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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mt29m(19:23-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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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8회 작성일 20-10-1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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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29 강
말씀 | 마태복음 19:23-20:16
요절 | 마태복음 20:16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우리는 지난 주 영생을 얻기 원했던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떠난 것을 압니다. 그가 떠나간 후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하며 무슨 보상이 있을 것인지 묻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공로주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받을 상급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복음의 일꾼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제자들이 받게 될 보상(23-3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재물을 쌓아 둔 사람은 재물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보다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재물이 주는 만족을 추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난 부자 청년처럼 세상 보화를 움켜잡은 손을 놓지 못하며 세상과 함께 멸망의 길을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제자들은 몹시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의 의지로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부자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돈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합니다. 이로 인해서 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는 구원이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8,9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를 볼 때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 예수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한 자들에게 어떤 상급을 약속하십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들이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셔서 왕 노릇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100배나 받는다고 했습니다(막10:30). 100배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자에게 주시는 최대한의 보상입니다. 또한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박해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축복만 있으면 사람이 안일해지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사라집니다.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 박해도 주십니다. 우리는 위기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칠고 험한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됩니다. 갈등과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인내와 용서를 배우게 됩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다가 인생에 실패를 만나거든 좌절하지 말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실패 속에서도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는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전 인생과 소유한 모든 것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을 얻는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쌓아 두면 하늘나라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시고 나서 한 가지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특권의식과 공로의식을 갖는 것은 제자로서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런 행위 자체가 영생을 얻을만한 공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둘째, 포도원 품꾼의 비유(20:1-16).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습니다. 천국은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성품과 행동과 태도에 의해 그 특성이 나타납니다. 천국은 천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곳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나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직접 부르러 다니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말입니다. 보통 주인들은 일꾼들을 뽑을 때 일을 잘 하는지 실력을 알아보고, 면접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일할 수 있는 성품을 중요시 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장터에서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품꾼은 복음의 일꾼을,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복음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사명의 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9:37,38). 전세계 인구가 100명이라면 70명은 아직도 추수를 해야 합니다. 이들을 초청하고 섬기려면 일꾼들이 많이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주인은 제 삼시 즉 오전 9시에 나가서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또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하여 들여보냈습니다. 정오와 오후 3시에도 나가 그와 같이 했습니다. 또 오후 5시에도 나가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그들이 말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주인은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주인이 일꾼을 찾는 진정한 이유는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자들에게 할 일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정오와 오후 3시까지도 부름 받지 못한 일꾼들은 이미 고용된 사람들에 비해서 능력이 떨어지거나 연약하거나 게을러서 늦게 나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면 일하는 분위기를 해치고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제 1시간 후면 하루 일과가 끝이 납니다. 더 이상 일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품꾼들이 장터에 서 있었던 것은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차마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통 주인이라면 이런 사람들을 일꾼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그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이 공치는 날이면 처와 자식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이런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고 있는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지금 들어가면 겨우 한 시간 정도 일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하루를 공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품꾼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1시간 정도이지만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다른 사람보다 더욱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하고 세상에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30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은 부족한 자라도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상에서 볼 때 포도원 주인은 돈 버는데 관심이 있기보다 품꾼들의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사람들이 포도원에서 사명을 열심히 감당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한 마디로 주인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일꾼들을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일들이 많지만 생명을 구원하고 제자를 삼는 역사에 쓰임을 받는 것이 은혜요 기쁨입니다.

  날이 저물고 일과가 끝나자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였습니다. 오후 5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게 웬 은혜냐 하면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은혜에 감지덕지하여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감사를 표현했을 것입니다. 먼저 온 자들은 이를 보고 와서 자신들은 그보다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오후 3시에 들어온 사람들은 적어도 두 데나리온은 기대를 했습니다. 정오에 들어온 사람들은 세 데나리온은 받을 수 있겠다고 기대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했던 품꾼들은 열배 이상 일했기 때문에 열 데나리온 정도는 받지 않을까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지기는 모든 품꾼들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그들은 삯은 받은 후 집 주인을 계속해서 원망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들은 처음 포도원에 들어올 때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들어온 사람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하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해서 한 데나리온을 받지만 자신들을 고용해서 일하게 해준 주인에게 감사했습니다. 그 뒤에 들어온 사람들은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터에서 놀며 서성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그들에게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중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보다도 적은 임금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일을 뼈 빠지게 하고도 삯을 받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품삯을 미루지 않고 그날 일한 만큼 주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후한 품삯을 준 주인에게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했습니다. 그들이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주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계산하지 않고,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신들의 임금을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생각했을 때는 너무나 감사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 불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땀 흘리며 수고했던 일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 섭섭했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들과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들은 일한 시간과 분량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동일하게 보상해 준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한 것입니다. 이를 보면 비교의식 때문에 주인이 베풀어준 은혜를 모두 잊어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부터 불행해지게 됩니다. 질투가 생기고 손해의식이 들고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보상은 정당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들어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정확하게 지켰습니다. 오전 9시와 정오와 오후 3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했고, 그들이 기대하던 것 이상으로 보상해주었습니다. 이처럼 주인은 약속대로 보상했고 더욱 넘치게 대가를 지불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데나리온 받은 것에 대해서 주인에게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외에는 주인이 자신의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하든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상관하는 것은 월권행위입니다. 주인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그 권리를 악용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데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주권을 항상 은혜를 베푸시고 선을 행하는데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주권을 남용하거나 악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영접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마다 감사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라서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던 대로 되면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내가 바라던 대로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눈물 나도록 감사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받는 은혜와 축복과 비교하면 받은 은혜를 다 잊어버립니다.

  또한 인간의 마음에는 공로주의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일찍 부름 받아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일수록 자기 의가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행위대로 보응 받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원리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은혜의 원리에 따라 보응 받기 때문에 자신이 수고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보상을 받습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았습니다. 우리는 한 시간만 일한 일꾼도 하루를 지내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에게도 온전한 하루의 품삯을 주는 넉넉한 마음을 품습니다. 설령 자신은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어와서 종일 땡볕에서 일을 했더라도 말입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자기와 같은 품삯은 받는 것을 보며 마치 자기가 행운을 얻은 듯 기뻐합니다. 또 이런 일을 행하는 주인을 불공평하다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칭송하고 그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섬기는 마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나라에서 행복하고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제자는 이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 희생했다고 해서 자기 의로움이나 공로의식을 가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자체가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찍부터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주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또한 일찍 쓰임 받지 못하고 빈둥거리면서 인생을 허비하다가 늦게 부름 받아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일찍 부름 받은 사람이나 늦게 부름 받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십니다. 동일하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교하지 말고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갖는 가운데 그의 마음을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은혜 받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런 행위 자체가 영생을 얻을만한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 여전히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자로 부르심을 받고 헌신하지만 눈에 보이는 외적인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목자로 섬기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죄 가운데 살던 자가 구원을 받고 주님을 배우고 따르는 인생을 살게 된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수고한 뒤에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그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고전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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