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서 2016년 벧전3강(2:4-10)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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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베드로전서 제 3 강
말씀 | 베드로전서 2:4-10
요절 | 베드로전서 2:4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지난 주 폴홍 선교사님을 통해서 우리는 초심을 잃지 않는 크리스천의 성숙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영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믿음으로 사랑을 하고 늙어서는 소망으로 사랑을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된 성도들에게 주는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입니다. 이 시간 버림받는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을 때 우리는 심판 가운데 있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의 마음에 들어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수치심과 관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순수했고 담대했는데 이제는 수치심으로 자기 몸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도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서로를 비난하고 자기 합리화를 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던 고백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과 자기 자신과도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던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 예수님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예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군병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영혼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히 외로우셨습니다. 누가 이 예수님의 버림받은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버림 받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이런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사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택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핍박이 있습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가족 중심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고 부모, 형제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경제 활동에 손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지금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을 때 슬퍼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한없는 슬픔을 체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쳐 충성하던 직장에서 버림을 받는 분도 있습니다. 때로 사랑하는 자식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까운 정도가 클수록 사랑이 깊을수록 버림받은 상처는 깊은 것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버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이가 좋고 밤새도록 해야 할 일로 인해서 즐겁게 대화를 하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버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버림을 받게 되면 마음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이 생기고 상처가 생기고 혼란스럽고 잠을 잘 수 없고 앞이 캄캄해집니다. 버림을 받으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떠돌이가 됩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 사는 우리가 버림받는 것은 일상적인 일인 것입니다. 버림받음으로 인해서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는 매우 힘들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사도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위로를 하기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나아가라는 단어는 현재 분사형으로써 지금, 계속해서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역동적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쉼을 얻습니다. 우리가 버림받아 힘들다고 누워 있으면 더욱 무기력해지고 슬픈 생각만 듭니다. 이때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는 카운슬러 즉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버림을 당할 때 예수님께 나아가 상담을 받아야 합니다. 어려운 현실만 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왜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했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이 반석이기 때문에 돌을 매우 좋아한 것 같습니다. 돌은 견고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서 생명 그 자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모든 생명은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산 돌은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견고한 기초가 됨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기초요 교회의 기초가 되십니다(마16:18).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1절에서 예수님만이 인생의 집을 짓는데 유일한 기초가 됨을 증거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님은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인생들의 유일한 기초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인생의 기초를 쌓은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 같아서 환난의 날에 결코 무너지지 아니하고 견고히 서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반석에서 물을 마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수를 얻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어떤 사람들이 됩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산 돌이신 예수님과 같이 되어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만민 구속역사의 집을 지어나가는데 벽돌로서 귀히 쓰임 받게 됩니다(엡 2:20). 구약시대의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었고 그 건축자재들은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 되시고 그 건축자재는 모두 살아있는 인격체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기초 돌이 되시고 우리 믿는 자들은 그 위에 신령한 집, 곧 거대한 우주적 교회를 지어 나가는 살아 있는 벽돌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됩니다. 제사장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의 중보역할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할 수 있었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께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눅23:45).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님의 보배 피를 의지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가 제사장이 되는 만인 제사장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령한 제사란 영과 진리(Spirit and Truth)로서 드리는 예배요(요 4:24),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시 51:17) 회개하고,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예배입니다(살전 5:18; 엡 5:19,20; 히 13:15).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리는 모든 헌신과 희생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입니다. 한 마디로 신령한 제사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장차 올 최후 심판을 면제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께 나아갈 때 보배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보배이십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매우 교만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무런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배척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는 흉악범으로서 아무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똑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 23:4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축복해 주셔서 그날 이후 그와 함께 낙원에 있게 하셨습니다(눅 23:43).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신분을 갖게 됩니까? 9a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첫째, 택하신 족속.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택함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덮어 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훈련하사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인류 구원역사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사 바로의 권세에서부터 구원하시고 젖고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시되 광야 가운데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쓰실만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새 이스라엘로 택하셨습니다.
둘째,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만백성을 위하여 위대한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죄사함 받도록 도와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도록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요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전파를 통해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도록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요 20:23). 또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과(딤후 4:2),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딤전 2:1,2). 우리 신자는 제사장이라도 보통 제사장이 아니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제사장으로서의 영적 권위와 고상한 품위를 갖춘 직분임을 말해 줍니다. 왕이 되려면 왕도를 가져야 합니다. 왕은 말이나 행동이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내면은 모든 백성을 품고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어야 하며 역사의식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도 이해하고 품고 섬길 수 있는 깊은 이해심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우리가 속이 좁고 편협하여서 한 사람도 품고 섬기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또한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는 하나님이 기업이 되심을 믿고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셋째, 거룩한 나라. 이는 세상 나라와 구별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를 말합니다.
넷째, 그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보배피로 값 주고 사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소유는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고 챙기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를 모든 위험과 해로부터 보호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며, 그 장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기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잘못하면 훈련시키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징계도 하시고 필요한 훈련도 주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징계도 없고 훈련도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소유된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하십니다(히 12:5-7). 불같은 시험 속에 집어넣어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십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사에 데니스 레이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비가 내리는 날 팔려갔기 때문에 주인이 레이니(Rainy)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뉴욕 브루클린의 노예시장에서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온 흑인 중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다른 노예들은 모두 슬픈 싱이요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이 청년만은 빛나는 눈동자로 앞을 보고 가슴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에게 관심을 보이던 실업자가 물었습니다. “저 노예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자요?” 노예상이 대답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추장의 아들이었소. 몇 동네에 불과하지만 자기들을 왕자라고 부르오. 모두가 웃고 그를 채찍으로 위협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있었습니다(San Bemadino의 저서 이것이 삶이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갖게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9b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전에는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며 어두움의 종노릇하였습니다(벧전4:3).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내면은 답답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혼란스럽고, 아무 것도 안 보였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은 절망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우울하고 외롭고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없고 보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큰 빛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어두움을 물리쳐주셨습니다. 빛에 들어가니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사회 현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결과를 볼 수 있게 되었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니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덕을 선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자신을 용서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다른 사람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사랑 가운데서 오래 참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거짓 선전에 속아 예수님에 대해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힘써 말씀을 가르침으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할 때 생명 구원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기에 힘쓸 때 나 자신도 살아나고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기쁨도 없고 힘도 없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보다도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버림받는 고통이 가장 큽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위로를 얻고 사랑할 힘을 얻고 예수님을 더욱 배우고 닮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 시대의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능히 살게 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목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말씀 | 베드로전서 2:4-10
요절 | 베드로전서 2:4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지난 주 폴홍 선교사님을 통해서 우리는 초심을 잃지 않는 크리스천의 성숙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영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믿음으로 사랑을 하고 늙어서는 소망으로 사랑을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된 성도들에게 주는 사도 베드로의 메시지입니다. 이 시간 버림받는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을 때 우리는 심판 가운데 있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의 마음에 들어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수치심과 관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를 정도로 순수했고 담대했는데 이제는 수치심으로 자기 몸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도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서로를 비난하고 자기 합리화를 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던 고백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저 여자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과 자기 자신과도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던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 예수님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예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군병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영혼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히 외로우셨습니다. 누가 이 예수님의 버림받은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버림 받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이런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사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택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핍박이 있습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가족 중심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고 부모, 형제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에는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경제 활동에 손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지금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을 때 슬퍼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한없는 슬픔을 체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쳐 충성하던 직장에서 버림을 받는 분도 있습니다. 때로 사랑하는 자식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버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까운 정도가 클수록 사랑이 깊을수록 버림받은 상처는 깊은 것입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버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이가 좋고 밤새도록 해야 할 일로 인해서 즐겁게 대화를 하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하고 버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버림을 받게 되면 마음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이 생기고 상처가 생기고 혼란스럽고 잠을 잘 수 없고 앞이 캄캄해집니다. 버림을 받으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떠돌이가 됩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 사는 우리가 버림받는 것은 일상적인 일인 것입니다. 버림받음으로 인해서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는 매우 힘들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사도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위로를 하기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나아가라는 단어는 현재 분사형으로써 지금, 계속해서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역동적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쉼을 얻습니다. 우리가 버림받아 힘들다고 누워 있으면 더욱 무기력해지고 슬픈 생각만 듭니다. 이때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는 카운슬러 즉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버림을 당할 때 예수님께 나아가 상담을 받아야 합니다. 어려운 현실만 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왜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했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이 반석이기 때문에 돌을 매우 좋아한 것 같습니다. 돌은 견고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서 생명 그 자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모든 생명은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산 돌은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견고한 기초가 됨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기초요 교회의 기초가 되십니다(마16:18).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1절에서 예수님만이 인생의 집을 짓는데 유일한 기초가 됨을 증거했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님은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인생들의 유일한 기초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인생의 기초를 쌓은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 같아서 환난의 날에 결코 무너지지 아니하고 견고히 서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반석에서 물을 마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수를 얻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어떤 사람들이 됩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산 돌이신 예수님과 같이 되어 신령한 집을 지어 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만민 구속역사의 집을 지어나가는데 벽돌로서 귀히 쓰임 받게 됩니다(엡 2:20). 구약시대의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었고 그 건축자재들은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 되시고 그 건축자재는 모두 살아있는 인격체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기초 돌이 되시고 우리 믿는 자들은 그 위에 신령한 집, 곧 거대한 우주적 교회를 지어 나가는 살아 있는 벽돌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됩니다. 제사장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의 중보역할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할 수 있었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께 단번에 제사를 드리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눅23:45).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님의 보배 피를 의지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가 제사장이 되는 만인 제사장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신령한 제사란 영과 진리(Spirit and Truth)로서 드리는 예배요(요 4:24),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시 51:17) 회개하고,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예배입니다(살전 5:18; 엡 5:19,20; 히 13:15).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리는 모든 헌신과 희생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입니다. 한 마디로 신령한 제사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장차 올 최후 심판을 면제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예수님께 나아갈 때 보배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보배이십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매우 교만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아무런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배척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는 흉악범으로서 아무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똑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상반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 23:4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축복해 주셔서 그날 이후 그와 함께 낙원에 있게 하셨습니다(눅 23:43).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신분을 갖게 됩니까? 9a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첫째, 택하신 족속.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택함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덮어 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훈련하사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인류 구원역사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사 바로의 권세에서부터 구원하시고 젖고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시되 광야 가운데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들을 쓰실만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새 이스라엘로 택하셨습니다.
둘째,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만백성을 위하여 위대한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죄사함 받도록 도와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도록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요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전파를 통해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도록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요 20:23). 또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과(딤후 4:2),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딤전 2:1,2). 우리 신자는 제사장이라도 보통 제사장이 아니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란 제사장으로서의 영적 권위와 고상한 품위를 갖춘 직분임을 말해 줍니다. 왕이 되려면 왕도를 가져야 합니다. 왕은 말이나 행동이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내면은 모든 백성을 품고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어야 하며 역사의식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도 이해하고 품고 섬길 수 있는 깊은 이해심과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움 받은 우리가 속이 좁고 편협하여서 한 사람도 품고 섬기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또한 왕 같은 제사장인 우리는 하나님이 기업이 되심을 믿고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셋째, 거룩한 나라. 이는 세상 나라와 구별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를 말합니다.
넷째, 그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보배피로 값 주고 사시고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소유는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고 챙기고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를 모든 위험과 해로부터 보호하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며, 그 장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기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잘못하면 훈련시키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셨으므로 징계도 하시고 필요한 훈련도 주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징계도 없고 훈련도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소유된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훈련하십니다(히 12:5-7). 불같은 시험 속에 집어넣어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십니다.
미국의 흑인 노예사에 데니스 레이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비가 내리는 날 팔려갔기 때문에 주인이 레이니(Rainy)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뉴욕 브루클린의 노예시장에서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온 흑인 중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다른 노예들은 모두 슬픈 싱이요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이 청년만은 빛나는 눈동자로 앞을 보고 가슴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 노예에게 관심을 보이던 실업자가 물었습니다. “저 노예는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자요?” 노예상이 대답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추장의 아들이었소. 몇 동네에 불과하지만 자기들을 왕자라고 부르오. 모두가 웃고 그를 채찍으로 위협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있었습니다(San Bemadino의 저서 이것이 삶이다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갖게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9b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전에는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는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며 어두움의 종노릇하였습니다(벧전4:3).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내면은 답답하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혼란스럽고, 아무 것도 안 보였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은 절망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우울하고 외롭고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없고 보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큰 빛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어두움을 물리쳐주셨습니다. 빛에 들어가니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사회 현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결과를 볼 수 있게 되었고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니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덕을 선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자신을 용서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다른 사람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사랑 가운데서 오래 참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거짓 선전에 속아 예수님에 대해 많은 오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힘써 말씀을 가르침으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할 때 생명 구원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하기에 힘쓸 때 나 자신도 살아나고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기쁨도 없고 힘도 없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보다도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버림받는 고통이 가장 큽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위로를 얻고 사랑할 힘을 얻고 예수님을 더욱 배우고 닮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 시대의 거룩한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능히 살게 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목자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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