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서 2016년 벧전4강(2:11-3:7)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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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베드로전서 4 강
말씀 | 베드로전서 2:11-3:7
요절 | 베드로전서 2:12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부르시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말씀을 전하고 소감을 쓰고 기도하면 다 되는 것입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에서 욕을 먹는 이유는 신자들이 말은 잘 하지만 행실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선한 행실에 힘을 써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행실을 말하는 것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가지라(11-17).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선한 행실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원으로서 성적 욕망, 재산 등 물질적 가치들에 대한 욕망, 세상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존재 속에 휘몰아치는 죄의 힘을 말합니다. 제어한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멀리 하다’, ‘피하다’, ‘끊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8: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3:5절에서도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의 소원을 부인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죄와 피 흘리기 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도망을 치듯이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더 잘 살아보고자 욕심을 내기보다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선한 행실에 힘쓰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행실은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행실을 선하게 갖는 것은 선한 행실을 삶의 방식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두 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 사울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다윗이 승리하여 돌아올 때 많은 자매님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삼사가 뒤틀렸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창을 던져 그를 죽이고자했습니다. 이 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 왕을 미워하고 사울 왕을 향해 창을 던졌습니까? 아니면 군사를 동원하여 그를 체포하고 위협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자기 손을 들어 치려하지 않고 모든 억울함, 슬픔,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련을 감당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사울 왕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습니까? 다윗이 첫 번째로 사울 왕을 살려주었을 때 그는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면서 소리 높여 울었고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줄을 안다”며 축복했습니다(삼상 25:16-21). 두 번째로 사울 왕을 선대했을 때는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삼상 26:25)며 축복했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기능을 올바르게 수행할 때 타당합니다. 왕정에서는 왕이 최고 권력자이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고 권력이 시민이고 대통령이나 관료들은 그 권세로부터 권한을 부여 받은 공복들입니다. 공복들이 악을 자행하고 선을 파괴한다면 헌법에 따라서 평화적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신자가 선한 행실을 하고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는 것보다 더 성숙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지만 더 성숙한 자세는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성숙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먹을 자유가 있지만 믿음이 어린 사람을 위해서 먹을 것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과 같이 자유를 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17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왕, 신자, 비신자 모두를 아끼고 존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분, 나이, 신앙,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도와 규범도 존중해야 하지만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며 삼갈 때 그것이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둘째, 사환으로써 주인에게 가져야 하는 자세(18-25). 18절을 보십시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은 당시 노예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고 인권도 재산권도 없었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에 살면서 말을 할 수 있는 당나귀 취급을 받았습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주인들, 성질이 뒤틀린 주인들은 공연히 트집을 잡아 윽박지르거나 혹독한 벌을 내립니다. 이런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사환들은 이런 주인에게도 인내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나약한 굴복이 아닙니다. 그 주인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주의 주, 모든 주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할 것을 명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받들고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악을 선으로 갚는 가운데 불신자인 주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증언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다음 강의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본을 보이셨습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습니다(사53:9). 욕을 당하셨지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고 악담과 폭력을 경험하셨지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위협은커녕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스스로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악되었던 우리의 옛 사람도 죽게 되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의로운 새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24a).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24b).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었지만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25).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항상 우리를 돌보시며 만족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감독이 되셔서 어떤 시련과 역경을 만나든지 보호해주십니다. 죄인들을 살리려고 욕과 고난과 채찍과 죽음까지 참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 불의를 참고 인내하면서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묵묵히 기도하며 말과 행실로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부당한 갑질이 존재합니다. 베드로사도는 갑질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위대한 대응은 을이 성숙한 태도를 보이라고 합니다. 부당한 강자에 대한 약자의 성숙한 태도가 본문에 흐르고 있습니다. 부당한 태도에 대해 맞대응이나 보복, 최소한의 지적 질이 아니라 약자가 위대한 태도로 부당한 갑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배우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도록 심지어 일부러 부당한 갑질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제도개혁을 위한 노력은 사람 속에 있는 악을 근원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제도개혁은 끝이 없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부당함을 감당하는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고 지혜로운 길입니다.
셋째, 선한 행실은 아름다운 가정 교회를 세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3:1-7절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순종과 사랑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앞에서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할 것을 권면하면서 왕과 주인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제 결혼 제도에 대한 권면이 이어집니다. 성도들은 결혼 관계에서도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아내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이 말씀을 볼 때 당시 사회는 믿는 아내와 불신자 남편이 많았습니다. 믿는 아내가 남편이 믿지 않는다고 무시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콩가루 집안이 되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부족한 남편을 판단하고 무시하고 자꾸 가르치려고만 하는 아내를 남편들이 좋아할까요? “아이고, 우리 마누라, 성경 공부하더니 참 똑똑해지고 말도 잘하네, 나도 성경공부해 볼까”라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남편들은 자신이 가장이요 집안의 머리라고 생각하는 데 자신을 판단하고 무시하고 가르치려 들려고 할 때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을 닫습니다. 그리고 사람 교만하게 만드는 성경 공부를 못마땅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복종이나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리더십을 남편에게 맡기셨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 아내들이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그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할 때 가정에 화목을 이루고 남편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하늘 아래 하나 밖에 없는 최고의 남자로 여기며 섬깁니다. 이럴 때 남편들은 아내의 말이 아닌 그 행실을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든 그 예수님 나도 알고 싶소, 성경공부를 나도 하고 싶소”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또한 아내는 자기를 단장해야 하는데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외모를 잘 단장할 때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모를 예쁘게 꾸몄더라도 아내가 하는 말 한마디, 태도 하나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이 사그라집니다. 외모보다 더 남편을 감동시키고 사랑하게 만드는 ‘단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화장품, 고가의 옷, 성형이 아닌 온유와 안정된 심령으로 하는 단장입니다. 이것은 썩지 않는 불멸의 가치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이 무엇입니까? 부족한 남편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고 끝까지 온유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단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남편을 어떤 경우에도 높이고 신뢰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습니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자기를 애굽 왕궁에 팔아버릴 때에도 주라 칭하여 순종했습니다. 보통 여자들 같으면 네가 내 남편이냐 원망하면서 관계를 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믿음의 여인들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합니다.
아내가 해야 할 일은 6절이나 되는데 남편들이 해야 할 방향은 한 절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부부관계와 가정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내들을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내들의 성숙한 자세가 남편들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은 아내에 대한 지식을 따라서 아내와 동거해야 합니다. 아내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내의 재능이 무엇이고 성품이 어떠하며 장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도 필요합니다. 이런 지식을 따라 사려 깊게 아내와 동거할 때 아내를 행복하게 할 수 있고 가정도 더욱 화평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알아야 할 것 중에 한 가지는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육체적인 면에서, 또한 사회 여건상 대개 아내들이 남자보다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힘을 사용하지 말고 보호해야 합니다.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들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존재이며 생명의 은혜도 함께 이어 받을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를 막 대하면 기도가 막힙니다.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의 관계성이 잘 맺혀 있을 때라야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기도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면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선한 행실에 힘쓰고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에 순종하며 아름다운 가정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선한 행실에 힘쓰는 가운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베드로전서 2:11-3:7
요절 | 베드로전서 2:12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부르시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말씀을 전하고 소감을 쓰고 기도하면 다 되는 것입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에서 욕을 먹는 이유는 신자들이 말은 잘 하지만 행실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선한 행실에 힘을 써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행실을 말하는 것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가지라(11-17).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선한 행실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원으로서 성적 욕망, 재산 등 물질적 가치들에 대한 욕망, 세상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존재 속에 휘몰아치는 죄의 힘을 말합니다. 제어한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멀리 하다’, ‘피하다’, ‘끊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8: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골로새서 3:5절에서도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의 소원을 부인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죄와 피 흘리기 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도망을 치듯이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며 더 잘 살아보고자 욕심을 내기보다 자족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는 선한 행실에 힘쓰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행실은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행실을 선하게 갖는 것은 선한 행실을 삶의 방식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두 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 사울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고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다윗이 승리하여 돌아올 때 많은 자매님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삼사가 뒤틀렸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창을 던져 그를 죽이고자했습니다. 이 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 왕을 미워하고 사울 왕을 향해 창을 던졌습니까? 아니면 군사를 동원하여 그를 체포하고 위협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자기 손을 들어 치려하지 않고 모든 억울함, 슬픔,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시련을 감당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사울 왕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습니까? 다윗이 첫 번째로 사울 왕을 살려주었을 때 그는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면서 소리 높여 울었고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줄을 안다”며 축복했습니다(삼상 25:16-21). 두 번째로 사울 왕을 선대했을 때는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삼상 26:25)며 축복했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기능을 올바르게 수행할 때 타당합니다. 왕정에서는 왕이 최고 권력자이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고 권력이 시민이고 대통령이나 관료들은 그 권세로부터 권한을 부여 받은 공복들입니다. 공복들이 악을 자행하고 선을 파괴한다면 헌법에 따라서 평화적으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신자가 선한 행실을 하고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는 것보다 더 성숙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지만 더 성숙한 자세는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성숙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먹을 자유가 있지만 믿음이 어린 사람을 위해서 먹을 것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과 같이 자유를 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17절을 보십시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왕, 신자, 비신자 모두를 아끼고 존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분, 나이, 신앙,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제도와 규범도 존중해야 하지만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며 삼갈 때 그것이 좋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둘째, 사환으로써 주인에게 가져야 하는 자세(18-25). 18절을 보십시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은 당시 노예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고 인권도 재산권도 없었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에 살면서 말을 할 수 있는 당나귀 취급을 받았습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주인들, 성질이 뒤틀린 주인들은 공연히 트집을 잡아 윽박지르거나 혹독한 벌을 내립니다. 이런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사환들은 이런 주인에게도 인내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나약한 굴복이 아닙니다. 그 주인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주의 주, 모든 주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렇게 할 것을 명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받들고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악을 선으로 갚는 가운데 불신자인 주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증언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다음 강의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본을 보이셨습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셨습니다(사53:9). 욕을 당하셨지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고 악담과 폭력을 경험하셨지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위협은커녕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스스로 심판을 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악되었던 우리의 옛 사람도 죽게 되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의로운 새 사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24a).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얻었습니다(24b).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었지만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25).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항상 우리를 돌보시며 만족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감독이 되셔서 어떤 시련과 역경을 만나든지 보호해주십니다. 죄인들을 살리려고 욕과 고난과 채찍과 죽음까지 참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세상 불의를 참고 인내하면서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묵묵히 기도하며 말과 행실로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부당한 갑질이 존재합니다. 베드로사도는 갑질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위대한 대응은 을이 성숙한 태도를 보이라고 합니다. 부당한 강자에 대한 약자의 성숙한 태도가 본문에 흐르고 있습니다. 부당한 태도에 대해 맞대응이나 보복, 최소한의 지적 질이 아니라 약자가 위대한 태도로 부당한 갑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배우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도록 심지어 일부러 부당한 갑질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제도개혁을 위한 노력은 사람 속에 있는 악을 근원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제도개혁은 끝이 없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배우는 것은 부당함을 감당하는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고 지혜로운 길입니다.
셋째, 선한 행실은 아름다운 가정 교회를 세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3:1-7절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순종과 사랑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앞에서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종할 것을 권면하면서 왕과 주인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제 결혼 제도에 대한 권면이 이어집니다. 성도들은 결혼 관계에서도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아내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이 말씀을 볼 때 당시 사회는 믿는 아내와 불신자 남편이 많았습니다. 믿는 아내가 남편이 믿지 않는다고 무시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콩가루 집안이 되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부족한 남편을 판단하고 무시하고 자꾸 가르치려고만 하는 아내를 남편들이 좋아할까요? “아이고, 우리 마누라, 성경 공부하더니 참 똑똑해지고 말도 잘하네, 나도 성경공부해 볼까”라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남편들은 자신이 가장이요 집안의 머리라고 생각하는 데 자신을 판단하고 무시하고 가르치려 들려고 할 때 자존심이 상해서 마음을 닫습니다. 그리고 사람 교만하게 만드는 성경 공부를 못마땅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합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복종이나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리더십을 남편에게 맡기셨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 아내들이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그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할 때 가정에 화목을 이루고 남편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하늘 아래 하나 밖에 없는 최고의 남자로 여기며 섬깁니다. 이럴 때 남편들은 아내의 말이 아닌 그 행실을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든 그 예수님 나도 알고 싶소, 성경공부를 나도 하고 싶소”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또한 아내는 자기를 단장해야 하는데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이 외모를 잘 단장할 때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모를 예쁘게 꾸몄더라도 아내가 하는 말 한마디, 태도 하나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이 사그라집니다. 외모보다 더 남편을 감동시키고 사랑하게 만드는 ‘단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화장품, 고가의 옷, 성형이 아닌 온유와 안정된 심령으로 하는 단장입니다. 이것은 썩지 않는 불멸의 가치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이 무엇입니까? 부족한 남편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고 끝까지 온유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단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남편을 어떤 경우에도 높이고 신뢰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습니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자기를 애굽 왕궁에 팔아버릴 때에도 주라 칭하여 순종했습니다. 보통 여자들 같으면 네가 내 남편이냐 원망하면서 관계를 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믿음의 여인들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합니다.
아내가 해야 할 일은 6절이나 되는데 남편들이 해야 할 방향은 한 절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부부관계와 가정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내들을 인정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내들의 성숙한 자세가 남편들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은 아내에 대한 지식을 따라서 아내와 동거해야 합니다. 아내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아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내의 재능이 무엇이고 성품이 어떠하며 장점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도 필요합니다. 이런 지식을 따라 사려 깊게 아내와 동거할 때 아내를 행복하게 할 수 있고 가정도 더욱 화평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알아야 할 것 중에 한 가지는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육체적인 면에서, 또한 사회 여건상 대개 아내들이 남자보다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힘을 사용하지 말고 보호해야 합니다.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들입니다. 아내는 남편과 동등한 존재이며 생명의 은혜도 함께 이어 받을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를 막 대하면 기도가 막힙니다. 아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의 관계성이 잘 맺혀 있을 때라야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기도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면 아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선한 행실에 힘쓰고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에 순종하며 아름다운 가정 교회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선한 행실에 힘쓰는 가운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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