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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24년 막23강(14:27-72)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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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0회 작성일 24-09-0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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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3강
말씀 | 마가복음 14:27-72
요절 | 마가복음 14:36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신 후 본격적인 수난이 시작됩니다. 체포 되고 재판 받는 과정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지금껏 죽음을 향해 오신 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연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후 주도적이고 담대하게 고난을 감당하십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다가 예수님이 체포되자 예외 없이 다 도망가고, 특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 원인은 다가올 시험을 기도로 준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배우는 가운데 우리도 깨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은 스가랴 13장 7절 말씀이 성취될 것을 아셨습니다. 여기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목자가 힘들어지면 양들은 믿음을 잃고 흩어지기 쉽습니다. 양들이 흩어지는 것만큼 목자에게 절망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의 수고가 헛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기록된 말씀의 성취로 보십니다. 또한 그때를 위한 대책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고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그들을 맞이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소망과 의지가 제자들의 실패와 나약함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진정으로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정면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래 너 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생각했는지 큰 소리로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몰라도 한참 몰랐습니다.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낫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으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 맘먹은 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장점도 아셨습니다.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실망스럽고 허물로 가득한 실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보통 사람의 장점을 알면 소망이 생기지만, 단점이나 약점을 알고 나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고도 그들을 원하여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알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충격적일 정도로 자신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의 부르심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힘들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셨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인데 기드론 계곡 동쪽 편의 지명으로 원래 올리브(감람) 농장이 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는 지금도 아주 오래된 올리브 나무숲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때 그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군대 귀신을 제압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분의 모습이라고 믿기 어렵습니다. 광풍 앞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야이로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격려하시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다음 날 일어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실 때 두렵고 떨리셨습니다. 죽음을 멀리서 보면 무감각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병들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슬픕니다. 하물며 십자가의 죽음을 보게 된다면 너무나 슬프고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죄인의 죽음, 가장 수치스럽고 저주 받은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생각할 때도 마음이 슬프셨습니다. 3년 동안 자신을 따라다녔지만 연약함으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흩어질 제자들, 스승을 부인하고 힘들어 할 제자들을 생각할 때 슬프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만을 생각할 때 힘드셔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빠’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특별한 신뢰와 친밀함이 담겨 있는 호칭입니다. 품위나 체면이 없는 솔직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마셔야 하는 저주의 쓴 잔을 두고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계신지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이와 같이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털어 놓는 것입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그는 이때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통곡을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저주와 진노를 받아야 하는 아픔을 하나님께 쏟아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이 때’가 지나가게 하실 수 있고, ‘이 잔’을 옮기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의 원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자기를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외양상 실패했지만 내면으로 볼 때 성공한 기도입니다. 성공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실패한 그러나 성공한 기도 셋이 나옵니다. 모세는 요단을 건너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반복해서 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고 냉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순종하여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입성을 맡기고 자신은 신명기를 선포합니다. 바울은 몸에 고통스러운 병이 있어 세 번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바울의 그 애절한 요청은 들어 주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 한마디로 때우셨습니다(고후 12:9). 이렇게 해서 실패한 바울의 기도는 겟세마네 기도를 모델로 삼아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는 부활로 응답되었습니다. 바울의 치유에 대한 요청은 거절되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사역에서 능력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주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광대합니다. 성숙한 기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도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를 피땀 흘려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사오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저의 돌무덤 위에 당신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겟세마네에 도착했을 때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34). 그런데 예수님이 한 시간 정도 기도하고 오셨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사탄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원대로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하지만, 육신은 고난의 잔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육신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심히 피곤하여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자신감에 가득 차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이 연약한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정한 시간, 일정한 장소에서 기도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여러 모양의 시험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함께 왔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습니다. 그가 와서 곧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습니다.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주와 함께 죽겠다던 굳은 맹세는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죄인의 손에 팔리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간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외 없이 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 질문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예수님은 거짓 증언들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안하시고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말에는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기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광 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순간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숨기시더니, 사형 판결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죄인의 손에 팔리지만, 마지막 날에는 모든 죄인들이 예수님의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지만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이 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도 한 여종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베드로를 재판하는 검사는 대세사장의 여종입니다. 종이며 여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집에서 가장 권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종은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추궁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3:14).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걸 얼마나 영광스럽게 여겼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여종의 말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며 부정합니다. 여종이 두 번째로 베드로를 예수님의 ‘도당’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다시 부인하였습니다.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세 번째 그를 예수님의 도당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아예 저주하면서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입니다(8:29). 이런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정하였습니다. 실패도 이런 실패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의 진정한 자각이 시작됩니다. 닭이 두 번 울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높게 보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 버려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던 그였습니다. 그 자부심이 다 깨졌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비로소 인정하고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로마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고도 굉장히 수치스러운 과거입니다. 그런데도 저자가 이것을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장관 지명자들이 과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자식의 병역 문제나, 부동산 문제 등으로 곤욕을 치르다가 결국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러한 치부를 자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 수치스러운 실패를 덮을만큼 넓고 컸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롬 5:20).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 실패로 지난 모든 것을 마감하고 회한의 일생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끝나도 너무 비참하게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무덤 가의 흰 옷 입은 청년이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왔던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예수님은 부활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먼저 베드로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부활의 목격자들의 순서를 나열하고 있는데 첫 번째가 ‘게바’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저주하며 부인한 제자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신 이유가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다시 사신 주님을 뵈올 면목이 없었고 그 안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신 주님은 그를 품으시고 디베랴 호수가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영원한 상처인 ‘세 번 부인’을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상쇄시켜 그의 죄의식과 상처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끄집어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그의 사명과 권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과거의 수치를 끄집어내어 후대에 알리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크신 주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패를 극복하게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할 수도 있는 시험과 연약함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세우신 사실을 통해 많은 위로와 소망을 보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고난 앞에서 깨어 기도하는 것만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는 길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닥치자 열한 제자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홀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난을 주도적으로 감당하실 수 있었을까요? 깨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소원을 영접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잔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것만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친 제자들과 특히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정한 베드로는 때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이탈하거나 패잔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시키시기 때문에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는 확신과 소망을 줍니다. 우리가 새 학기를 맞이하여 과거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앞에 있는 목표를 붙잡고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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