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022년민16강(31,32장)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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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민수기 제 16 강
말씀 | 민수기 31,32장
요절 | 민수기 32:6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요즈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해서 석유 값이 오르고 식료품 값이 오르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문제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국가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나 하나만 잘 살아보겠다고 해서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나라와 세계를 어떻게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어 갈 것인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미디안에게 원수를 갚으라(31장).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마지막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는 것입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미디안의 자손들입니다(창25:2,4). 그들 중 일부는 가나안 남쪽에 정착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들 중에 있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가나안 동편에 정착하여 모압 사람들과 이웃하며 동맹을 맺고 함께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로 약속된 곳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을 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보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하게 함으로서 바알브올에 가담하도록 했습니다. 발람의 꾀를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2), ‘여호와의 원수’(3)라고 말씀하시며 미디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전쟁에 나갈 사람들을 각 지파에서 천 명씩 이스라엘 백만 명중에서 만 이천 명을 택하여 무장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이 60만명이나 되는데 왜 이렇게 적은 수를 보냈을까요? 미디안 군대가 최소한 3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로잡아온 여자들이 32000명인 것을 볼 때 그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싸우도록 하십니다. 또한 6절을 보면 군인들을 전장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보냈습니다. 성소의 기구는 언약궤를 가리킵니다(수6:4-16; 삼상4: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언약궤와 신호 나팔은 거룩한 전쟁을 지휘하는 신호입니다(10:1-10; 신20:2-4). 신호 나팔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기억해달라고 부는 기도의 신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이 싸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휘하심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아니라 제사장 비느하스가 총사령관이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이 전쟁이 하나님이 직접 참여해서 싸우시는 성전(聖戰)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신명기 20장 1절에 보면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습니다(7,8).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한 후에 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않고 미디안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계책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았지만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다가 결국에는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저와 가족은 여름수양회를 시작하기 2주 전에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수양회를 열심히 섬겨야 하는데 자가 격리를 일주일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고자 하는 사탄의 공격임을 깨닫고 기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친히 주재하시며 그 영광을 나타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양회 일주일 전에 워십 댄스와 영상 중계를 해야 하는 분들 세명이 코로나에 걸리고 두 아이들이 걸렸습니다. 수양회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해야 할 것을 연습하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동교화랑 수양회 가운데 역사하셨습니다. 권세 있는 말씀과 감동적인 인생 소감, 은혜로운 찬양과 특송, 꽁트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합니다.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다 진영 밖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을 환영하며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군대의 지휘관 곧 싸움에서 돌아온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에게 노하였습니다. 갑자기 환영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모세는 왜 이렇게 노발대발한 것일까요?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한 여자들인데 그들을 살려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다시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모세가 간파하고 지휘관들에게 노를 발하였습니다. 그는 아이들 중에서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그들을 위하여 살려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상의 세력에 대한 단호한 심판을 통한 공의의 실현과 이스라엘을 범죄케 할 수 있는 여지를 철저히 제거하였습니다. ‘헤렘(진멸, 온전히 바쳐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실행되며, 원수의 도시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합니다(수6:20,21). 그러나 여인과 아이들에 대한 살인은 가나안 정복 기간에만 한정된 것입니다. 이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죄의 관영으로 인한 완전한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우상숭배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민족이 아닌 이민족과의 전쟁에서는 먼저 화평을 선언하고, 거부를 했을 경우에는 남자들만 쳐서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미디안 남자와 잠을 잔 여인들은 원수의 분신이며, 바알브올에 가담했거나 미디안 남자들의 씨를 잉태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들을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싹을 잘라버렸습니다.
우리도 죄를 지을 여지를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결국에는 죄에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나를 유혹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미련, 재물에 대한 탐심, 연애 감정 등을 미련 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분별하고 깨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엡6:12). 우리를 죄에 넘어뜨리고 불신에 빠뜨리고 거짓된 세상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싸움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싸움, 믿음의 싸움을 하면서 먼저 죄로부터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고, 그 다음에는 자녀들과 양들을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죄악과 음란함과 부정직함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한 자들은 진영 밖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붉은 암송아지 재로 만든 정결의 물로 몸을 씻어서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복과 가죽으로 만든 것, 염소 털로 만든 것, 나무로 만든 것 등, 불에 견디지 못할 것들은 정결하게 하는 물로 깨끗하게 씻고, 불에 견딜만한 물건들, 즉 금, 은, 동, 철, 납 등과 같은 것들은 불을 지나게 해서 정결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정결의식을 통해서 부정한 것이 이스라엘의 진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할 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한 순간에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죄를 깨닫게 될 때에 이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부정함을 제거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너희의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32장). 탈취물을 공평하게 분배하였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습니다.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였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요단 서편은 산지가 많고 농사하기에 적합하지만 요단 동편은 초지가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가나안 경계 밖이고 약속의 땅은 아니었지만 목축하기에 좋은 땅임을 보고 마음에 탐심이 생겼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곳보다 좋은 목초지가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또한 많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와서 요단 동편 땅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가나안을 정복하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옛 세대가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려는 모세를 붙들고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던 불평과 반역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자기 지파의 유익만을 생각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기들이 살 곳만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하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원대한 뜻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을 책망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가운데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은 9만 명에 달합니다. 므낫세 반 지파까지 합치면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합니다. 이들이 가나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요단 동편에 머물러 있으면 전력에 막대한 차질이 생깁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형제들의 사기를 떨어뜨려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이 단결된 이스라엘 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이 깨지게 되고 열두 지파가 자기 지파의 이익만을 취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꼬투리가 됩니다. 설사 그들 없이 남은 지파들이 전쟁을 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더라도 둘 사이의 관계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실패를 기억하고 그들이 이를 반복하지 않도록 책망하였습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14,15).”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기심입니다. 전체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구할 때 성령의 그릇이 깨지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한 몸입니다. 혼자 동떨어져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서로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짐을 져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서 교회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합니다(엡4:12,16). 이렇게 연합해서 동역할 때 서로 큰 힘을 얻고 시너지 효과가 일어납니다. 또한 공동체에 두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기 요회의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오케스트라에 비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개개의 연주자로 구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단에 있어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개의 멤버들입니다. 그러나 이 멤버들이 독자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한 오케스트라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창조할 수 있는 조화의 미, 장엄의 미는 각 연주자가 아무리 훌륭한 묘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독자적으로는 이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체에 자신을 투입하여 그에 융화됨으로써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각 연주자의 개별적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좋은 오케스트라는 오직 좋은 연주자들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개 연주자와 전체 오케스트라가 다 같이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고 양자의 관계는 친화적이고 상부상조하는 관계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범위는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로, 세계로 확장되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 나라의 자유와 복지와 구원을 위해서 힘쓸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의 책망을 들은 르우벤과 갓 자손은 큰 결심을 합니다.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16-19).” 모세는 이들을 격려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고 말합니다(22). 무죄하다는 말은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는 소유를 챙겼으니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형제들을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형제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다른 지파 사람들이 그들을 만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가서 형제들을 위해서 싸우면 자유롭게 됩니다. 또한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가 자기들 땅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싸우러 나가지 않으면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했던 그 땅을 잃게 됩니다. 내 소유가 있지만 가만히 있지 않고 형제도 소유를 얻기까지 함께 싸우면 내 소유도 확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삶을 누릴 권리를 주셨습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누릴 권리, 각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를 키우고 발전시킬 권리, 직장이나 소유를 가져서 먹고 살아갈 길을 얻을 권리,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키울 권리, 행복을 누릴 권리를 주셨습니다. 나에게만 그런 권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되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우리나라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위해서, 이미 이룬 사람이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함께 싸워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 모세는 넓은 마음으로 만일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다른 지파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의 명령대로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 인의 왕 시혼의 나라와 바산 왕 옥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지파들도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생을 해도 함께 하고, 기쁨을 나눌 때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짐을 져 주어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서로 짐을 져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이기심, 집단적인 이기주의을 극복하고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민수기 31,32장
요절 | 민수기 32:6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요즈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해서 석유 값이 오르고 식료품 값이 오르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문제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국가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나 하나만 잘 살아보겠다고 해서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나라와 세계를 어떻게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어 갈 것인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미디안에게 원수를 갚으라(31장).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마지막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는 것입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태어난 미디안의 자손들입니다(창25:2,4). 그들 중 일부는 가나안 남쪽에 정착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데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들 중에 있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가나안 동편에 정착하여 모압 사람들과 이웃하며 동맹을 맺고 함께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로 약속된 곳이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을 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보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하게 함으로서 바알브올에 가담하도록 했습니다. 발람의 꾀를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2), ‘여호와의 원수’(3)라고 말씀하시며 미디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전쟁에 나갈 사람들을 각 지파에서 천 명씩 이스라엘 백만 명중에서 만 이천 명을 택하여 무장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이 60만명이나 되는데 왜 이렇게 적은 수를 보냈을까요? 미디안 군대가 최소한 3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로잡아온 여자들이 32000명인 것을 볼 때 그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싸우도록 하십니다. 또한 6절을 보면 군인들을 전장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보냈습니다. 성소의 기구는 언약궤를 가리킵니다(수6:4-16; 삼상4: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언약궤와 신호 나팔은 거룩한 전쟁을 지휘하는 신호입니다(10:1-10; 신20:2-4). 신호 나팔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기억해달라고 부는 기도의 신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이 싸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휘하심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아니라 제사장 비느하스가 총사령관이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이 전쟁이 하나님이 직접 참여해서 싸우시는 성전(聖戰)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신명기 20장 1절에 보면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습니다(7,8).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한 후에 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않고 미디안에 머물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계책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았지만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다가 결국에는 여호와의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저와 가족은 여름수양회를 시작하기 2주 전에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수양회를 열심히 섬겨야 하는데 자가 격리를 일주일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고자 하는 사탄의 공격임을 깨닫고 기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친히 주재하시며 그 영광을 나타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양회 일주일 전에 워십 댄스와 영상 중계를 해야 하는 분들 세명이 코로나에 걸리고 두 아이들이 걸렸습니다. 수양회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해야 할 것을 연습하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동교화랑 수양회 가운데 역사하셨습니다. 권세 있는 말씀과 감동적인 인생 소감, 은혜로운 찬양과 특송, 꽁트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합니다.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다 진영 밖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을 환영하며 영접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군대의 지휘관 곧 싸움에서 돌아온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에게 노하였습니다. 갑자기 환영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모세는 왜 이렇게 노발대발한 것일까요?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한 여자들인데 그들을 살려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다시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모세가 간파하고 지휘관들에게 노를 발하였습니다. 그는 아이들 중에서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그들을 위하여 살려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상의 세력에 대한 단호한 심판을 통한 공의의 실현과 이스라엘을 범죄케 할 수 있는 여지를 철저히 제거하였습니다. ‘헤렘(진멸, 온전히 바쳐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실행되며, 원수의 도시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사람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합니다(수6:20,21). 그러나 여인과 아이들에 대한 살인은 가나안 정복 기간에만 한정된 것입니다. 이는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죄의 관영으로 인한 완전한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우상숭배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민족이 아닌 이민족과의 전쟁에서는 먼저 화평을 선언하고, 거부를 했을 경우에는 남자들만 쳐서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미디안 남자와 잠을 잔 여인들은 원수의 분신이며, 바알브올에 가담했거나 미디안 남자들의 씨를 잉태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들을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싹을 잘라버렸습니다.
우리도 죄를 지을 여지를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결국에는 죄에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나를 유혹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미련, 재물에 대한 탐심, 연애 감정 등을 미련 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공격을 분별하고 깨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엡6:12). 우리를 죄에 넘어뜨리고 불신에 빠뜨리고 거짓된 세상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싸움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싸움, 믿음의 싸움을 하면서 먼저 죄로부터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고, 그 다음에는 자녀들과 양들을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의 죄악과 음란함과 부정직함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한 자들은 진영 밖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붉은 암송아지 재로 만든 정결의 물로 몸을 씻어서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복과 가죽으로 만든 것, 염소 털로 만든 것, 나무로 만든 것 등, 불에 견디지 못할 것들은 정결하게 하는 물로 깨끗하게 씻고, 불에 견딜만한 물건들, 즉 금, 은, 동, 철, 납 등과 같은 것들은 불을 지나게 해서 정결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정결의식을 통해서 부정한 것이 이스라엘의 진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할 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한 순간에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보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죄를 깨닫게 될 때에 이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부정함을 제거하고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너희의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32장). 탈취물을 공평하게 분배하였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습니다.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였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요단 서편은 산지가 많고 농사하기에 적합하지만 요단 동편은 초지가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가나안 경계 밖이고 약속의 땅은 아니었지만 목축하기에 좋은 땅임을 보고 마음에 탐심이 생겼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곳보다 좋은 목초지가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또한 많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와서 요단 동편 땅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은 단지 요단 동편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가나안을 정복하지 말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옛 세대가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려는 모세를 붙들고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던 불평과 반역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자기 지파의 유익만을 생각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자기들이 살 곳만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루시고자하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원대한 뜻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을 책망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가운데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은 9만 명에 달합니다. 므낫세 반 지파까지 합치면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합니다. 이들이 가나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요단 동편에 머물러 있으면 전력에 막대한 차질이 생깁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형제들의 사기를 떨어뜨려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이 단결된 이스라엘 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이 깨지게 되고 열두 지파가 자기 지파의 이익만을 취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꼬투리가 됩니다. 설사 그들 없이 남은 지파들이 전쟁을 하여 가나안 땅을 차지하더라도 둘 사이의 관계는 온전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에서의 실패를 기억하고 그들이 이를 반복하지 않도록 책망하였습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14,15).” 신앙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기심입니다. 전체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구할 때 성령의 그릇이 깨지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한 몸입니다. 혼자 동떨어져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서로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짐을 져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활용해서 교회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합니다(엡4:12,16). 이렇게 연합해서 동역할 때 서로 큰 힘을 얻고 시너지 효과가 일어납니다. 또한 공동체에 두신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기 요회의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오케스트라에 비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개개의 연주자로 구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단에 있어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개의 멤버들입니다. 그러나 이 멤버들이 독자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한 오케스트라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창조할 수 있는 조화의 미, 장엄의 미는 각 연주자가 아무리 훌륭한 묘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독자적으로는 이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전체에 자신을 투입하여 그에 융화됨으로써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각 연주자의 개별적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좋은 오케스트라는 오직 좋은 연주자들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개 연주자와 전체 오케스트라가 다 같이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고 양자의 관계는 친화적이고 상부상조하는 관계가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범위는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로, 세계로 확장되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 나라의 자유와 복지와 구원을 위해서 힘쓸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의 책망을 들은 르우벤과 갓 자손은 큰 결심을 합니다.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16-19).” 모세는 이들을 격려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고 말합니다(22). 무죄하다는 말은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는 소유를 챙겼으니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형제들을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형제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다른 지파 사람들이 그들을 만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가서 형제들을 위해서 싸우면 자유롭게 됩니다. 또한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가 자기들 땅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싸우러 나가지 않으면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했던 그 땅을 잃게 됩니다. 내 소유가 있지만 가만히 있지 않고 형제도 소유를 얻기까지 함께 싸우면 내 소유도 확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삶을 누릴 권리를 주셨습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누릴 권리, 각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를 키우고 발전시킬 권리, 직장이나 소유를 가져서 먹고 살아갈 길을 얻을 권리,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키울 권리, 행복을 누릴 권리를 주셨습니다. 나에게만 그런 권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만 잘 살면 되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우리나라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위해서, 이미 이룬 사람이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함께 싸워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 모세는 넓은 마음으로 만일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다른 지파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의 명령대로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 인의 왕 시혼의 나라와 바산 왕 옥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지파들도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고생을 해도 함께 하고, 기쁨을 나눌 때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도와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짐을 져 주어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서로 짐을 져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이기심, 집단적인 이기주의을 극복하고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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