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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mt31m(21:1-22)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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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3회 작성일 20-10-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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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31 강 
말씀 | 마태복음 21:1-22
요절 | 마태복음 21:5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기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기목숨을 대속물로 드리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겸손한 왕이요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나귀를 타십니다. 예수님은 백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1-11), 성전을 깨끗이 하심 (12-17),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8-22)으로 그의 주권과 주되심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왕이요 주되심을 깊이 영접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첫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1-11).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말하여라. 그리하면 곧 내어줄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자 그 주인은 나귀와 새끼를 내어 주었습니다. 나귀는 오늘날로 하면 자가용과 같습니다. 우리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주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내어드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삶에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주인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시간이나 생명이나 자식까지도 내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일정 기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청지기임을 알 때 주인이 필요로 하실 때 내어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이나 재산이나 가족이나 재능 등 모든 것이 사실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지혜와 힘을 주셨습니다. 빈 손으로 세상에 온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것들을 공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욥은 여러 명의 자식을 거느린 큰 부자였는데, 사단의 고소로 하루아침에 모든 소유와 자식들을 잃게 됩니다. 몸에는 욕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그의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우리는 내가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내 뜻대로 살 때 결국 죄와 사탄의 종노릇을 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을 내 마음의 왕좌에 모셔들이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내 마음이 그의 다스림을 받고, 그와 바른 관계를 맺고, 그의 뜻을 따라 살 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마 6:33).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찾고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오 주인이심을 믿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내 뜻보다 조금 더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알고 섬기는 사람은 내 소득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감사함으로 드립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주관자이신 것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청지기의 삶입니다. 또한 내 시간의 십일조를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드리며 사는 것도 좋은 삶의 태도입니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주에 한 번은 내어드렸습니다(롬 16:5). 루디아는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서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행16: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 자매들가 눔바와 그 부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들도 있었습니다(골4:15). 그들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자기의 집을 주일에 한 번 내어드릴 때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우리도 나의 것을 내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걸어오셨지만 1.6Km 앞에 있는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고자 하십니다. 이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왕이신데 겸손하십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멍에를 메는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날마다 백성들의 짐을 지는 분으로 나타내십니다. 시편 68:19은 찬송합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셀라).” 우리는 무거운 죄짐을 지고 인생살이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십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나의 죄의 짐, 인생의 짐을 져주시기 때문에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의 죄를 자백할 때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 결과 평강과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 죄사함을 받은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이 나의 집, 나의 시간, 나의 자동차, 나의 재능을 쓰고자 하실 때 나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이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위에 올라타셨습니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까지 오는 무리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서 ‘무리의 대부분’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죄로 고통하는 자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정하고 감격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주민들과 구별됩니다. 그들이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폈다는 것은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순종과 충성을 다하겠다는 표시입니다.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여 다스려줄 다윗 같은 왕을 애타게 기다렸고 이제 그 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성이 소동하였습니다. 이는 누구냐? 무리가 대답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예루살렘 성 사람들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을 때도 소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입성하시자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거룩한 성의 백성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주십니다.

  둘째, 성전을 깨끗이 하심 (12-17).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13).
멀리서 성전으로 와야 하는 사람들이 양을 끌고 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그들에게 편의를 봐주어 양을 팔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비둘기도 팔았습니다. 또 로마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의 세겔로 바꾸어야 합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동전인 세겔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환전비용을 챙겼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팔면서 많은 이득을 취하였습니다. 한 랍비는 비둘기 값이 너무 비싸서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기가 부담스럽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누리기보다 무언가를 빼앗긴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빼앗는 분으로 새겨지게 됩니다. 그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여기서 ‘성전 안’은 구체적으로 이방인의 뜰을 가리킵니다. 이 뜰에는 이방인의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하는 행위를 허용함으로서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의 탐욕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전을 청결하는 사건을 넘어서 성전 제사를 금지시키는 일입니다. 성전 제사 제도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죠.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 즉 세상과 구별된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결단하고 헌신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도의 교제가 있고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넘치게 응답하시는 곳이요 풍성하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고난과 환난이 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 나아와 위로를 받고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격려를 받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과 그 안에서 행해지는 형식적인 제사를 없애버리시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역사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성전을 통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산길을 만들고자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지성소의 성막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27:51).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성막이 찢어짐으로서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제 신자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이제는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가 기뻐하시는 산제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존경을 받을 정도로 성품이 선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이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이전에는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던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께 나아갈 때 고침을 받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였습니다. 그들은 노할 일이 아닌데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약속된 메시아라고 찬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찬양이 뜻하는 바를 아느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 아이와 함께 나아가 그를 예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가정교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그들에게 신앙을 전수할 수 있고 그들을 제자로 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셋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18-22).

  예수님은 제자들과 베다니에서 밤을 지내셨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고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셨습니다. 본래 무화과 잎이 무성하면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지금 성전의 모습과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대하신 열매는 공의와 인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성전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심판 예고입니다.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각자가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 외에 중보자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것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성전이 있는 시온산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여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누구든지 구하는 것을 받는 새로운 성전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전에서 기도하고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는데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1,23).”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때에 산 같은 장애물이 있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건물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열매 맺기 어려운 가운데서 믿음의 기도와 사랑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요 주이십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섬기셔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더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덧입은 사람들로서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놓고 주님의 구원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왕이시지만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겸손과 평강의 왕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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