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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24년 막18강(11:1-26)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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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5회 작성일 24-07-2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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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8강
말씀 | 마가복음 11:1-26
요절 | 마가복음 11:9,10

나귀 새끼 타고 오시는 왕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자신을 주로 계시하고, 사람들로부터 다윗의 자손으로 환영 받으십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자신이 왕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왕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쓰시겠다고 할 때에 나의 것을 내어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가 쓰시겠다 하라(1-6).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일을 맡기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2,3).”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기 위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미쉬나에는 왕의 말은 아무도 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전통에 의하면 왕이 타는 나귀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것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풀어 끌어 오려고 할 때에 누가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말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대답하니 그들이 허락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왕으로서 나귀 징발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오 우리는 그 청지기입니다. 주님께서 필요해서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것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 나귀 새끼는 나귀들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쓰임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는데 주님께서 나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을 쓰시겠다고 할 때에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주께서 차가 필요해서 나의 차를 좀 쓰시겠다고 하면 기분이 어떤가요? 주께서 나의 것이나 나를 쓰시겠다고 하면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이 왕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데 무엇이 아쉬울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에게 드려 쓰임을 받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 때나 나의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필요를 알고 드려서 쓰임 받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장면이 상징하는 것은 예수님은 왕으로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의미입니다(왕상1:38,44).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스가랴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호산나’는 시편 118편 25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의 축약된 표현입니다. 호산나는 “제발 구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가장 높은 곳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완곡어법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부르는 찬송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의 나라’는 로마를 물리치고 세울 메시아 왕국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그런 군사적 메시아로 알고 환영한 것입니다. 그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시며,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군사적 메시야로 오해할까봐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알리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다 허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메시아로서 자신의 사역을 충실히 이행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힌 죄패는 십자가의 죽음이 왕으로서 섬기기 위해 죽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15:26).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혁명을 시도했다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힘에 패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 안에서 영접을 받지 못하십니다. 마태복음 21:1-11, 요한복음 12:12-19과 달리 마가복음에서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식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왕 되신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도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 때에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왕 되신 예수님이 버림을 받았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아픔을 담담히 감당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오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청지기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둘째, 부패한 성전을 멸하시고 새 성전을 이루실 예수님(11-19).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시장하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습니다.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화과의 경우 잎이 나기 전에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감안할 때, 무성한 잎을 보고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지만 혹시 잎이 나오기 전에 먹을 수 있는 열매 즉 파김(paggim)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예수님이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자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선명하게 들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보니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의 목소리로 시장 바닥과 같았습니다. 이 일은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둘기를 날려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를 내도 사려 깊게 행동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지름길을 찾아 가느라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여기서 강도란 체제를 전복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전복시키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은 성전을 가장 안전한 장소로 여기며, 계속 악을 행하기 위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대신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꾀하였습니다.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이었습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 일행은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다음 날 뿌리째 말라버린 나무를 발견한 사이에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나무가 뿌리째 마른 사건이 성전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위를 상징합니다(사28:3,4; 렘8:13; 호9:10; 욜1:7,12; 미7:1-6). 그러므로 제자들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한 메시지로 들었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전날 예수님은 성전을 다 돌아보셨습니다. 성전 청소를 통해 나타나듯이 성전이 겉만 화려하고 속은 부패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성전을 나가시며 예수님은 성전의 파괴와 멸망을 선언하실 것입니다(13:2).

  성전은 하나님이 만민을 만나시려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집입니다. 만민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고 기도의 영이 있고 죄사함을 받아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모여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자신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향하여 기도하고 응답을 경험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목회자는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한 말씀에 순종하고자 힘씁니다. 성령께서는 신자들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몸이 성전입니다. 신자들이 주일 이후에 각자의 직장과 가정에서 흩어진 교회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자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자 소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신뢰하고, 기도하는 대신에 자기 일로 바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보다는 장사를 하는 데서 더 큰 즐거움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히기를 원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힘든 곳에서 사랑하고, 기뻐하기 힘든 상황에서 기뻐하고, 갈등이 있는 곳에 화평을 이루고,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견디고, 가혹한 환경에서 자비를 나타내고, 선을 행하기 어려운 곳에서 선을 행하고, 계산이 난무하는 곳에서 충성을 보여 주고, 살벌한 일터 환경에서 온유함을 나타내고, 절제하기 어려운 문화 속에서 절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냄새가 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에게 쉼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 쉼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치열함 속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진정성이 있는 예배와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으라(20-25).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놀랐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베드로는 전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에 주목하였습니다. 살아 있던 나무가 생물학적으로 하루 만에 뿌리로부터 마를 수는 없습니다. 민수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확증하기 위해 그의 마른 지팡이에서 하루 만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리게 하신 것과 정반대 현상입니다(민17:8). 뿌리가 마른 나무는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도 생명을 다했습니다. 더 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시는데, 그런 성전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건물 성전의 제사장적 기능은 박탈되었습니다.

  그 성전의 기능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행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새로운 공동체를 이룹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분노를 촉발했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의 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계기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종교지도자들의 저항, 반대, 공격, 박해가 있겠지만, 무화과나무를 뿌리째 마르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산은 성전산을 말하고, 바다는 사해를 말합니다. 성전산 꼭대기 혹은 감람산 꼭대기에서 보면 사해가 보입니다. 성전이 있는 성전산이 사해(죽음의 바다)에 던져지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산’은 요지부동의 장애물을 상징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을 건축하다가 낙심해 있는 스룹바벨에게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슥4:7). 이를 볼 때, ‘이 산’을 던져 사해바다에 던진다는 말씀은 새 성전의 건축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그가 새 성전, 참 성전이 되실 것입니다(15:38).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성전의 가장 큰 역할인 만민을 위한 기도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산이 들려져서 바다에 던져져서 없어지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비유입니다. 아니,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있는 장애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역사를 섬길 때 많은 장애물이 있는 것 같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역사를 완성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 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을 받고 제자로 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구원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 기도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과 대화의 자리로 가서 ‘간구’하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진 신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접속(access)하는 행동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연결만 하면 전세계의 모든 정보를 보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책도 사고 은행 업무도 하고, 교육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고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3,29).” 저는 항상 기도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특별히 여름 수양회와 같이 큰 일을 앞두고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기도에 좀더 시간을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용서의 기도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산을 옮기신 역사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통한 용서가 이제 예수님을 통한 용서의 기도로 대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도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기란 산을 옮기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종교지도자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그들을 위한 대속제물로 주기 위함임을 믿고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오늘 우리에게도 다른 어떤 일보다 나를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기도로 표현되어야 하고, 기도는 용서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구원역사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혐의를 용서하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듯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건물 성전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하나님이 새롭게 세우고자 하시는 성전 공동체입니다. 기도와 용서는 성전의 기능을 대체하게 됩니다.

  시카고의 아이삭 최 선교사님은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홀 어머니와 함께 고생고생을 하셨습니다. 그가 미국에 선교사로 살 때에 당시 소련 개척을 위해서 모스크바에 정탐 여행을 갔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 공항에서 성 피터스버그로 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공항 벽면에 붙은 알림판에 목적지가 “평양”이라는 글짜를 보았을 때 그의 마음에 혈압이 치솟았습니다. 과거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가 방황하다가 공항 밖으로 나가서 한참을 있다가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고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통해서 러시아 백성들, 북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왕이십니다. 그러나 겸손히 우리를 섬기러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우리 대신 고난 받고 죽으십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제 새 성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만민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새로운 성전 공동체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형제를 용서하고 교회를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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