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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서 2017년 벧후1강(1:1-21)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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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2회 작성일 17-02-05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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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베드로후서 제 1 강
말씀 | 베드로후서 1:1-21                                       
요절 | 베드로후서 1:4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탐욕과 정욕의 종된 삶을 살게 되고 거짓 선생들은 이것을 합리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처음부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품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지녀야 할 인격으로서 제자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좋은 품성을 기르려면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알려면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당시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인격적인 매력을 지닌 사람들이 될 때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고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두 번째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을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편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바랍니다. 그는 편지의 끝에서도 오직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가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 때 거짓된 교리에 미혹을 받지 않고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여기서도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앎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의 진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꿀과 같이 단 맛을 느끼며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믿는 자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큰 약속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스럽고 영원한 삶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한 몸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죄와 죽음과 슬픔과 눈물이 없습니다. 허무한 것도 없습니다. 삶의 환희를 누리며 성도들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귀한 약속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세상 정욕을 피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악된 본성을 타고 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대속하셨습니다. 깨끗하게 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함에 이르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오해합니다.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성장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소원과 열정이 없이 구원 받은 것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과거에 육신의 정욕 때문에 세상의 썩어질 것을 따라 살던 우리가 감히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아, 현실적인 부를 축적하고 인생을 즐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면 안 됩니다. 세상 정욕과 욕망을 벗어버리고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여기에 참된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믿는 우리가 힘써 더 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5-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 더해야 할 덕목들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힘써야 할 요소입니다(make every effort to add). 이런 신앙적 덕을 쌓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럼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얻어지는 선물(엡2:8,9)이며 출발점입니다 (롬5: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10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은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내일 죽어도 영생을 얻는다는 확신이 중요합니다. 이는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분명해야 고난과 환난 속에서 흔들림이 없이 영적인 투쟁을 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쏘아대는 불화살을 막아내는 방패는 바로 이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다가 죄를 지을 수 있고 시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회개하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 믿음이 있어야 넘어져도 바로 오뚝이같이 일어서서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앞에는 넘어서야 할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불가능에 도전해야 합니다.

  세일즈맨의 전략보고서에 따르면 한번 전화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48%, 두 번 전화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25%, 세 번 전화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15%였습니다. 세일즈맨의 88%가 1-3통의 전화 후에 판매를 포기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2%의 세일즈맨은 상대방이 상품을 구매할 때까지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 판매를 성립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들 12%가 전체 매출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열 번, 백 번, 천 번이라도 찍고 또 찍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포기할 권리는 없습니다. 포기는 패배자의 항변일 뿐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포기하는 대신에 믿음으로 도전해야겠습니다. 양적 변화가 있어도 질적 변화가 뒤따라옵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열매를 맺는 것이나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도 믿음으로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둘째, 덕입니다. 덕은 사람을 품고 섬기는 내면성을 말합니다. 또한 도덕적 선행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덕성이 결여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있지만 연약한 사람, 고통하는 사람,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공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덕이 있으려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덕스러운 사람이 될 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때로는 손해도 보고, 때로는 오래 참아줍니다. 덕은 나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도 용서하고 계속해서 섬기는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주님께 하듯 복종함으로 신자의 덕을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덕입니다. 장군 중에서도 용장보다 덕장이 더 강합니다.

  셋째, 지식입니다.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덕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품어주고 감당해 주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오고 이단들이 모략을 구사하는데 다 관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에서 다 믿어주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다가 사기를 당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식은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덕이 있으면서도 지식이 있어야 인간미와 함께 날카로운 지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지식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을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을 추구하고 겸손하게 끊임없이 배웁니다. 우리 신자들은 끊임없이 공부를 해서 이 시대를 분별하고 합당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매우 복잡합니다. 덕에 지식을 더함으로 균형잡힌 신앙생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는 절제입니다. 절제는 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에도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식에 절제를 더할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절제없는 지식은 무지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여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 9:19). 벧전 2:16절은 “너희가 자유하나 그 자유를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처럼 행동하는데 쓰라”고 했습니다. 내가 자유롭지만 그 자유 때문에 형제가 실족할 것 같으면 그 자유를 영원히 쓰지 않겠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고전 8:9,13). 예수님은 사람의 요구보다 늘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욕과 욕심은 끊임없이 기회를 틈타고 올라옵니다. 그러나 절제는 죄의 소욕을 다스리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합니다.

  미국의 권투 왕 조 루이스는 더 이상 적수가 없을 정도로 최강의 선수였습니다. 어느 날 루이스와 친구가 차를 타고 여행을 가던 길에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게 되었습니다. 이 탓에 뒤따라오던 차가 루이스의 차를 살짝 들이받는 사고가 났습니다. 뒤 차 운전자는 차에서 내리더니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며 욕을 했습니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라고, 운전 하나 제대로 못해?” 운전자는 당장에라도 싸울 기세로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이를 본 친구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하고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루이스가 대신 해결하겠다며 운전자에게로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험악한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친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루이스가 차를 급하게 멈춘 사정을 차분하게 설명하고는 운전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이 아닙니까? 온화하고 침착한 모습의 루이스를 보고 부끄러운 마음이 든 운전자는 얼른 자기 차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친구는 루이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생트집을 부리며 소란을 피우는 저자에게 주먹을 한방 날려주지 그랬냐?” 루이스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만약 사람이 파바로티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치세. 그렇다고 파바로티가 그 자에게 고성을 지르며 상대할까?” 화는 인간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감정이지만 절제하지 못하면 문제와 갈등이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속상한 일을 당하더라도 온화하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다섯째, 인내입니다. 절제가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통제하는 힘이라면 인내는 외부적인 압력을 견디는 힘입니다. 인내는 시련과 핍박을 받아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를 얻기까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그 백성을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적어도 4천년을 참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고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들고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의 인내로 너희의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1:19). 제자 양성은 더디고 양과 자녀는 잘 변화되지 않고 자신도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 속에서 인내라는 신의 성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엄홍길 산악인은 가장 높은 산 16등좌에 성공했습니다. 그에게 왜 그렇게 힘든 산에 오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극한의 고난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됩니다. 또 주님이 오실 그날을 소망하며 참고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아도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여섯째는 경건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깊은 인식 가운데 겸손과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절제도 잘하고 인내도 잘하는데 경건하지 않으면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또 경건하지 않으면 위선자가 됩니다. 사람 앞에서 비춰지는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릅니다. 간혹 유명한 영적 지도자가 부끄러운 죄에 빠져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사역을 떠나는 경우를 봅니다. 경건을 추구하지 아니하면 그는 끝까지 영적 리더로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의 지식과 절제와 인내는, 인간성이 강한 사람이 자기 영광을 구하고 위선을 떠는 쇼맨십일 수 있습니다. 경건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도와줍니다.

  일곱째, 형제우애입니다. 믿음부터 경건까지는 개인신앙에 관련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나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면 되지 다른 사람이야 내가 관여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이 이웃과 사회와 동떨어져서 나의 영성만 키우고자 하는 방향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홀로 하는 신앙생활이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개인의 경건은 반드시 공동체를 돌보는 형제우애로 발전해야 합니다. 형제우애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경건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도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돌봅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그의 이웃을 생각하고 교회 공동체를 돌보며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쓰임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조건없는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앙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것으로 이르러야 합니다. 사랑은 앞에 말한 모든 덕목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하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13:2). 예수님도 율법의 모든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장하는 신자는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지난 시간에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수고스럽지만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설거지도 해 주고 섬기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고전 13:4-8).

  이런 덕목들에서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더하라, 더하라, 더하라고 합니다. 더하라는 것은 ‘어떤 덕목은 차원이 낮고 다른 덕목은 차원이 높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한 가지로 자족하지 말고 계속하여 다른 덕목을 쌓음으로써 보다 더 성숙해지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끝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아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성을 맺고 살아가니 됐다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인내를 더하고 절제를 더하고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면서 더 깊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합니다. 모든 덕목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성품에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제 생활, 문제들에 부딪칠 때 생각하고 말하기를 조심하고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게 됩니다. 행동이 쌓이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쌓이면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이 결국은 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힘쓰도록 권면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만 멈추지 말고 더욱 깊이 알아야겠습니다. 부지런히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에 덕을 더하고 사랑에 까지 자라야 멀리 볼 수 있습니다.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근시입니다. 앞에서 배운 신앙의 덕목을 실천하지 않을 때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고 죄 씻음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힘써 투쟁해야 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때 고난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됩니다.
 
  베드로는 형제들이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항상 그들에게 생각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바쁘게 이 세상을 살다보면 진리의 말씀보다는 현실적인 유익을 따라서 움직이기 쉽습니다. 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가르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와 설교자의 일은 우리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본적이고 영원한 진리들을 계속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도전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톰 라이트의 구원론이 교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즉 칭의에 대한 교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다는 선언(칭의)은 신자 전 생애에 걸쳐 마지막 날에 내려진다”고 주장하고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세우는 전가(轉嫁)를 부정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죽어봐야 구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십니다. 
   
  또한 당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늦어지자 사람들이 이를 교묘히 만든 이야기라고 반발하였습니다. 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부인하는 자들도 생겼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되신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17절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또 천사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히 있을 것입니다. 그 때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계산하다가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심고 물질적인 이득을 취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합니까? 19-21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잘 이해가 안 될지라도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주위 사람들의 말에 쉽게 넘어가지 말고 말씀의 의미가 샛별처럼 깨달아지기까지 기도하고 묵상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함부로 자의적으로 성경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다가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모르는 데도 아는 척하다가 잘못 가르치면 더 위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비한 자세를 가지고 대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일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에 힘써서 매력 있는 성품의 소유자들이 될 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고 신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일에 형통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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