24).”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삼층천을 다녀왔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을 위해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고자 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는 일입니다. 그는 성도들과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자랑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복음전파와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 감사를 표합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자신의 평안보다는 양들의 유익과 행복을 더 앞세우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닮은 목자였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인데 병자를 고치면 현장범으로 고소하고자 엿보고 있었고, 그 회당에는 오른 손이 말라붙은 장애인이 무리 중에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악한 의도를 다 아셨으나 목숨을 걸고 그 불쌍한 한 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도 자기 목숨을 온전히 희생하여 대속물로 주신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목자 상을 배워 나의 평안보다 양들의 유익과 행복을 더 앞세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삶에 기쁨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어떻게 생활하기를 원합니까? 27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어떤 삶일까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만 잘해서는 안 되고 팀웍을 이루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 신앙이 중요하지만 신앙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양치는 것도 혼자서 하기는 어렵지만 함께 하면 훨씬 수월합니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너를 보면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어진다’고 말한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엡4:2,3). 골로새서 3장에서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2-17).”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의 공동체가 일심으로 협력할 때 대적하는 자들을 막고 복음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섬기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탄은 복음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사탄은 조금이라도 틈새가 보이면 두려움을 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 어떤 대적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서 대적하는 자들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자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담대함을 갖는 것은 원수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거입니다. 이 믿음의 용기와 담대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큰 은혜요 특권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마음에 조각되고,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소망을 두고 살았을 때 남는 것은 허무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뿐인 인생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께 미친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 열 명만 있어도 홍대는 뒤집어 질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한 때 예수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은혜와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그에게 인생을 걸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 비밀을 간직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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