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022년 민3강(5,6장)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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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민수기 제 3 강
말씀 | 민수기 5:1-6:27
요절 | 민수기 5:3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진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진영을 성결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결은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자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공동체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투쟁을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십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진영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같이 행하여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6장 마지막 부분에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려면 그들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더럽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영이 부정하다면 복 받을 그릇을 엎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진영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은 개인뿐만 공동체의 거룩함이 중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거룩하도록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서로 죄를 고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가운데 사탄의 시험에 빠져서 죄를 짓지 않도록 서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무너뜨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다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져다가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엎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수 7:13).” 그들이 아간의 죄를 처벌하고 진을 깨끗하게 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너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여기서 ‘너희’는 구원 받은 성도 각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에 계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 각 사람의 내면에 거주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거나 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근심하며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내면이 청결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기뻐 춤추시며 역동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능력 있는 인생을 살며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으면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사장에게 주는 것은 제사장의 것이 됩니다. 죄 값을 드리고 배상을 함으로 신자의 윤리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자를 하나님을 믿은 뒤 용서하고자 면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유괴-살해범이 “전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환하게 웃는 장면, 그래서 전도연이 패닉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동시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가 되어야 하나님의 공의가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배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하나님 안에서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점에서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의 윤리를 회복함으로 공동체의 품격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의심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이 튼튼해야 사회가 건강합니다. 부부 사이에 의처증, 의부증이 생기면 하나 되기 어렵습니다. 부부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 사탄이 역사하기 쉽습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자녀들이 불안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심의 법을 두심으로 부부사이의 관계가 건강하게 회복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백한 아내를 의심한 남편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의심의 법을 통해서 숨겨진 죄를 드러내며 부당하게 정죄 받는 자를 옹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남성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아내가 부정한 일을 행했다고 의심되면 학대하고 쫓아버렸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은 의심의 법을 통해서 결백한 여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심의 법을 통해서 가정의 순결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심의 법을 통해서 부부간에 의심을 해소하고 신뢰 속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6장에서는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이 지켜야 할 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 ‘헌신된 자’, ‘바쳐진 자’란 뜻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서 출생 때부터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에 사는 모든 백성들도 자신이 원하면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가 있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일에 남녀차별이 없습니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삼손은 단 지파인데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사무엘도 에브라임 지파인에 나실인으로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금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술 취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이방 종교는 술 취한 환각적인 상태에서 주술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깨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섬겨야 합니다. 나실인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긴 머리 털에서 능력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데릴라의 유혹으로 머리털을 밀자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실인의 정체성을 상실해 버리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서 맷돌을 돌리는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나실인은 시체에도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부모나 형제자매가 죽어도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나실인은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도록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고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온 유대와 요단강 저편에서까지 사람들이 와서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나실인 제도를 두셨을까요? 아마 제도권에 있는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타락할 때 다른 자파에서 헌신된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레위인이 첩이 있었습니다. 레위인이 한 가정과 우상의 제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실인은 성막에서 섬기고, 제사장을 보조하고, 예배를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시고 구속 역사를 펼쳐 나가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영적으로 목마른 방황하는 캠퍼스 지성인들을 섬길 목자를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옛날에는 짐승을 잡아 바쳤는데 우리 몸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산 제물로 받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치면 그걸 거룩한 제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거룩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용도를 위해서 쓰이는 것입니다. 똑 같은 그릇도 하나님께 제사용으로 드리면 그 다음부터 그릇이 거룩하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헌신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몸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나를 거룩한 제물로 받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기 학업이나 직장이나 이런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눈앞에 성취를 놓고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성취감이 짧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 목표를 정하고 또 성취하고 이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가끔 스치는 게 허무함입니다. 내가 뭐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일만 하다 가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그 목적을 발견할 때, 비로소 내가 참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느끼고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으니까 그 용도를 알아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도록, 나를 맡겼을 때, 나를 세상에 보내신 이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가치가 생깁니다. 우리 인간의 가치는 나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쓰이느냐가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신을 맡기면 고맙다 내가 너를 내 용도를 위해서 쓰겠다 하시며 거룩한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 수가 있고 특별히 목자가 되어 영원히 남을 영혼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죽어도, 세상에 왔다가 죽었는지도 아무도 모를 그럴 사람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이면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께 선심 쓰듯이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 가치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같은 사람이 헌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고맙다, 나의 헌신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큰 특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헌신해야 할까요? 그 답이 로마서 12장 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처음에는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옳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조금 있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보면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금 깊어지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니까 또 좀 지나면 하나님의 뜻이 정말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헌신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분야가 세 개인데 생업과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사역이 있고, 직장 일터 사역이 있고, 그다음에 교회 사역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어떻게 축복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제사장이 이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은 아론 계열의 제사장에게 맡겨진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복을 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늘 문을 열어서 차고 넘치도록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복은 자손이 번성하고(창28:3; 신1:11), 풍요로운 땅을 주시며(창35:12; 48:3), 건강과 장수와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것 등 실제적인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내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제사장은 다만 복을 빌 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축복의 도구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차고 넘치는 복을 받고 또 우리도 풍요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민수기 5:1-6:27
요절 | 민수기 5:3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진영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군대가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은 진영을 성결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결은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자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공동체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투쟁을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십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진영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같이 행하여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실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6장 마지막 부분에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려면 그들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더럽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영이 부정하다면 복 받을 그릇을 엎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진영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은 개인뿐만 공동체의 거룩함이 중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거룩하도록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서로 죄를 고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가운데 사탄의 시험에 빠져서 죄를 짓지 않도록 서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무너뜨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다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져다가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패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엎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수 7:13).” 그들이 아간의 죄를 처벌하고 진을 깨끗하게 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너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여기서 ‘너희’는 구원 받은 성도 각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에 계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 각 사람의 내면에 거주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거나 죄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근심하며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내면이 청결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기뻐 춤추시며 역동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능력 있는 인생을 살며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으면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사장에게 주는 것은 제사장의 것이 됩니다. 죄 값을 드리고 배상을 함으로 신자의 윤리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자를 하나님을 믿은 뒤 용서하고자 면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유괴-살해범이 “전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환하게 웃는 장면, 그래서 전도연이 패닉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동시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가 되어야 하나님의 공의가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배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하나님 안에서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점에서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의 윤리를 회복함으로 공동체의 품격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의심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말씀을 주십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단위입니다. 가정이 튼튼해야 사회가 건강합니다. 부부 사이에 의처증, 의부증이 생기면 하나 되기 어렵습니다. 부부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 사탄이 역사하기 쉽습니다. 부부 사이가 안 좋으면 자녀들이 불안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심의 법을 두심으로 부부사이의 관계가 건강하게 회복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백한 아내를 의심한 남편에 대해서 무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의심의 법을 통해서 숨겨진 죄를 드러내며 부당하게 정죄 받는 자를 옹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남성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아내가 부정한 일을 행했다고 의심되면 학대하고 쫓아버렸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하나님은 의심의 법을 통해서 결백한 여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심의 법을 통해서 가정의 순결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심의 법을 통해서 부부간에 의심을 해소하고 신뢰 속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6장에서는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이 지켜야 할 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 ‘헌신된 자’, ‘바쳐진 자’란 뜻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원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서 출생 때부터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에 사는 모든 백성들도 자신이 원하면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가 있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일에 남녀차별이 없습니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삼손은 단 지파인데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사무엘도 에브라임 지파인에 나실인으로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금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술 취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이방 종교는 술 취한 환각적인 상태에서 주술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깨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섬겨야 합니다. 나실인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긴 머리 털에서 능력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데릴라의 유혹으로 머리털을 밀자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실인의 정체성을 상실해 버리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에게 잡혀서 맷돌을 돌리는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나실인은 시체에도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 부모나 형제자매가 죽어도 장례를 치루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나실인은 철저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도록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고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온 유대와 요단강 저편에서까지 사람들이 와서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나실인 제도를 두셨을까요? 아마 제도권에 있는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타락할 때 다른 자파에서 헌신된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레위인이 첩이 있었습니다. 레위인이 한 가정과 우상의 제사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실인은 성막에서 섬기고, 제사장을 보조하고, 예배를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시고 구속 역사를 펼쳐 나가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영적으로 목마른 방황하는 캠퍼스 지성인들을 섬길 목자를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옛날에는 짐승을 잡아 바쳤는데 우리 몸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산 제물로 받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치면 그걸 거룩한 제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거룩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용도를 위해서 쓰이는 것입니다. 똑 같은 그릇도 하나님께 제사용으로 드리면 그 다음부터 그릇이 거룩하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져서 헌신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몸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나를 거룩한 제물로 받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기 학업이나 직장이나 이런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눈앞에 성취를 놓고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성취감이 짧습니다. 그 다음에 계속 목표를 정하고 또 성취하고 이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가끔 스치는 게 허무함입니다. 내가 뭐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일만 하다 가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그 목적을 발견할 때, 비로소 내가 참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느끼고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으니까 그 용도를 알아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도록, 나를 맡겼을 때, 나를 세상에 보내신 이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가치가 생깁니다. 우리 인간의 가치는 나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쓰이느냐가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신을 맡기면 고맙다 내가 너를 내 용도를 위해서 쓰겠다 하시며 거룩한 제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 수가 있고 특별히 목자가 되어 영원히 남을 영혼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죽어도, 세상에 왔다가 죽었는지도 아무도 모를 그럴 사람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이면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께 선심 쓰듯이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 가치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같은 사람이 헌신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고맙다, 나의 헌신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큰 특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헌신해야 할까요? 그 답이 로마서 12장 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처음에는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옳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조금 있다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보면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금 깊어지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니까 또 좀 지나면 하나님의 뜻이 정말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헌신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신하는 분야가 세 개인데 생업과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사역이 있고, 직장 일터 사역이 있고, 그다음에 교회 사역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잡아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어떻게 축복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제사장이 이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은 아론 계열의 제사장에게 맡겨진 임무이자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인격적으로 복을 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하늘 문을 열어서 차고 넘치도록 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복은 자손이 번성하고(창28:3; 신1:11), 풍요로운 땅을 주시며(창35:12; 48:3), 건강과 장수와 원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것 등 실제적인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내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제사장은 다만 복을 빌 뿐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축복의 도구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차고 넘치는 복을 받고 또 우리도 풍요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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