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22강(14:1-26) 언약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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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2강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4
언약의 피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예루살렘에 계셨던 일주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11장-16장). 그 중에서도 14장과 15장은 3일 동안 벌어진 일들입니다. 24시간 동안 이루어진 유월절 만찬, 체포 되심, 심문 받으심, 처형 당하심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4:12-15:47). 이는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예고하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4:49,16:7).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시기까지 모든 과정을 예수님이 주도하고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흘리신 언약의 피와 나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지만 민란이 날까 두려워 명절에는 하지 않고자 계획을 짰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이 아니라 다른 날에 죽는다거나 나무에 달리지 않고 돌에 맞아 죽는다면 인류를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자의 행동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를 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이렇게 말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일년치 월급에 해당이 되니 3천만 원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돈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져서 얼굴과 몸으로 흘려 내려 사라지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비슷하였습니다. 아깝다 못해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여자에게는 예수님을 향하여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힘을 다하여 향유를 부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예로써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를 언급하셨는데(11:44),이 여자 역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또한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세울 때 하는 의식입니다. ‘메시아’의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면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도 아직 예수님께 기름을 붓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이 그에게 기름을 부은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기름을 부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그에게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위임은 분명하게 이루어졌습니다(1:9-11). 그러나 사람 중에는 누구도 예수님께 기름을 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닌 어느 이름 모를 가련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자신을 위해 기름을 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니 여인의 행위를 기름부음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 엄청난 사랑의 표현을 죽는 메시아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취임식으로 해석해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여자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성경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왕이요 그리스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실 유대인의 왕이십니다(15:26).
그래서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행동을 복음과 같게 보십니다. 복음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부어버린 여자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의 죽음이 그처럼 소중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행동을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자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삶 속에서 제대로 해석해 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여자처럼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인의 헌신과 예수님의 죽음을 물질적인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면 허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가치관만으로 보면 섬김은 일방적인 희생이고 손해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허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수한 희생 없이 사람들은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아낌없는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여인의 헌신이 만국에 전파되었듯이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는 부활하셨고 새 시대의 장을 여셨습니다. 이 여자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이름도 없이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소중한 향유, 즉 물질과 시간과 은사를 주와 복음을 위하여 쏟아 부은 분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 사모님들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회자될 것입니다.
한편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줄까 그 기회를 찾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명절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기로 했는데 갑자기 변수가 생긴 것입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월절을 좋은 때로 판단하고 넘기고자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가 유월절 희생양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죽으시기에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유다는 자기 뜻대로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묘하고 신비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흘러갔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종교지도자들의 인간적인 계획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가장 적절한 시점에 대적자의 생각을 쓰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한편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셨습니다.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보통 물동이는 여자가 나르는데 남자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르는 모습은 금방 눈에 띄었습니다. 집 주인은 예수님을 손님이 아니라 자기 집 주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이곳은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데 최후의 만찬 장소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120명이 모여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경험하는 바로 그 방입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다 알고 계시고,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해 나가십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음모나 유다의 배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의 길을 준비하고 하나하나 이루어가셨습니다.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어떤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열둘’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이 가장 신뢰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먹는 자’라는 것은 가장 친근한 사이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구인지 직접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식사를 할 때 누가 그릇에 손을 넣으면 기다립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대등하다는 생각이나 경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셨습니다. 사실 유다만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모든 제자가 배신하고, 특히 목숨을 걸고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던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제자들 형편이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누구나 배반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나도 그들의 위치에 있으면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유다는 제자 공동체에서 돈궤를 맡았습니다(요12:6). 어느 조직이나 돈은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깁니다. 유다는 그렇게 신뢰를 받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지 않고 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신뢰하고 사랑한 제자에게 배신당하심으로 뜻하지 않게 불행하고 비극적인 길을 가시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야 하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작정하신 길을 묵묵히 가십니다. 예수님은 유다에 대하여 실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게 아니라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신이 받을 고난보다도 유다에게 미칠 화가 얼마나 큰지 아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에 걸쳐 배반에 대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자기에게 미칠 화가 얼마나 큰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유월절 만찬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부수어,broke)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떡을 ‘자기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자기의 몸을 만민을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요6:51). 또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 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십니다. 여기서 ‘흘린다’(ἐκχέω,엨헤오)는 말은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καταχέω,카탘헤오)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여자가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처럼(14:8), 예수님도 많은 사람을 위해 힘을 다하여 자신의 피를 부으십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고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열두 제자가 대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과 언약을 맺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쏟아 부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고난 받고 죽으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예수님의 열정(passion)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십니다. 사랑은 열정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피는 언약을 위해서 필요한 제사를 가리킵니다. 옛 언약을 맺을 때, 즉 시내 산 언약도 짐승의 피를 통해서 세워졌습니다(출 24:1-8). 짐승의 피를 받아 그 반은 단에 뿌리고 그 나머지 반은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그렇게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면서 그들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여 그 뜻을 행하는 그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스라엘은 반복하여 범죄하고 우상을 섬기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했습니다. 왕은 눈이 뽑힌 채로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도 무너지고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렘 31:32-34).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가 그 약속된 새 언약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절반은 하나님의 단에 그리고 절반은 믿는 우리들을 향해 뿌려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언약이 세워졌습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씀에는 그 무엇으로도 파기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로 사람들과 맺은 언약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의 진리를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0:9). 예수님의 피가 ‘언약의 피’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자신을 사람들과의 언약에 묶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기 헌신(self-commitment)입니다. 피 흘림으로 언약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옥합을 깨뜨린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향유로 치면 노동자 연봉 백년치인 약 33Kg을 가져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무덤 하나면 집안 대대로 오래 쓸 수 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묘실에는 64구의 뼈가 있었습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일년치 연봉보다, 니고데모의 백 년 치 연봉보다, 정말 귀한 무덤보다 더 귀한 것을 예수님은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지 안 사람들은 자기의 일생을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내가 드린 옥합은 귀한 것이지만 예수님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온 민족을 위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분 자신을 옥합처럼 깨뜨리셨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깨뜨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에서 식사 중에 네 번 포도주를 마시는데 마지막 잔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잔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에 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다짐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기쁨과 지극한 복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잔을 들지 않으심으로 미래를 향해서 열어 두신 것입니다.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마실 잔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언급한 이 잔 즉 십자가의 죽음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언급한 그 쓴 잔을 마셔야만 예수님께서는 먼 미래에 메시아 잔치에서 다시 포도주 잔을 기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닌 승리이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맞이할 미래를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는 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잔을 위하여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성찬식을 행하며 이 성찬이 담고 있는 구속의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께서 마지막 잔을 드시는 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를 믿고 영접함으로 우리가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앞에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를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이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구원은 은혜요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연합하게 하는 언약의 피 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알고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4
언약의 피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예루살렘에 계셨던 일주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11장-16장). 그 중에서도 14장과 15장은 3일 동안 벌어진 일들입니다. 24시간 동안 이루어진 유월절 만찬, 체포 되심, 심문 받으심, 처형 당하심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4:12-15:47). 이는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예고하신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4:49,16:7).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시기까지 모든 과정을 예수님이 주도하고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란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흘리신 언약의 피와 나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지만 민란이 날까 두려워 명절에는 하지 않고자 계획을 짰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이 아니라 다른 날에 죽는다거나 나무에 달리지 않고 돌에 맞아 죽는다면 인류를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였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자의 행동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를 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이렇게 말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일년치 월급에 해당이 되니 3천만 원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돈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져서 얼굴과 몸으로 흘려 내려 사라지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비슷하였습니다. 아깝다 못해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여자에게는 예수님을 향하여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힘을 다하여 향유를 부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 예로써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를 언급하셨는데(11:44),이 여자 역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또한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세울 때 하는 의식입니다. ‘메시아’의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면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도 아직 예수님께 기름을 붓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이 그에게 기름을 부은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기름을 부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그에게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위임은 분명하게 이루어졌습니다(1:9-11). 그러나 사람 중에는 누구도 예수님께 기름을 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닌 어느 이름 모를 가련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자신을 위해 기름을 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니 여인의 행위를 기름부음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 엄청난 사랑의 표현을 죽는 메시아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취임식으로 해석해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여자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성경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왕이요 그리스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실 유대인의 왕이십니다(15:26).
그래서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행동을 복음과 같게 보십니다. 복음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부어버린 여자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의 죽음이 그처럼 소중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행동을 복음을 영접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자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삶 속에서 제대로 해석해 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여자처럼 희생하고 헌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인의 헌신과 예수님의 죽음을 물질적인 가치관으로만 판단하면 허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가치관만으로 보면 섬김은 일방적인 희생이고 손해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허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수한 희생 없이 사람들은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아낌없는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여인의 헌신이 만국에 전파되었듯이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는 부활하셨고 새 시대의 장을 여셨습니다. 이 여자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이름도 없이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소중한 향유, 즉 물질과 시간과 은사를 주와 복음을 위하여 쏟아 부은 분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 사모님들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회자될 것입니다.
한편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습니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줄까 그 기회를 찾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명절에 예수님을 죽이지 않기로 했는데 갑자기 변수가 생긴 것입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월절을 좋은 때로 판단하고 넘기고자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가 유월절 희생양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죽으시기에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유다는 자기 뜻대로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묘하고 신비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흘러갔습니다. 유다의 배신과 종교지도자들의 인간적인 계획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가장 적절한 시점에 대적자의 생각을 쓰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한편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셨습니다.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보통 물동이는 여자가 나르는데 남자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르는 모습은 금방 눈에 띄었습니다. 집 주인은 예수님을 손님이 아니라 자기 집 주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이곳은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하는데 최후의 만찬 장소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120명이 모여 기도하다가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경험하는 바로 그 방입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다 알고 계시고,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해 나가십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음모나 유다의 배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의 길을 준비하고 하나하나 이루어가셨습니다.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어떤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열둘’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요 예수님이 가장 신뢰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먹는 자’라는 것은 가장 친근한 사이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구인지 직접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식사를 할 때 누가 그릇에 손을 넣으면 기다립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대등하다는 생각이나 경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셨습니다. 사실 유다만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모든 제자가 배신하고, 특히 목숨을 걸고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던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제자들 형편이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누구나 배반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나도 그들의 위치에 있으면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유다는 제자 공동체에서 돈궤를 맡았습니다(요12:6). 어느 조직이나 돈은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깁니다. 유다는 그렇게 신뢰를 받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지 않고 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신뢰하고 사랑한 제자에게 배신당하심으로 뜻하지 않게 불행하고 비극적인 길을 가시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야 하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작정하신 길을 묵묵히 가십니다. 예수님은 유다에 대하여 실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게 아니라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신이 받을 고난보다도 유다에게 미칠 화가 얼마나 큰지 아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에 걸쳐 배반에 대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자기에게 미칠 화가 얼마나 큰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22-2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유월절 만찬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부수어,broke)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떡을 ‘자기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자기의 몸을 만민을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요6:51). 또 잔을 가지고 감사기도 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십니다. 여기서 ‘흘린다’(ἐκχέω,엨헤오)는 말은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καταχέω,카탘헤오)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여자가 힘을 다하여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처럼(14:8), 예수님도 많은 사람을 위해 힘을 다하여 자신의 피를 부으십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고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열두 제자가 대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과 언약을 맺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쏟아 부으십니다. 예수님은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고난 받고 죽으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예수님의 열정(passion)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십니다. 사랑은 열정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피는 언약을 위해서 필요한 제사를 가리킵니다. 옛 언약을 맺을 때, 즉 시내 산 언약도 짐승의 피를 통해서 세워졌습니다(출 24:1-8). 짐승의 피를 받아 그 반은 단에 뿌리고 그 나머지 반은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그렇게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특별한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면서 그들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여 그 뜻을 행하는 그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스라엘은 반복하여 범죄하고 우상을 섬기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했습니다. 왕은 눈이 뽑힌 채로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도 무너지고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렘 31:32-34).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가 그 약속된 새 언약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절반은 하나님의 단에 그리고 절반은 믿는 우리들을 향해 뿌려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 언약이 세워졌습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씀에는 그 무엇으로도 파기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로 사람들과 맺은 언약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의 진리를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0:9). 예수님의 피가 ‘언약의 피’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자신을 사람들과의 언약에 묶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결코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기 헌신(self-commitment)입니다. 피 흘림으로 언약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옥합을 깨뜨린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향유로 치면 노동자 연봉 백년치인 약 33Kg을 가져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무덤 하나면 집안 대대로 오래 쓸 수 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묘실에는 64구의 뼈가 있었습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일년치 연봉보다, 니고데모의 백 년 치 연봉보다, 정말 귀한 무덤보다 더 귀한 것을 예수님은 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지 안 사람들은 자기의 일생을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내가 드린 옥합은 귀한 것이지만 예수님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온 민족을 위해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분 자신을 옥합처럼 깨뜨리셨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깨뜨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에서 식사 중에 네 번 포도주를 마시는데 마지막 잔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잔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에 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다짐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잔치가 벌어질 것입니다. 그때는 기쁨과 지극한 복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잔을 들지 않으심으로 미래를 향해서 열어 두신 것입니다.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마실 잔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언급한 이 잔 즉 십자가의 죽음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언급한 그 쓴 잔을 마셔야만 예수님께서는 먼 미래에 메시아 잔치에서 다시 포도주 잔을 기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닌 승리이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맞이할 미래를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는 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잔을 위하여 그 분이 오실 때까지 성찬식을 행하며 이 성찬이 담고 있는 구속의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께서 마지막 잔을 드시는 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흘리신 언약의 피를 믿고 영접함으로 우리가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앞에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를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이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구원은 은혜요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연합하게 하는 언약의 피 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최고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알고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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