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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서 2017년 벧전5강(3:8-4:11)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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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0회 작성일 17-01-2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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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베드로전서 5강 
말씀 | 베드로전서 3:8-4:11
요절 | 베드로전서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을 행하면 칭찬을 받아야 하고 상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누가 선을 행하겠습니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베드로는 역설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신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셨고, 사탄이 지배하던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음으로써 한 사람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뜻은 종합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까지 (2:13-3:7)말씀에서 백성, 사환, 아내, 남편에게 준 구체적 권면을 정리하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형제들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합니다. 피차 고난을 받는 입장에서 형제를 동정하여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난 속에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랑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불쌍히 여기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핍박을 당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다 제 코가 석자가 되어 자기 살기에 급급합니다. 마음이 좁아지고 이기적이 되면 서로 마음을 같이 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상황 속에서 동역자들의 형편을 서로 돌아보고 한 마음이 되라고 합니다. 동정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게 여기고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 고난 가운데서 동역자들을 한 형제요, 한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가족들이요, 함께 영적전투를 감당하는 전우들입니다. 또한 서로 불쌍히 여기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 연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런 약점을 들추고 비판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을 기억하고 동역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겸손입니다. 이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이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남을 높이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동정하면 공동체가 하나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임이 서로의 형편을 돌아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라고 합니까? 우리의 본성은 나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악으로 되갚아 주고 싶습니다. 또 나에게 욕을 하는 자에게 2배, 3배 실컷 욕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본성을 부인하고 우리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우리가 이어 받을 수 있습니다. 이어 받는다는 말은 상속받는다는 뜻입니다. 복은 수고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복을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23:34). 악을 해결하는 방법은 복수가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자지만 아들을 보내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 인간의 죄를 덮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현재의 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은 멀고 험해 보입니다. 때로 손해만 보는 바보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의 방식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또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으며 생명과 좋은 날의 비결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신다고 했습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자초하는 사람들, 악으로 고난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대할 때 이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우리를 해하겠습니까?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입니다(14a).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마5:9,10)”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은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고난에 동참할 때 예수님의 마음과 인격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복은 물질, 명예, 성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얻고 그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내적 축복은 ‘저희가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놀라지 않는 것’입니다(사 8:12). 우리는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악한 세상에서 선을 행하다가 해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비난, 재산과 명예의 손해, 오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자에게 의인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으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시118:6)”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도록 부르셨습니다. 의를 행하고자 할 때 악한 세력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의를 행하면서도 고난을 받을 때 왜 그런 삶을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해야 합니다. 왜 고난을 받으면서도 선을 행하느냐고 의아해 할 때 우리가 가진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믿는 바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성도를 반대하는 사람을 구원 얻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지금은 무지하여 악을 행하지만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변화될지 모릅니다. 그들이 성도를 미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고난 받는 성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자세로 고난을 받는지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내가 가진 소망의 이유를 정성껏 설명해 줄 때 당장 열매가 없더라도 언젠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증거 할 때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이 있다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말고 신앙과 삶을 지켜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지킬 때 결국 반대자, 적대자들을 이기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입니다. 신자의 선한 양심이 거울이 되어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악과 욕을 받을 때 선을 행하는 삶이 악을 이기며 사람을 얻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할 때 교회는 같은 방식으로 싸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절이 성경에 몇 개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살전 4:3,4)”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니 좀 힘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과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을 비교합니다. 우리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은 예수님을 배우고 닮는 고난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나? 남들이 겪지 않는 아픔을 당해야 하나? 어떤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부담 없이 잘 사는데, 나는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생활의 고난, 죄의 고난이 있습니다. 무의미하고 열매가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받는 고난은 아름답고 영광스런 열매가 있습니다. 내면이 성화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더 나은 길(better way)’입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말하는 선을 행하는 것은 국가의 법을 지키고, 사회 질서를 지키고, 통치자에게 순복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복종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 남편에게도 순복하는 것입니다. 악과 욕을 하는 사람에게도 복을 비는 것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도리어 욕을 먹습니다. 직장에서 거룩함을 지키고자 술을 마시지 않고, 2차 3차까지 가지 않을 때 분위기 깨는 사람으로 왕따를 당하고 승진에 불이익을 당합니다. 남들처럼 탈세를 하지 않고 세금을 다 내면서 사업을 하려니 어려움이 많습니다. 까다로운 상사에게 순종하며 산다고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악과 욕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나도 한번 쏘아 붙이면 시원하겠는데 그렇게 못하니 억울합니다. 이처럼 선한 양심대로 선을 행하며 살고자 할 때 크고 작은 고난들이 있습니다.

  선을 행했는데 고난을 받으면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에, 불신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양심을 깨우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18-22절은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함으로 받으신 고난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께서 한 번의 고난으로 모든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의 고난으로 우리가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히9:14). 예수님은 고난으로 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자체가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 선포는 불순종의 영들 앞에서 승리의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던 자들의 영입니다(눅17:27). 왜 노아가 갑자기 나올까요? 노아의 여덟 식구가 ‘물로 말미암아’, 물을 통과해 구원을 얻었는데, 그 물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를 구하는 표인 세례로 해석합니다. 바울도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지난 것을 ‘세례’로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고전10:1). 결국 노아 시대에 물을 통과한 방주가 구원에 이른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성도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거쳐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의 복종을 받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일어난 웅장한 구원의 서사를 통해 성도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위대하고 영원한 승리의 선포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부활과 승귀를 통해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단번의 고난을 통해 일어난 결말은 너무도 웅장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해 슬퍼하고 인상 쓸 때가 많지만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수록 고난에 따르는 삶이 풍성하고 신비한 생명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죽으심을 본받고자 했습니다(빌3:10)

  4장부터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세례 받은 신자가 세상에서의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전쟁터에 있습니다. 죄와 사탄과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고난이 계속되면 이것을 감당하느라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죄와 관계가 청산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죄의 요구와 유혹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죄와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연약해서 넘어질 가능성은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결과로 우리는 과거와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사람의 정욕을 따랐다면 이제는 남은 날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우리가 그들과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합니다. 같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욕을 하고 핍박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죄를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7-9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말세를 사는 성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할 때 고난을 이길 힘을 얻게 되고 죄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말세는 고난이 많아지는 때이니 우리는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의 선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인해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 상처를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살다가는 외롭게 혼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미움의 종노릇을 하면서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거든 얼마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세 네 번 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대접할 때 신자의 공동체는 건강하고 강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각각 받은 은사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고 합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10,11). 하나님께서 내게 은사를 주신 것은 공동체를 섬기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은사는 사용할수록 더 잘 개발이 되고 사용하지 않으면 은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은사를 사용할 때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섬김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종말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섬기는 삶이 올바른 종말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죄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동역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희생없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 속에서 선한 일을 힘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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