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12강(8:1-26)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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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2강
말씀 | 마가복음 8:1-26
요절 | 마가복음 8:15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칠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미 배운 것이 아니냐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공통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현재 내게 있는 것을 찾아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악한 영향력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악한 영향력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칠병이어의 기적(1-10).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라는 이방인 지역에 계십니다. 그 무렵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우리는 하루만 굶어도 죽는다는 소리를 하는데 큰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나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자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부모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고자 하시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는데 여기서는 굶주린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사람이 참 우울하고 슬프고 비참해집니다. 먹는 것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배가 불러야 만족을 누리고 행복감을 느낍니다. 배가 불러야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큰 무리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만큼 큰 무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관심이 있었습니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늘 살피고 필요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채워줌으로 사랑을 합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지만 사실은 먹는 것 속에 담긴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먹고 나누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누리는 복된 삶입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의 굶주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예수님은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열 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혼자서 일을 할 때는 한계가 있지만 열두 명이 예수님과 함께 일을 할 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요회가 합심해서 양을 도우면 쉽게 지치지도 않고 각자의 은사를 발휘해서 도움으로 기적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려서 오천 명을 먹인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반복교육이 필요합니다. 다섯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다섯 번 읽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도왔지만 잘 모르겠다고 딴 소리를 합니다. 한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려면 여섯 번을 반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반복해서 교육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이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문제 해결을 밖에서 찾지 말고 너희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을 소중하고 여기고 이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3만2천명이 모였는데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보냈는데 만명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많다고 하시며 300명만 남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00명의 용사들을 통해서 30만의 미디안 용사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이번 동교화랑 연합 수양회도 주님께서 축복하실 것을 믿고 우리에게 있는 은사들을 찾아서 섬기도록 힘을 씁시다. 부족한 은사지만 주님께서 쓰고자 하시면 크게 축복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떡 일곱 덩어리를 찾아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습니다. 먹은 사람이 약 사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칠병이어로 큰 무리를 먹이심으로써 이방인들까지 배부르게 먹이시는 만민의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둘째,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11-21).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기적, 또는 신비한 경험을 말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것보다 신비한 체험을 더 추구할 때, 삯꾼목자에게 사로잡힐 염려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필요를 알 수 있는 마음, 듣는 귀를 달라고 기도해야 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길 수 있도록 어떻게 해야 좋은지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행하시는 많은 기적들을 보았지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것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기도 하고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시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다른 기적을 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이들이 구하는 기적은 영적 음란이요 쾌락주의입니다. 그들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기적을 구하고 신비한 경험을 구하였습니다. 이들은 깊이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열렸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머리가 좋았지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불순종과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민14:21-2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전통에 집착하고 있고, 마음에 만족이 없으니 계속 표적만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영접하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신앙에는 분명히 기적과 같은 신비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적을 경험하면 신앙의 확신과 기쁨을 주고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 자체가 성숙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바르게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매일 정한 시간에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주님과 교제하고, 주일 말씀을 잘 공부하고 소감을 쓰면 삶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어서 배에 떡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비한 기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권력욕을 가지고 방탕한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영적 지도자가 되어 교세가 커지면 자신들이 해 오던 방식, 전통을 고집하기 쉽습니다. 성공한 방식이 우상이 되면 시대가 변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퇴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교권을 얻으면 마음이 높아져서 쾌락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 소원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들이 모이는 모임이었기에 과거에는 연애의 누룩을 경계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부요한 시대가 되었지만 물질주의 누룩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고 모으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살면 안 됩니다. 돈은 벌어서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나누어 주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음란과 탐욕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누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에 소망을 두고 살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나누어 주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선한 사업을 위해서 돈을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제자들은 여전히 먹고 사는 것에 마음이 매여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기에 입만 열었다 하면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주식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등 썩을 양식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아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지금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완악해졌습니다.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누가 큰가 은근히 재고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이적을 보았지만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생각하기보다 기적 자체를 즐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도 그들이 언젠가 깨닫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떡’을 걱정하지만 예수님은 ‘누룩’을 염려하십니다. 제자들은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걱정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그 시대의 오염된 생각과 가치관을 염려하십니다. 예수님은 책망을 통해서 제자들의 마음에 들어가 있는 누룩을 깨끗하게 하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역사의식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가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고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마음으로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떡 한 개밖에 없는 현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돈을 걱정하고 통장에 찍힌 숫자만 세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 써야 할 돈은 많은데 가진 것이 없을 때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흘 동안 굶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앞서 예비 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그를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당면한 문제보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면 같은 말씀을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쓰면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셋째,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치신 예수님(22-26). 예수님이 벳새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이는 비위생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침은 치료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그 눈에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치셨습니다.
맹인의 시력은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맹인이 처음 사물을 흐릿하게 보게 된 것은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르게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종교지도자들이나 가족들, 고향 사람들, 무리들과는 구분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맹인이 처음 안수 받고 사람을 나무처럼 알아보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세속적, 민족적 그리스도 정도로 흐릿하게 알고 있습니다. 세속적 가치관과 영적 가치관이 혼재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안수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라 할지라도 한 번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장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을 볼 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조차도 제자들은 완전히 눈을 뜨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완전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태에 낙심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뜨게 될 소망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1,12)
우리도 제자들처럼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반복해서 진리의 말씀을 듣지만 그렇게까지 못 깨달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성장이 더딥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섞여 있습니다.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단계적으로 고치신다는 사실이 소망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누룩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불평과 불신의 누룩, 쓴 뿌리의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자기중심적인 누룩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거룩하심을 따르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8:1-26
요절 | 마가복음 8:15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어 칠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미 배운 것이 아니냐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공통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현재 내게 있는 것을 찾아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악한 영향력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악한 영향력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칠병이어의 기적(1-10).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라는 이방인 지역에 계십니다. 그 무렵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우리는 하루만 굶어도 죽는다는 소리를 하는데 큰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은 지 사흘이나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자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부모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도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고자 하시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는데 여기서는 굶주린 상태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사람이 참 우울하고 슬프고 비참해집니다. 먹는 것은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배가 불러야 만족을 누리고 행복감을 느낍니다. 배가 불러야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큰 무리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만큼 큰 무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관심이 있었습니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늘 살피고 필요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채워줌으로 사랑을 합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지만 사실은 먹는 것 속에 담긴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먹고 나누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누리는 복된 삶입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의 굶주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예수님은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열 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혼자서 일을 할 때는 한계가 있지만 열두 명이 예수님과 함께 일을 할 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요회가 합심해서 양을 도우면 쉽게 지치지도 않고 각자의 은사를 발휘해서 도움으로 기적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려서 오천 명을 먹인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반복교육이 필요합니다. 다섯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다섯 번 읽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도왔지만 잘 모르겠다고 딴 소리를 합니다. 한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려면 여섯 번을 반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반복해서 교육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이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느냐고 묻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문제 해결을 밖에서 찾지 말고 너희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을 소중하고 여기고 이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3만2천명이 모였는데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보냈는데 만명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많다고 하시며 300명만 남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00명의 용사들을 통해서 30만의 미디안 용사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이번 동교화랑 연합 수양회도 주님께서 축복하실 것을 믿고 우리에게 있는 은사들을 찾아서 섬기도록 힘을 씁시다. 부족한 은사지만 주님께서 쓰고자 하시면 크게 축복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떡 일곱 덩어리를 찾아서 주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거두었습니다. 먹은 사람이 약 사천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칠병이어로 큰 무리를 먹이심으로써 이방인들까지 배부르게 먹이시는 만민의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둘째,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11-21).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기적, 또는 신비한 경험을 말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는 것보다 신비한 체험을 더 추구할 때, 삯꾼목자에게 사로잡힐 염려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필요를 알 수 있는 마음, 듣는 귀를 달라고 기도해야 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길 수 있도록 어떻게 해야 좋은지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행하시는 많은 기적들을 보았지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신 것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기도 하고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시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다른 기적을 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이들이 구하는 기적은 영적 음란이요 쾌락주의입니다. 그들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기적을 구하고 신비한 경험을 구하였습니다. 이들은 깊이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열렸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머리가 좋았지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도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불순종과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민14:21-2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전통에 집착하고 있고, 마음에 만족이 없으니 계속 표적만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영접하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신앙에는 분명히 기적과 같은 신비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적을 경험하면 신앙의 확신과 기쁨을 주고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 자체가 성숙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바르게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는 것입니다. 매일 정한 시간에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주님과 교제하고, 주일 말씀을 잘 공부하고 소감을 쓰면 삶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어서 배에 떡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작지만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비한 기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권력욕을 가지고 방탕한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영적 지도자가 되어 교세가 커지면 자신들이 해 오던 방식, 전통을 고집하기 쉽습니다. 성공한 방식이 우상이 되면 시대가 변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퇴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교권을 얻으면 마음이 높아져서 쾌락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 소원대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들이 모이는 모임이었기에 과거에는 연애의 누룩을 경계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부요한 시대가 되었지만 물질주의 누룩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고 모으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살면 안 됩니다. 돈은 벌어서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나누어 주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음란과 탐욕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누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에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에 소망을 두고 살기보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나누어 주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선한 사업을 위해서 돈을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제자들은 여전히 먹고 사는 것에 마음이 매여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기에 입만 열었다 하면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주식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등 썩을 양식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아주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지금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완악해졌습니다.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누가 큰가 은근히 재고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이적을 보았지만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생각하기보다 기적 자체를 즐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도 그들이 언젠가 깨닫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떡’을 걱정하지만 예수님은 ‘누룩’을 염려하십니다. 제자들은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걱정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그 시대의 오염된 생각과 가치관을 염려하십니다. 예수님은 책망을 통해서 제자들의 마음에 들어가 있는 누룩을 깨끗하게 하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역사의식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가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고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심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마음으로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떡 한 개밖에 없는 현실이 아니라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돈을 걱정하고 통장에 찍힌 숫자만 세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 써야 할 돈은 많은데 가진 것이 없을 때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흘 동안 굶은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앞서 예비 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그를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당면한 문제보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면 같은 말씀을 백 번, 천 번, 만 번이라도 쓰면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셋째,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치신 예수님(22-26). 예수님이 벳새다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이는 비위생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침은 치료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그 눈에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단계적으로 고치셨습니다.
맹인의 시력은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맹인이 처음 사물을 흐릿하게 보게 된 것은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르게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종교지도자들이나 가족들, 고향 사람들, 무리들과는 구분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맹인이 처음 안수 받고 사람을 나무처럼 알아보듯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세속적, 민족적 그리스도 정도로 흐릿하게 알고 있습니다. 세속적 가치관과 영적 가치관이 혼재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안수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라 할지라도 한 번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장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을 볼 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조차도 제자들은 완전히 눈을 뜨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완전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태에 낙심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뜨게 될 소망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1,12)
우리도 제자들처럼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반복해서 진리의 말씀을 듣지만 그렇게까지 못 깨달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성장이 더딥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섞여 있습니다.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단계적으로 고치신다는 사실이 소망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누룩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불평과 불신의 누룩, 쓴 뿌리의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자기중심적인 누룩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거룩하심을 따르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도록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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