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1년 마태복음 38강(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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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8 강
말씀 | 마태복음 25:31-46
요절 | 마태복음 25:40
양과 염소의 비유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4,25장은 종말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내일을 이야기 하지만 핵심은 오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모든 민족을 모으고 평가하실 분이 오늘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를 만나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종말의 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해 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일까요? 우리가 섬길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천국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예수님은 초림 때는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구원자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심판자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입니다. 종말에 있을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현재까지 역사에 존재했던 사람은 600억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내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예수님도 마지막 심판 때에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염소와 같은 신자와 복음대로 살아내는 양과 같은 신자를 구별해 내십니다. 양은 울음소리가 귀엽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울음소리도 간살스럽습니다. 죽을 때도 보면 양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털을 깎을 때도 양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지긋이 눈을 감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얼마나 나대는지 염소 한 마리 잡으려고 하면 온 마을이 다 시끄럽습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대로 잘 따라오지만 염소는 아주 고집이 셉니다. 양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염소는 뿔과 수염이 있어 주님을 대적하고 교만해 보입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영접하지 않고 비판합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심판을 의식하며 살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에는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라”로 말씀했습니다. 각 사람이 그 몸으로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수많은 등급으로 구분해서 심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심판장이신 예수님은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십니다.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도덕적인 행위를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 다른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3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나님은 의인들을 위해서 창세로부터 준비된 나라 곧 천국을 상속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상속 받으라’는 것은 주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처음부터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때문에 그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이웃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현재 관계맺기 어려운 또는 불화한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서 자란다면 나는 영적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은 왜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될까요? 그들이 복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 ㉢그, '형제들'(35-40 새번역).”
지극히 작은 자는 바로 여기 내 형제들, 자매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신자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태도가 예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지난 주에 골로새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형제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내 곁에서 수고하며 힘들어 하는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연약하고 병든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 돌보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동역자들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개 내리 사랑이라고 양들이나 자녀들은 사랑하지만 동역자들에게는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동역자들은 성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아서 잘 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역자들의 어려움을 볼 때에 섬길 기회가 온 것은 바로 주님을 섬길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의인들이 주님께 한 것은 엄청나게 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한 일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마음도 주시고 실천할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중에 「구두장이 마틴」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마틴은 낮에는 지하 단칸방에서 열심히 구두수선을 하고 밤이면 열심히 성경을 읽는 가난하고 경건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 마틴이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틴, 내일 내가 너를 찾아 갈 것이다.” 다음날 마틴은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신다니” 그는 너무나 기뻐서 방청소를 깨끗이 해 놓고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주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 밖으로 늙은 청소부가 떨면서 거기를 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틴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서 몸을 녹여주고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청소부를 보낸 후에 마틴은 또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시지 않고 창문 밖으로 아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여인이 지나가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마틴은 그녀를 데려와서 따뜻한 수프를 대접하고 자신의 낡은 외투로 아기와 엄마를 감싸주고, 애기 우유 값이라도 하라고 얼마를 줍니다. 여인이 떠나간 후 마틴은 또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제 날이 저물어 가는데 왜 주님이 오시지 않을까? 그때 갑자기 어디서 악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한 소년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가게에서 사과 하나를 훔쳤다가 주인에게 들켜서 매를 맞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틴은 뛰쳐나가서 그 주인에게 말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가게 주인은 소년을 용서해 주었고 그 소년은 마틴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사라집니다.
이제 밤 11, 12시가 되었습니다. 마틴이 기다리던 주님은 끝내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주님은 오시지 않는 것일까?” 마틴은 못내 아쉬워 하며 성경을 펴 들었습니다. 그때 읽은 말씀이 오늘 말씀의 요절인 마태복음 25:40절이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잠시후 자신이 그날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청소부 할아버지, 굶주린 여인, 배가 고파서 사과를 훔친 소년. 그러더니 그들의 배후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들이 바로 나였느니라.”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은 신비한 모습으로 마틴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의 모습으로 마틴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무슨 신비하고 신령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생각보다는 훨씬 더 가까이 그리고 많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십니다. 어린 아이 같이 낮고 연약한 사람들, 우리가 도와주어도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서 섬겨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세상에 살맛을 내고 갈 길을 비추어야 합니다. 일생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면서 기쁨을 누리게 하신 것은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 세상의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존경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음식도 대접하고 비싼 선물도 합니다. 그러나 가난 한 자들, 작은 자들, 어려움에 처한 자들, 죄인들, 모난 자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재판장이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십니다. 캠퍼스 영혼들은 겉으로 볼 때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볼 때 그들은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말라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관계성을 잘 맺지 못하는 문제로 힘들어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어린 양 한 사람을 돕는 것을 주님은 동일시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내게 맡기신 양들을 영혼의 양식인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가 인간이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동되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늘 실천합니다.
마태복음은 1차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에 아주 익숙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주고 지키도록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나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5-17).” 신자의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외적인 증표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는 것은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리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임금 되신 예수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복 받은 자들’과 대조됩니다. 그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임금님은 그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43).” 주님이 도움이 필요할 때에 그들은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신 것처럼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습니다. 교회 생활도 잘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들은 나뿐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딤후 3:2-4).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셔서 부요하게 하신 것은 세상을 더욱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몸을 주신 것은 병든 사람들을 돌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혜와 학식을 주신 것은 우둔한 사람들을 깨우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여주시고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가운데 남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기도로도 남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게 없는 것으로 섬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그 작은 것으로라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은 우상숭배자입니다. 곁에 있는 가난한 형제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저주받을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인들은 그들이 행할 수 있었던 선을 소홀히 여긴 것 때문에 심판 날에 정죄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영벌에 처한 사람들의 잘못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지 않은 잘못 (sin of not doing)’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지극히 작은 형제, 도움이 필요한 동료들을 섬기는 자들이 될 때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과 기쁨은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거부했느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답게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고 돌보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계시는 동안 세리와 창기, 각종 죄인들과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을 섬기셨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합된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길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현재 나에게 하나님께서 섬기기를 원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 사람을 찾아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5:31-46
요절 | 마태복음 25:40
양과 염소의 비유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4,25장은 종말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내일을 이야기 하지만 핵심은 오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모든 민족을 모으고 평가하실 분이 오늘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를 만나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종말의 때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해 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일까요? 우리가 섬길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천국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예수님은 초림 때는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구원자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심판자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입니다. 종말에 있을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현재까지 역사에 존재했던 사람은 600억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내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예수님도 마지막 심판 때에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염소와 같은 신자와 복음대로 살아내는 양과 같은 신자를 구별해 내십니다. 양은 울음소리가 귀엽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울음소리도 간살스럽습니다. 죽을 때도 보면 양은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털을 깎을 때도 양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지긋이 눈을 감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얼마나 나대는지 염소 한 마리 잡으려고 하면 온 마을이 다 시끄럽습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대로 잘 따라오지만 염소는 아주 고집이 셉니다. 양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염소는 뿔과 수염이 있어 주님을 대적하고 교만해 보입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영접하지 않고 비판합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심판을 의식하며 살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에는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이라”로 말씀했습니다. 각 사람이 그 몸으로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수많은 등급으로 구분해서 심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심판장이신 예수님은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십니다. 그 중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도덕적인 행위를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 다른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3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나님은 의인들을 위해서 창세로부터 준비된 나라 곧 천국을 상속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상속 받으라’는 것은 주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처음부터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때문에 그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이웃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현재 관계맺기 어려운 또는 불화한 상태에 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기며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서 자란다면 나는 영적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은 왜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될까요? 그들이 복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 ㉢그, '형제들'(35-40 새번역).”
지극히 작은 자는 바로 여기 내 형제들, 자매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제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신자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태도가 예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지난 주에 골로새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형제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내 곁에서 수고하며 힘들어 하는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연약하고 병든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 돌보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동역자들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개 내리 사랑이라고 양들이나 자녀들은 사랑하지만 동역자들에게는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동역자들은 성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아서 잘 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역자들의 어려움을 볼 때에 섬길 기회가 온 것은 바로 주님을 섬길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의인들이 주님께 한 것은 엄청나게 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한 일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할 마음도 주시고 실천할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중에 「구두장이 마틴」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마틴은 낮에는 지하 단칸방에서 열심히 구두수선을 하고 밤이면 열심히 성경을 읽는 가난하고 경건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 마틴이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틴, 내일 내가 너를 찾아 갈 것이다.” 다음날 마틴은 설레는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신다니” 그는 너무나 기뻐서 방청소를 깨끗이 해 놓고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주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 밖으로 늙은 청소부가 떨면서 거기를 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틴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서 몸을 녹여주고 따뜻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청소부를 보낸 후에 마틴은 또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시지 않고 창문 밖으로 아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여인이 지나가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마틴은 그녀를 데려와서 따뜻한 수프를 대접하고 자신의 낡은 외투로 아기와 엄마를 감싸주고, 애기 우유 값이라도 하라고 얼마를 줍니다. 여인이 떠나간 후 마틴은 또 주님을 기다립니다. 이제 날이 저물어 가는데 왜 주님이 오시지 않을까? 그때 갑자기 어디서 악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한 소년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가게에서 사과 하나를 훔쳤다가 주인에게 들켜서 매를 맞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틴은 뛰쳐나가서 그 주인에게 말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가게 주인은 소년을 용서해 주었고 그 소년은 마틴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사라집니다.
이제 밤 11, 12시가 되었습니다. 마틴이 기다리던 주님은 끝내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주님은 오시지 않는 것일까?” 마틴은 못내 아쉬워 하며 성경을 펴 들었습니다. 그때 읽은 말씀이 오늘 말씀의 요절인 마태복음 25:40절이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잠시후 자신이 그날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차례로 나타났습니다. 청소부 할아버지, 굶주린 여인, 배가 고파서 사과를 훔친 소년. 그러더니 그들의 배후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들이 바로 나였느니라.”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주님은 신비한 모습으로 마틴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의 모습으로 마틴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무슨 신비하고 신령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생각보다는 훨씬 더 가까이 그리고 많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십니다. 어린 아이 같이 낮고 연약한 사람들, 우리가 도와주어도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서 섬겨야 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세상에 살맛을 내고 갈 길을 비추어야 합니다. 일생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면서 기쁨을 누리게 하신 것은 큰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 세상의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존경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음식도 대접하고 비싼 선물도 합니다. 그러나 가난 한 자들, 작은 자들, 어려움에 처한 자들, 죄인들, 모난 자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재판장이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십니다. 캠퍼스 영혼들은 겉으로 볼 때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을 볼 때 그들은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말라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관계성을 잘 맺지 못하는 문제로 힘들어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어린 양 한 사람을 돕는 것을 주님은 동일시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내게 맡기신 양들을 영혼의 양식인 말씀으로 먹이고 사랑으로 섬깁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가 인간이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동되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늘 실천합니다.
마태복음은 1차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율법에 아주 익숙합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주고 지키도록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나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5-17).” 신자의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외적인 증표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는 것은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리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임금 되신 예수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복 받은 자들’과 대조됩니다. 그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임금님은 그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43).” 주님이 도움이 필요할 때에 그들은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신 것처럼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습니다. 교회 생활도 잘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들은 나뿐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합니다(딤후 3:2-4).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셔서 부요하게 하신 것은 세상을 더욱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몸을 주신 것은 병든 사람들을 돌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혜와 학식을 주신 것은 우둔한 사람들을 깨우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여주시고 믿음을 갖게 하신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가운데 남을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기도로도 남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게 없는 것으로 섬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그 작은 것으로라도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 자기 배만 채우는 사람은 우상숭배자입니다. 곁에 있는 가난한 형제에게 자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저주받을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인들은 그들이 행할 수 있었던 선을 소홀히 여긴 것 때문에 심판 날에 정죄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영벌에 처한 사람들의 잘못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지 않은 잘못 (sin of not doing)’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지극히 작은 형제, 도움이 필요한 동료들을 섬기는 자들이 될 때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과 기쁨은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을 영접했느냐 거부했느냐,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답게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고 돌보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계시는 동안 세리와 창기, 각종 죄인들과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을 섬기셨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연합된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며 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 선교 사역을 감당하다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길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현재 나에게 하나님께서 섬기기를 원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 사람을 찾아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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