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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022년 민13강(22-24장)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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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2회 작성일 22-06-2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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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민수기 제 13 강
말씀 | 민수기 22-24장
요절 | 민수기 23:19,20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우리는 이제까지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징계를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모세조차도 그들을 감당하다 화를 냈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보면서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오늘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저주하고자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못하게 막으십니다. 저주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축복도 말로 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끈질기게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발락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끝까지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기초해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 이스라엘인 우리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압으로 가는 발람(22장).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모압 왕 발락과 그 백성들은 얼마 전에 자신들과 싸워 이기고 땅을 점령했던 시혼 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앞 마당에 진을 치고 있으니 심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압이 번민을 하다가 동맹인 미디안 장로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발락은 사신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렀습니다. 발람은 당시에 영험한 주술사였습니다. 그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줄을 사방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의 저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였습니다.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발락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그 밤에 거기서 유숙하면서 발람의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 ‘복을 받은 자’라는 말씀은 수동분사로서 계속적으로,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또 그들은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이기에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저주가 아니라 항구적으로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발람은 발락의 귀족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하자 그들이 돌아갔습니다.

  발람이 오기를 거절하자 발락은 복채가 적어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더 높은 고관들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발람에게 발락의 말을 전했습니다.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발람은 그들에게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명예에 대한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이번에는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르는 말만 하도록 엄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서 열려 있습니다. 발람이 가지 말라고 해도 갈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발람의 애매한 태도와 탐욕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는 유혹에 빠져 들어갑니다. 마음에 탐욕이 생기거나 유혹의 손길이 다가올 때에는 미련을 두지 말고 처음부터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자들은 우리를 유혹하는 것을 즐기면서 넘어뜨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15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우리도 물질에 대한 탐심이나 세상 잔재미나 음란한 마음이 들어올 때에 처음부터 미련을 두지 않고 분명한 태도를 취할 때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길을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서 막으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왜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가라고 해 놓고서는 진노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32절을 볼 때 ‘그의 길이 사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말을 뒤집고 패역함을 하나님은 잘 아셨습니다. 발람이 탄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자 나귀가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눌렀습니다. 다시 발람이 채찍질을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거 없었습니다. 나귀가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나귀가 발람에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발람이 나귀에게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고 화를 내며 말을 합니다. 그러자 나귀가 발람에게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엎드린 발람에게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발람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신이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나는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 사람들과 함께 가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발람은 초월적인 현상을 보는 예언자였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서 하찮은 미물인 나귀가 보는 것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소와는 다른 나귀의 행동을 보고 왜 그런지 사려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발람의 모습은 나귀보다도 못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발람과 나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발람이 짐승만도 못한 자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발람처럼 탐욕에 대한 미련 때문에 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는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주변에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사고 등을 통해서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통해서 탐욕을 따라서 가던 길에 제동을 거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세미한 음성을 들을 때 회개하고 생명의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발락은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발람을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발락이 “내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대가 어찌 내게 오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어찌 그대를 높여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내가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을 그것을 말할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였습니다.
 
  둘째, 발람의 첫 번째 예언(23:1-12).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올랐습니다. 거기서 제단 일곱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준비하였습니다. 발람이 제단에 제사를 지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가 예언을 전하였습니다.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7-10).”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저주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주술적인 능력에 대해서 무능력함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지배할 때 그가 허락하시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홀로 살 것이라. 그들이 다른 모든 민족들과 구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으로 자립적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또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 지방 도처에서 아무렇게나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거칠고 무질서한 오합지졸로 알고 있었는데 실상을 보니 그들이 규율과 훌륭한 질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질서 정연하고 잘 조직된 진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아주 크게 놀랐습니다. 또한 발람이 들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수가 그렇게 적거나 미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발락은 발람의 예언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발람도 여호와께서 그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반문하였습니다.

  셋째, 발람의 두 번째 예언(13-26). 발락이 발람을 다른 곳으로 인도합니다. 이스라엘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게 하고 그들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습니다. 발람이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 뵐 동안에 여기 발락에게는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라고 말하였습니다. 발람이 두 번째 예언을 들려 줍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있는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허물과 반역을 보면 진노하시고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않고자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그 많은 사랑과 축복과 이적을 경험하였으면서도 그렇게 하나님을 반역하고 원망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보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허물과 반역을 덮으시고 언약 안에서 축복하는 것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반역을 당할 때 참는 것이 한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에 대한 사랑은 무한대한 사랑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이 아무리 엇나가도 참아주고 감당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평원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으십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우리가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오래 참으시고 그 허물과 반역을 견디십니다. 그의 이런 사랑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며 인간의 모든 죄를 감당하여 죽게까지 하였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께 쏟아 부으시고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참으시고 감당하시는 이유는 그들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가 나거나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 언약을 파기해 버립니다. 상황에 따라서 언약을 변경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십니다.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습니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게 하십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소리칩니다.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발락은 이제 발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면 축복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발람은 여전히 자기로서는 어찌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이 일을 시작할 때 했던 말로써 변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26절).”

  넷째, 발람의 세 번째 축복(23:27-24: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락과 발람은 다시 한 번 더 저주해 보려고 결심합니다. 발락이 이때 발람을 데려간 곳은 그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인 브올산 꼭대기였습니다. 그곳은 바알 신을 예배하는 곳인데 거기서 다시 일곱 제단을 쌓고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각 제단에 드렸습니다.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 친 것을 보는데 그 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가 예언을 전합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3-7).” 그는 돈이 목적인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두 눈을 밝히 뜨고 은혜로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자기 발견을 한 것입니다. 눈의 비늘이 벗겨져 이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새 번역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예언을 선포하였다.  "브올의 아들 발람의 말이다. 눈을 뜬 사람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말이다. 환상으로 a전능자를 뵙고 넘어졌으나, 오히려 두 눈을 밝히 뜬 사람의 말이다. (a 히, '샤다이')” 그가 두 눈을 밝히 뜨고 한 예언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강가의 동산이나 물가의 백향목 같이 아름답고 풍요롭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들소와 같이 힘이 세게 하시고 수사자와 암사자 같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그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과 약속인데 재확인하였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온 세계로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이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함부로 이스라엘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모압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면 그 나라도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한번 택하신 자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보호를 믿고 담대해야 합니다.

  다섯째, 발람의 네 번째 축복(24:14-25). 발람이 마지막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의 장래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여기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다는 예언은  메시아 탄생에 대한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왕을 찾아왔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 2: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발람은 먼 미래에 ‘한 별’, ‘한 규’가 이스라엘 중에 일어나서 모압을 완전히 쳐서 멸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모압이 당하게 될 운명은 에돔, 세일, 아말렉, 겐 족속, 앗수르, 깃딤에서 배를 타고 온 민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 국가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괴롭히고 멸망시키려고 하지만 도리어 저주를 받아서 멸망당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을 저주하는 자들이 받을 저주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다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들을 끝까지 축복하십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애를 썼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더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연약해서 넘어질지라도, 사탄이 간교해서 방해해도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변개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그동안 살펴 본 것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원수 마귀의 악한 계획을 무산시키고 보호하실 뿐 아니라 축복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우리도 죄사함을 주시고 험한 인생 길을 가는 동안 동행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 갈 때까지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전파되고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이 든든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을 볼 때 저주의 말이 아니라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보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형제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이간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 사람을 죽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고 저주의 말이 아니라 축복하는 말을 하도록 연습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발람선지자를 통해서 탐심에 눈이 가리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사람이 탐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실 때마다 그 앞에 엎드려서 진실되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 이익을 따릅니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겔 33:31).” 우리는 자기 이익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진리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모든 욕심, 걱정 근심의 먹구름이 물러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뜻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그때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사용하셔서 축복의 물줄기가 흘러내려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세상 명예와 물질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잠시 있다 사라집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인생살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좀 더 단순하고, 좀 더 나누어 주고, 좀 더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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