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022년 민11강(20:1-29)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모세와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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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민수기 제 11 강
말씀 | 민수기 20:1-29
요절 | 민수기 20:12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모세와 아론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것으로 시작된 백성들의 죄가 지도자들에게 까지 이르렀습니다. 광야에서의 실패와 반역이 반복되며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이스라엘이 38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두령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반역을 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광야로 들어간 출애굽 1세대는 거의 다 죽고 이제 광야에서 자란 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실패는 광야에서의 소망으로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모두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소망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이 가데스에 이르렀습니다. 가데스는 팔레스타인 땅 유다 남쪽 경계에 위치해 있는 오아시스로 가데스 바네아라고도 불립니다(민32:8; 신1:19).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부정적인 보고를 해서 백성들을 불신에 빠뜨린 바로 그곳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38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다가 다시 가데스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부터 과거의 불신앙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먹을 물이 없을 때 하나님께 구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들의 태도는 거칠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어야 합니다. 가야할 목적지도 없이 방황하다가 죽어야 하는 그들의 삶을 생각할 때 너무나 허무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넓은 땅, 좋은 땅으로 인도하겠다 하고는 이 광야, 이 나쁜 곳에서 다 죽게 한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섯 가지 없는 것을 말하며 모세의 지도력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자신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절망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 때문에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40년 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으로 가는 중에 르비딤에서 물이 없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17:1-3). 이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 목마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 문제로 다투고, 여호와가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했습니다. 이런 일이 40년 후에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들이 하찮게 여기는 만나를 먹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서 그들은 삶의 목적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입니다(고전 15:19).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벧전 1:21). 이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을 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마다 진노하시고 혹독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11:1-3; 11:31-35; 14:1-38; 16:1-50). 왜냐하면 원망과 불평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치 않는다는 반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과 물이 없음으로 인한 고통을 깊이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걸으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마실 물조차 없자 죽음까지 갈망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형편을 고려하셔서 진노를 쏟지 않으시고 물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이 없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온 백성 앞에서 아론과 함께 반석에게 “물을 내라”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물을 마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막의 그 뜨거운 바위에게 명령하여 생수를 샘솟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불러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서 원망하고 다투었지만, 그들에게 반석에서라도 물을 내어주셔서 마시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환호성을 외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시고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을 나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디.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반역한 너희여!”라고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의 종인 모세가 이렇게 정죄하는 것은 월권입니다.
우리가 모세를 이해하는 편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어떻게 대했던가요? 힘들 때마다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심지어 두 번씩이나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출17:4; 14:10).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참아도 너무 참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들을 참고 감당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한 번에 폭발해 버렸습니다. 그동안 모세는 인내하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계속해서 들어주었습니다. 고기를 달라고 하면 고기를 주었고 빵을 달라고 하면 빵을 주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섬겨주었지만 백성들은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왜 이집트에서 잘 살던 우리를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광야로 이끌어내어서 죽게 만드냐?”라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자마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고,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는 불신에 빠져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지만, 반석에게 명령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분노에 차서 말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것입니다. 게다가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신과 아론이 반석에서 물을 내는 기적을 이루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었습니다.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화가 난 김에 그의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물이 솟아나와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거룩이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구별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모세는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이런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감정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죄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와 아론의 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것과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가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인데 분노를 폭발하였습니다. 정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을 했는데 한 번의 죄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분 같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통은 이해해주시고 모세의 힘든 처지는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대한 종일수록 죄에 대해서 엄격하게 물으십니다. 그만큼 영향력과 책임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모세가 할 일이 다 끝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부각시키고자 분수에 넘치는 말과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영웅심리나 스타의식에 사로잡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엄히 다루시고 분명하게 징계하십니다. 그렇다고 목자는 큰 소리 한번 못 치고 맨날 엎드려서 종처럼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자 모세가 대노해서 십계명 돌판을 깨뜨려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갈아서 물에 뿌려서 먹였습니다. 레위인들을 시켜서 주동자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분노로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도가 더 셌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영적 분노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시고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혈기가 아니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예수님을 삼켰기 때문에 그런 영적분노를 발하신 것입니다(요2:17).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책망을 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순간순간 묻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주여,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이런 진지한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여과없이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불순종과 상관없이 친히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백성들의 목마름을 해갈해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종들이 그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으면 자신이 스스로 거룩함을 나타내십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친히 해 나가십니다. 물론 택한 종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면 심히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인간의 불순종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 앞에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거룩함만을 나타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고뇌하셨습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군병들을 대적해야 하는가? 아니면 순순히 잡혀서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가? 이 문제를 놓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인류구속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나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고정관념, 나의 자존심, 자기 의, 나의 경험을 온전히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자 투쟁해야만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나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주님의 구원역사에 거침돌이 되지 않고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그 이유를 배웠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을 했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가운데서 구원 역사를 이루고자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여름 수양회에 한 명의 양이라도 초청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몸살을 앓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민수기 20:1-29
요절 | 민수기 20:12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모세와 아론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것으로 시작된 백성들의 죄가 지도자들에게 까지 이르렀습니다. 광야에서의 실패와 반역이 반복되며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이스라엘이 38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두령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반역을 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광야로 들어간 출애굽 1세대는 거의 다 죽고 이제 광야에서 자란 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실패는 광야에서의 소망으로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모두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소망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이 가데스에 이르렀습니다. 가데스는 팔레스타인 땅 유다 남쪽 경계에 위치해 있는 오아시스로 가데스 바네아라고도 불립니다(민32:8; 신1:19).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부정적인 보고를 해서 백성들을 불신에 빠뜨린 바로 그곳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38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다가 다시 가데스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부터 과거의 불신앙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먹을 물이 없을 때 하나님께 구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들의 태도는 거칠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어야 합니다. 가야할 목적지도 없이 방황하다가 죽어야 하는 그들의 삶을 생각할 때 너무나 허무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넓은 땅, 좋은 땅으로 인도하겠다 하고는 이 광야, 이 나쁜 곳에서 다 죽게 한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섯 가지 없는 것을 말하며 모세의 지도력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자신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절망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 때문에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40년 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으로 가는 중에 르비딤에서 물이 없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17:1-3). 이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 목마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 문제로 다투고, 여호와가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했습니다. 이런 일이 40년 후에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들이 하찮게 여기는 만나를 먹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앞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서 그들은 삶의 목적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입니다(고전 15:19).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벧전 1:21). 이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을 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마다 진노하시고 혹독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11:1-3; 11:31-35; 14:1-38; 16:1-50). 왜냐하면 원망과 불평은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원치 않는다는 반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어떠한 벌도 내리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과 물이 없음으로 인한 고통을 깊이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걸으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피곤하고 지쳤습니다. 마실 물조차 없자 죽음까지 갈망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의 형편을 고려하셔서 진노를 쏟지 않으시고 물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이 없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온 백성 앞에서 아론과 함께 반석에게 “물을 내라” 명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물을 마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막의 그 뜨거운 바위에게 명령하여 생수를 샘솟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불러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서 원망하고 다투었지만, 그들에게 반석에서라도 물을 내어주셔서 마시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환호성을 외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시고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을 나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디.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습니까? 10,11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반역한 너희여!”라고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의 종인 모세가 이렇게 정죄하는 것은 월권입니다.
우리가 모세를 이해하는 편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어떻게 대했던가요? 힘들 때마다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심지어 두 번씩이나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출17:4; 14:10).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참아도 너무 참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들을 참고 감당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한 번에 폭발해 버렸습니다. 그동안 모세는 인내하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계속해서 들어주었습니다. 고기를 달라고 하면 고기를 주었고 빵을 달라고 하면 빵을 주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섬겨주었지만 백성들은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왜 이집트에서 잘 살던 우리를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광야로 이끌어내어서 죽게 만드냐?”라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자마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고,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는 불신에 빠져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지만, 반석에게 명령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분노에 차서 말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것입니다. 게다가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신과 아론이 반석에서 물을 내는 기적을 이루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었습니다.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화가 난 김에 그의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물이 솟아나와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거룩이란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구별되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모세는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서 이런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감정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죄에 대해서 어떻게 다루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와 아론의 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것과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가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인데 분노를 폭발하였습니다. 정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을 했는데 한 번의 죄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분 같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고통은 이해해주시고 모세의 힘든 처지는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대한 종일수록 죄에 대해서 엄격하게 물으십니다. 그만큼 영향력과 책임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모세가 할 일이 다 끝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부각시키고자 분수에 넘치는 말과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영웅심리나 스타의식에 사로잡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엄히 다루시고 분명하게 징계하십니다. 그렇다고 목자는 큰 소리 한번 못 치고 맨날 엎드려서 종처럼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자 모세가 대노해서 십계명 돌판을 깨뜨려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갈아서 물에 뿌려서 먹였습니다. 레위인들을 시켜서 주동자들을 제거하였습니다. 분노로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도가 더 셌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영적 분노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시고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혈기가 아니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예수님을 삼켰기 때문에 그런 영적분노를 발하신 것입니다(요2:17).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책망을 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순간순간 묻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주여,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이런 진지한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여과없이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불순종과 상관없이 친히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백성들의 목마름을 해갈해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종들이 그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으면 자신이 스스로 거룩함을 나타내십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을 친히 해 나가십니다. 물론 택한 종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면 심히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지라도 인간의 불순종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 앞에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거룩함만을 나타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고뇌하셨습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군병들을 대적해야 하는가? 아니면 순순히 잡혀서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가? 이 문제를 놓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결단으로 말미암아 인류구속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나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고정관념, 나의 자존심, 자기 의, 나의 경험을 온전히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자 투쟁해야만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나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주님의 구원역사에 거침돌이 되지 않고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가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가 그 이유를 배웠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을 했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 가운데서 구원 역사를 이루고자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여름 수양회에 한 명의 양이라도 초청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몸살을 앓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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