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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년마34강(22:15-46)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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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5회 작성일 20-11-2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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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4 강
말씀 | 마태복음 22:15-46
요절 | 마태복음 22:37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두 당사자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짝 사랑도 당사자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 이웃도 섬길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모습들을 보는 것이 기쁩니다. 고난 속에서 꽃피운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사람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드러내는 진리의 빛을 보고 함께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15-22).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임금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들은 흑백논리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했습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그들이 데리고 온 헤롯 당원들이 그를 체포할 것입니다.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습니다.

  황제는 세금을 거두어 도로를 만들고, 수도 사업을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의 도움으로 교통, 통신, 국방, 교육, 근로, 주거, 의료 등 많은 부분에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으면 국가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집안 방역도 해주고 재난 지원금도 줍니다. 우리가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들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 시민으로서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지혜와 총명과 힘을 주셔서 일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세금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감사의 표현으로 십일조와 헌금도 드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둘째, 부활신앙은 무엇인가?(23-33) 같은 날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모세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서, 그 후사를 세워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장가를 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므로, 아내를 그의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해서, 일곱이 다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맨 나중에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모두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현세적인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현실의 것만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했습니다. 사두개인들 가운데는 산헤드린 공회원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았지만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내면은 공허했습니다.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허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즐기고나 죽자”라고 생각하며 쾌락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국민의 61%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일상생활도 코로나 19 이전의 53%로 위축되었습니다(목회데이터연구소72호). 죽음에 대한 불안이 그만큼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신앙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9,30).” 그들은 성경을 많이 배웠다고 하는데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성경을 배우는데 모른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성령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야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배우지 않으면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두고 말하면서, 아직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묻는 중에 나온 출애굽기 3:6 말씀입니다. 아주 흔히 듣던 이야기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의 영적인 눈이 떠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부활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어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이는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들과 교제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이 있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교회와 신학 포럼에서 발표한 장동민 교수의 글을 재인용합니다.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그의 책 『기독교의 발흥』과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에서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어떻게 300년 만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될 정도로 성장했는지를 탐구했습니다. 로드니 스타크, 손현석 역, 『기독교의 발흥』 (서울: 좋은씨앗, 2016); 로드니 스타크, 허성식 역,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0)
 그는 교회가 처음 시작하였을 당시 6천만 로마제국 인구 가운데 단 1,000명에 불과하였는데, 주후 350년이 되었을 때 전 인구의 56.5%인 3천4백만 명이 기독교인이었다고 추산합니다. 기독교의 세계주의와 평등사상, 순교적인 삶과 활발한 선교활동 등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특이할만한 것이 기독교인의 긍휼 사역입니다. 기독교인들 간에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앙의 경계를 넘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자비의 손길을 뻗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로마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합니다.

  특히 주후 165년 천연두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기독교인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빛났습니다. 이 전염병은 15년 동안 지속되면서 로마제국 인구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의 생명을 앗아갔다고 전해집니다. 부자와 행정관과 의사들과 지역의 사제들마저도 자신들의 생명을 위하여 피신해 숨었지만, 기독교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돌봄으로써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전염병이 종식된 후 한 사제가 교구민에게 쓴 편지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우리 형제들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결코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서로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봤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의 필요를 살피면서 그들을 섬겼다. 그리고는 그들과 함께 이생을 조용히 행복하게 하직했다. 이웃의 질병을 자신이 짊어지고 그들의 아픔을 기쁘게 받아 주다가 이들도 환자들로부터 병이 전염되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스 주교,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p. 177에서 재인용.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돌봄으로 살아남은 비율이 높았을 뿐 아니라, 이들의 자비로움에 감동한 사람들의 대규모 개종이 일어났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코로나 19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섬길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섬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들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34-40).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이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하나님은 우리를 전폭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딴 데 두고 몸으로만 섬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생각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이요,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면서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인격으로 사랑해야할 유일한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함께 사랑합니다. 나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5-6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탐심은 무질서한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좋아하고, 하나님보다 외모를 더 중시하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상들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전 존재로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다하여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합니다. 틈만 나면 자기를 가꾸고 치장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몸이 아프면 약을 먹습니다. 몸에 좋은 것이라면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란다고 하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저는 코로나 19로 인해서 어려운 상황에서 목자님들이 사랑하기에 힘쓰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감사가 되었습니다. 병들고 힘들어 할 때 누군가 도움을 주고 격려해 주면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저도 코로나 19확진을 받고 생활치료를 받을 때에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의 사랑과 섬김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받으니 면역력이 높아져서 휴유증 없이 곧 나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코로나 19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이 고난을 잘 견디어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사랑을 영접함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목자님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맛을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그러자 아무도 예수님께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날부터는 그에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다윗보다 선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뜻을 알고 섬기고자 하는 소원과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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