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가복음 2024년 막16강(10:1-31)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7회 작성일 24-07-14 16:08

본문

2024년 마가복음 16강
말씀 | 마가복음 10:1-31
요절 | 마가복음 10:15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모두가 관심이 많은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 그리고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한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 작은 천국을 기대합니다. 그 작은 천국의 주인공은 어린아이입니다. 천국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들어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다 영생 얻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과 천국에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특성과 영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영생의 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1-12).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경로를 바꾸어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베레아로서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는 지역입니다. 6장에서 다뤘던 것처럼, 세례 요한은 헤롯이 전처와 이혼하고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했다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이혼 문제는 이 지역에서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었습니다. 무리가 모여 들자 예수님은 전례대로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물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은 지혜롭게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반문하셨습니다. 그들이 대답합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모세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습니다. 여인들이 버림을 받으면 살 수가 없는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이혼 증서를 쓰도록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혼을 하기 전에 6개월 숙려 기간을 두어 이혼을 방지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결혼 제도를 지키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결혼은 79억 8천만 명 인구 중에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데이비스 윌트라는 유명한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 아내인 바바라 윌트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잘 살다가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이혼한 다음 날, 남편인 데이비스 윌트는 새로운 배우자를 얻기 위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결혼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설문을 작성하고 자신이 바라는 배우자, 아내의 자격 요건을 명시한 후 전국에서 사람을 모아 봤더니 3만 명의 명단이 올라왔습니다. 계속적으로 배우자의 자질을 철저하게 검토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엄선해 보았는데 네 명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의 후보 중에서 첫 번째 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바로 전 아내인 바바라였습니다(한국적 이마고 부부치료 P253). 결혼이 얼마나 오묘하게 이루어졌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가 이미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보완하고 해결하며 살아야 할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삶의 방법과 대화 방법, 욕구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남자가 일에서 만족을 찾는데 비해, 여자는 관계 속에서 만족을 누립니다. 남자가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데 비해, 여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민감합니다. 남자에게 승패가 중요하지만, 여자는 화목한 관계가 중요합니다. 남자가 시각과 후각에 예민하다면, 여자는 청각과 촉각에 예민합니다. 남자는 활동을 함으로써 친구를 사귀는데, 여자는 감정을 나눔으로 친구를 사귑니다. 미혼 남녀는 이런 특성들을 비슷하게 가지고 있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 후에 남자와 여자의 특성으로 인해서 갈등이 일어날 때 이것은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성적인 차이임으로 서로 이해가 필요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결정해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서로 돕는 배필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결혼을 한 후 3년 동안은 상대방의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면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갈등이 본격화 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결점이 사실은 내가 보완해야 할 부분입니다. 상대방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그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다시 ‘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이 결혼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면서 ‘큰 비밀(신비)’이라고 하였습니다(엡5:31,32).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눠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고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결혼은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교회도 예수님을 남편이요 머리로 모신 가족 공동체입니다.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당시 헤롯과 헤로디아 역시 이혼이 성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와 남편을 버림으로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 여인들이 남편을 이혼시킬 권리가 없었던 상황에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파격적입니다. 아마 헤롯과 결혼한 헤로디아를 염두에 둔 말씀일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디아는 남편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당시 법이 어떠하든 간에 이혼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완악한 마음으로 이혼을 정당화 하는 바리새인들에게도 간음했다고 하십니다(눅16:18). 세례 요한은 헤롯의 간음을 책망했다가 목 베임을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헤롯의 누룩이 퍼진 시대에서 예수님은 헤롯의 눈치를 안보고 근본적이고 도전적인 가르침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롯과 헤로디아까지 간음한 것이라고 규정하심으로, 세례 요한의 길을 가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결혼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한 몸을 지키고 살려면 고난일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결혼한 아내가 함께 오래 살면 헌신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년에 황혼 이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된 아내는 오래 될수록 값이 나가는 골동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이들의 것입니다(13-16).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앞 장에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이런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지금 어른들이 이혼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하는데 아이들이 와서 시끄럽게 하였기 때문일까요? 제자들은 아이들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는 해야 할 더 중요한 일들이 있고, 만나야 할 더 중요한 사람들이 있어서 어린아이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보고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겸손하고 절대 의존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힘과 의지로, 선한 행동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선물로, 공짜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어린 아이는 분명히 연약한 점이 있지만, 천국을 ‘받드는’ 태도에서만큼은 모델이 됩니다. ‘받들다’라는 말은 앞에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받드는 자세는 전적인 의존과 수동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적극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힘이나 재물이 없기 때문에 부모에게 의존적입니다. 어른들의 말에 의심 없이 순종하고 들은 대로 행동합니다. 또 어린아이는 궁금한 게 많습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만큼 잘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어른들은 지식이 있고 재산이 있고 권력이 있어서 자기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인생을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전에 계산하고, 따집니다. 다 안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잘 물어보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에 저항하고 갈등하고 충돌합니다. 앞에 나온 바리새인들처럼 결혼의 진리를 배우기 위해 순수하게 묻는 것이 아니라 꼼수가 많고, 정치적이고, 드러난 말이나 행동 뒤에 숨겨둔 의도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스승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분리된 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 화해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성장할수록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또 늙으면 어린아이와 같이 됩니다. 어린 아이같이 될 때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영생을 얻는 길(20-30).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청년이고 부자고 관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선한 행동을 해왔고 또 선한 선생님이신 예수님께 어떤 선한 행동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행동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그가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속여 빼앗지 말라는 말씀을 추가한 것을 볼 때에 그가 재산 형성을 할 때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면 산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100% 완벽하게 지키면 영생을 얻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지킨 것을 귀하게 보고 사랑하시면서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그를 향한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를 힘들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못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더 완벽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계명들을 지킬 때 그 계명들이 핵심적으로 지향하는 메시아를 따르지 않고서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마 5:17)로서 완벽한 구원자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저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 왜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모든 부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지 못했을 것입니다(눅 8:3).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 관원에게 ‘다 팔아 … 나를 따르라’로 하신 것은 그의 경우에 예수님을 따르는데 재물이 결정적인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절대 의존하는 사람의 것인데, 이 청년의 경우 재물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위치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보듯이 예수님 당시 가난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은 그런 시대에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뒤에 보면 재물을 팔지 못할 정도로 재물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살았는지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삶을 공감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지켰다고 자신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사실은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걸 보면, 그가 가진 재산보다 더 귀한 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세상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보상은 예수님 자신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됨을 의미합니다. 자기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로 사는 것이야말로 영생 그 자체이며 확실한 내세의 보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대답하십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는 것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녀가 그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로마서 10:9,10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이 말씀을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에베소서 2:8,9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구원을 선물로 주셔야만 했을까요? 아무도 율법을 지키던지, 선을 행하던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기준에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주십니다. 영생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선물로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은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른 자들에게 귀한 약속을 해 주십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식, 전토’는 현세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버린다는 것은 이 땅에 기반한 삶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는 무력한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100배의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100배’는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는 즉 차원이 다른 보상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 속에서 기존의 가족보다 더 친밀한 가족 공동체를 얻었습니다. 교회가 곧 가족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과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는 것은 육신의 가족관계에서도 얻을 수 없는 놀라운 평안과 안정감을 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8:35). 오늘날 우리가 받는 박해가 무엇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빈곤 자체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빈곤한 삶을 사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또 주와 복음을 위해 받는 박해는 영생의 보증수표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먼저 된 자’는 권력자들, 부자들로서  세상에서 부러움을 받았던 첫째 된 자입니다(9:35). 예수님은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순서가 역전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부족해 보이거나 뒤떨어진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반대로 가진 게 많고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고 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늘 겸손하게 깨어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재물을 상대화시키고 나눌 수 있습니다.

  종종 돈을 좀 더 벌면, 재산이 좀 넉넉하면 하나님 역사에 더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커다란 오해와 착각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와 남편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분복을 누리고, 어린 아이같은 가난한 마음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많은 재물과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07건 1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07 마가복음 이엘리야 74 09-08
106 마가복음 이엘리야 70 09-01
105 마가복음 이엘리야 75 08-25
104 마가복음 이엘리야 60 08-18
103 마가복음 이엘리야 87 07-29
102 마가복음 이엘리야 67 07-29
101 마가복음 이엘리야 66 07-21
열람중 마가복음 이엘리야 78 07-14
99 마가복음 이엘리야 74 07-07
98 마가복음 이엘리야 63 06-30
97 마가복음 이엘리야 151 06-23
96 마가복음 이엘리야 66 06-16
95 마가복음 이엘리야 58 06-09
94 마가복음 이엘리야 61 06-02
93 마가복음 이엘리야 71 05-26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