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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년 마35강(23:1-39)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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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9회 작성일 20-11-2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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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5 강
말씀 | 마태복음 23:1-39
요절 |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말하는 것은 잘 듣고 다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일곱 가지 화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말씀하시면서 저주받을 일에 대해서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를 구하지만 피해야 할 저주는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듣기 전에 회개할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복음을 제대로 알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전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저 자신을 가르치는 자세로 말씀 앞에 회개하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을 잘 듣고 행하는 삶을 살게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1-4).” 모세의 자리는 성경선생의 자리요 목자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매우 귀하고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자리를 어떤 자세로 섬겼습니까? 그들은 열심히 가르치기는 잘했으나 정작 본인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투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가르치는 일에는 소홀히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사람의 인정을 즐기며 하나님보다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큰 죄악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배운 바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구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 싶지만 그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행동의 변화가 있기 전에 먼저 가치관이나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해 세상 나라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가치관이 바뀐 다음에 중요한 것은 성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뿐더러 정반대의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나의 마음인 것을 깨닫고 말씀 앞에 나의 부패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회개가 있기 까지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서 절망하거나 율법적인 자세로 해결하지 말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상처를 받으셨고 그가 상하심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저주를 주님이 내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죄의 속박과 정죄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성령께서 지적하실 때마다 고백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그를 닮고 싶은 소원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고 그 사랑의 관계가 자라나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양식을 먹고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너비와 길이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엠마오 상의 두 제자가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의 말씀도 들었지만 언제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까? 주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주님이 빵을 떼어 감사기도를 올리시고,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렸을 때 그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던 길에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삶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숯불 위에서 생선을 구어 주시고 떡을 구워 주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주님의 이 사랑에 감격하여 수많은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면서 주님의 양들을 돌보았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던지, 말씀을 듣고 깨달았지만 행하지 않음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던지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게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누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가르치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이마에 달거나 팔에 차고 다녔습니다. 또 옷 술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옷 술은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였습니다. 이 술은 그들이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그들의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민15:38.39). 그런데 그들은 옷 술을 길게 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드러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선생은 한 분이요,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들입니다. 또 우리는 땅에서 아무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십니다. 또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는 1-10절까지의 결론입니다. 결국 모세의 자리는 겸손의 자리요, 섬기는 자리여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높이시고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자라야 합니다. 목자의 권위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삶을 묵묵히 살기를 기도합니다.
 
  13-36절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이라는 말이 7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는 “얼마나 끔찍한 고난이 닥쳐올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당하게 될 고통을 생각하면서 탄식하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왜 하나님께 화를 당하고 말았을까요? 그들이 화를 당하게 되는 근본 이유는 외식 때문입니다. 외식이란 무엇입니까? 척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데 없는 척 하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사랑이 없는데 사랑이 있는 척 하는 것이요, 경건하지 않는데 경건한 척하는 것입니다. 외식은 그들의 진실함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또 그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그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장로의 유전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외식하는 삶을 통해서 양들을 실족하게 했습니다. 천국을 가져오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방해함으로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을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있게 인도합니다. 아무리 죄와 허물이 큰사람일지라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입니다. 출애굽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진멸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는 어찌하든지 그들을 용서해주시도록 40일을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해서 불평하고 원망했지만 모세는 참고 견디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우둔하고 어리석을지라도 깨우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 참된 목자입니다. 무엇보다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깨우쳐주고 영접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입니다(13:52).

  바리새인들은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자신들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이 구원을 받고 제자로 성장하도록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나무는 가을이 되면 꽃과 잎사귀를 다 떨어뜨리고 결국 열매만 남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다 살고 나면 결국 열매만 남을 것입니다. 각 가정교회들이 합심동역해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 제자 삼기를 기도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먼 인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맹세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하나님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비록 자신이 수고했지만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소출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곡식이나 과일뿐만 아니라 상추와 오이와 호박 등도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율법 속에 담겨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 미가서 6:8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중요한 내용입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의 알맹이는 놓치고 껍데기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형식 속에 내용을 담아야합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 11절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같은 더러운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손을 씻고 샤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더러운 내면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내면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에 대해서 인정하고 고백하면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죄 씻음도 하나님과 그 언약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내가 더러워진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따라서 삼갈 때 행실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시 119:9).

  27,28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외모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고자 눈물겨운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내면을 가꾸는 데는 소홀히 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면 겉도 깨끗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밉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은 사탄의 자식들이 된 그들이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십니다.

  37-39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죄와 그들이 받을 심판을 말씀하시며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38절에서 ‘너희 집’은 성전을 가리킵니다. 사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성전은 ‘내 집’입니다. 그러나 ‘너희 집’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떠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작별인사를 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성전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세상을 떠도는 비참한 신세로 살게 됩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성전 파괴, 예루살렘 파괴를 예언합니다. 39절에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할 때까지”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까지란 뜻입니다. 이 말씀은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시지만 여전히 소망을 끊지 않으셨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지만 소망을 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어떤 영혼이라도 포기치 말고 소망을 두고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가르치지 않아서 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먼저 회개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본을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고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변화되고 성장할 때 내가 섬기는 양들이 변화되고 이 교회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계속해서 쓰임 받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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