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mt30m(20:17-34) 섬기러 오신 에수님(조웨슬레)
페이지 정보

본문
2020년 마태복음 제 30 강
말씀 | 마태복음 20:17-34
요절 | 마태복음 20:28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열 두 제자들도 서로 으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에서 큰 자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전혀 다릅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인가? 배우고 큰 사람이 되고자하는 영적 소원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지난 번(16:21, 17:22~23)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능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지만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 고난의 때에 믿음을 지키도록 도우시고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십자가와 부활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에 걸쳐서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은 지난번 영적 소원으로 천국 비유를 듣고 그 뜻을 알고자 질문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심을 갖고 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셔야만 하시는가? 묻고 그 의미를 깨닫고자 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묻지를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곧바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영광에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 살로메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이 나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나라에서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지금 예수님은 죽으러 가시는데 영광이나 생각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며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잔’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의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하게 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면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겪습니다. 피와 물을 다 쏟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는 뼈를 꺾어서 빨리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뼈도 꺾지 않으시고 고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이런 고통과 죽음을 통과하신 후에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가장 영광스러우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영광을 누리려면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고난과 죽으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 보좌에 가까운 자리일수록 주와 복음을 위해서 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7,18절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권력욕에 물들어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소화해 낼 수도 없는 자리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2b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나이다.” 할 수 있나이다. 단호한 대답입니다. 어머님의 청탁을 힘입어 높은 자리만 주신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합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과 함께 대학생과 직장인, 취업준비생 등 2030 성인 2,800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성공의 조건’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뒤 밝혔습니다. 그 결과 응답자의 '출세' 하기 위한 필수 조건 1위는 ‘부모님의 재력’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재력이 개인의 역량보다 성공에 중요한 조건이라 여겨지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치맛바람은 무시 못 할 것이나 봅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그 만큼 치루어야 할 희생과 대가가 큰 것입니다. 감당해야 할 부담도 큽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큰 소리를 쳤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되었을 때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밧모 섬에 귀양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자기 맡은 바 일을 다 하고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지위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높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 편 열 제자는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순진무구하던 바돌로메나 안드레조차도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께 가장 충성되게 일했고 헌신했으므로 총리 자리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저희 임의로 주관하는 맛으로 삽니다. ‘주관하다’는 말은 ‘군림하다’, ‘뻐기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되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권세를 부린다’는 것은 ‘권력을 휘두르다’는 의미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세상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헬라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지배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높은 위치에 올라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요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부려먹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합니까?? 말 한 마디에 다른 사람들이 굽실거리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신나는 일입니다. 자신의 존재의미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으뜸이 되고자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제자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도자론 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세상 원리와 정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지위에 앉아서 군림하며 섬김 받는 사람들이 큰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큰 자입니다. 큰 사람일수록 종처럼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품고 섬깁니다. 마치 어머니가 넓은 품으로 자식들을 감싸 안고 돌보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권력의 핵심은 섬김입니다. 권력이 섬김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권력의 남용 혹은 오용이 됩니다.
그러면 힘을 가진 사람이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진정한 위대함은 지위나 직분에 있지 않습니다. 변화된 성품에 있습니다. 비록 낮은 위치에 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길만한 넓은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지만 한 사람도 품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고 섬김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아지고자 투쟁하지만 우리는 낮아지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것처럼 세상에서 힘든 일은 없습니다.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삶으로서 본을 보여주셨고, 또한 그런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과 존귀와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섬기시되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대속물이란 죄악 된 인생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도록 드려진 속죄 제물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인생들을 섬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선한 목자가 되는 법,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는 법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몸과 피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 되셨고 모든 만물 위에 으뜸이 되셨습니다.
29~34절은 맹인을 돕는 예수님의 섬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맹인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자 무리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러 가시는데 천한 것들이 눈치도 없이 소리만 지른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은 그들이 보잘 것 없고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요즘 핫한 이슈중 하나가 “테스형, 세상이 왜이래!“ 하며 부르짖는 나훈아의 신곡가사입니다. 현 정치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가사입니다. 우리가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하루빨리 일상이 회복되고 또한 경제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께 구할 것이 경제 문제, 현실 문제가 우선이 되야 될까요? 물론 이런 현실문제 경제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영적으로 깨어 주님과 더욱 가깝게 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섬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제자들의 관점에서 두 맹인은 무가치한 존재,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눈을 만져주심으로서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맹인들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깜깜했던 세상이 얼마나 밝게 보였겠습니까!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보입니다. 무엇보다 자신들 앞에 계신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따르게 된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직접 예수님을 따른 유일한 기록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맹인들은 눈 뜨기를 간절히 원했고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육체의 눈은 떴지만 영적인 눈은 감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이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원리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를 바라보는 예수님은 몹시 답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가 우리가 영적인 눈을 밝게 뜨고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보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담대하게 걷게 될 것을 구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혀주셔서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0:17-34
요절 | 마태복음 20:28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은 누구나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열 두 제자들도 서로 으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에서 큰 자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전혀 다릅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인가? 배우고 큰 사람이 되고자하는 영적 소원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지난 번(16:21, 17:22~23)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능욕을 당하고 채찍질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지만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 고난의 때에 믿음을 지키도록 도우시고 또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십자가와 부활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에 걸쳐서 말씀하셨건만 제자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은 지난번 영적 소원으로 천국 비유를 듣고 그 뜻을 알고자 질문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심을 갖고 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셔야만 하시는가? 묻고 그 의미를 깨닫고자 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묻지를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곧바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영광에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 살로메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이 나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나라에서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지금 예수님은 죽으러 가시는데 영광이나 생각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며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잔’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의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하게 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면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겪습니다. 피와 물을 다 쏟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는 뼈를 꺾어서 빨리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뼈도 꺾지 않으시고 고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이런 고통과 죽음을 통과하신 후에 왕의 왕이요, 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가장 영광스러우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영광을 누리려면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고 고난과 죽으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 보좌에 가까운 자리일수록 주와 복음을 위해서 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7,18절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권력욕에 물들어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소화해 낼 수도 없는 자리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2b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나이다.” 할 수 있나이다. 단호한 대답입니다. 어머님의 청탁을 힘입어 높은 자리만 주신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합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과 함께 대학생과 직장인, 취업준비생 등 2030 성인 2,800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성공의 조건’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뒤 밝혔습니다. 그 결과 응답자의 '출세' 하기 위한 필수 조건 1위는 ‘부모님의 재력’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재력이 개인의 역량보다 성공에 중요한 조건이라 여겨지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치맛바람은 무시 못 할 것이나 봅니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그 만큼 치루어야 할 희생과 대가가 큰 것입니다. 감당해야 할 부담도 큽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큰 소리를 쳤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되었을 때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밧모 섬에 귀양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3)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자기 맡은 바 일을 다 하고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얻게 될 지위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높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 편 열 제자는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순진무구하던 바돌로메나 안드레조차도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께 가장 충성되게 일했고 헌신했으므로 총리 자리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저희 임의로 주관하는 맛으로 삽니다. ‘주관하다’는 말은 ‘군림하다’, ‘뻐기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되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권세를 부린다’는 것은 ‘권력을 휘두르다’는 의미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세상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헬라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지배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높은 위치에 올라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요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부려먹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합니까?? 말 한 마디에 다른 사람들이 굽실거리고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신나는 일입니다. 자신의 존재의미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으뜸이 되고자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제자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도자론 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세상 원리와 정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지위에 앉아서 군림하며 섬김 받는 사람들이 큰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큰 자입니다. 큰 사람일수록 종처럼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품고 섬깁니다. 마치 어머니가 넓은 품으로 자식들을 감싸 안고 돌보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권력의 핵심은 섬김입니다. 권력이 섬김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권력의 남용 혹은 오용이 됩니다.
그러면 힘을 가진 사람이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진정한 위대함은 지위나 직분에 있지 않습니다. 변화된 성품에 있습니다. 비록 낮은 위치에 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길만한 넓은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지만 한 사람도 품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투정부리고 섬김 받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아지고자 투쟁하지만 우리는 낮아지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것처럼 세상에서 힘든 일은 없습니다.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삶으로서 본을 보여주셨고, 또한 그런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과 존귀와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섬기시되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대속물이란 죄악 된 인생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도록 드려진 속죄 제물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인생들을 섬기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선한 목자가 되는 법,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는 법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몸과 피를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 되셨고 모든 만물 위에 으뜸이 되셨습니다.
29~34절은 맹인을 돕는 예수님의 섬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 맹인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자 무리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러 가시는데 천한 것들이 눈치도 없이 소리만 지른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은 그들이 보잘 것 없고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요즘 핫한 이슈중 하나가 “테스형, 세상이 왜이래!“ 하며 부르짖는 나훈아의 신곡가사입니다. 현 정치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가사입니다. 우리가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하루빨리 일상이 회복되고 또한 경제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께 구할 것이 경제 문제, 현실 문제가 우선이 되야 될까요? 물론 이런 현실문제 경제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영적으로 깨어 주님과 더욱 가깝게 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섬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제자들의 관점에서 두 맹인은 무가치한 존재,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눈을 만져주심으로서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맹인들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깜깜했던 세상이 얼마나 밝게 보였겠습니까!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보입니다. 무엇보다 자신들 앞에 계신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따르게 된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직접 예수님을 따른 유일한 기록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맹인들은 눈 뜨기를 간절히 원했고 예수님을 통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육체의 눈은 떴지만 영적인 눈은 감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이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원리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적인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를 바라보는 예수님은 몹시 답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가 우리가 영적인 눈을 밝게 뜨고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영적인 세계를 밝히 보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담대하게 걷게 될 것을 구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혀주셔서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인생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첨부파일
-
2020마태복음-30m조웨슬레.hwp (23.0K)
0회 다운로드 | DATE : 2020-10-18 17:00: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