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4년 막11강(7:1-37)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페이지 정보

본문
2024년 마가복음 11강
말씀 | 마가복음 7:1-37
요절 | 마가복음 7: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인데 사실은 사람이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말과 행동을 더럽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우리가 깨끗하게 되려면 먼저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1-23).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젊은 청년들입니다. 열두 명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니 먹을 것이 항상 부족하였습니다. 행동이 늦으면 먹을 것이 없으니 제자들은 손을 씻고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율법에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장들에게만 물로 손을 씻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출30:18-21). 바리새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행동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일반인들에게도 적용하였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손 씻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병원에는 손 씻는 방법 여섯 가지 권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마주 대고 문지르기, 손등과 손바닥을 마주 대고 문지르기, 손깍지를 끼고 문지르기, 손가락을 마주 잡고 문지르기, 엄지손가락을 돌려주며 문지르기, 손톱 밑을 깨끗하게 문지르기 등입니다. 세균에 오염되거나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민감하게 손 씻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저도 밖에서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을 씻지 않으면 집 안에서 난리가 납니다. 손을 씻지 않으면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비난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변호해 주셨습니까?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6-9).”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세워진 것입니다. 전통은 정체성과 소속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과도한 전통고수는 공동체의 발전과 혁신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전통에 얽매여 새로운 아이디어와 방식을 수용하기가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배제할 수 있습니다. 전통만을 고집하다 보면 공동체가 경직되고 폐쇄적이 되어 다양성과 창의성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을 계승하되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화와 혁신을 수용하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전통을 고수하되 유연성과 개방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좋은 전통들이 있을까요? 경건의 시간으로 “일용할 양식”을 먹습니다.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하거나 그룹으로 공부하고 소감을 써서 나누는 것도 좋은 전통입니다. 평신도 선교사들을 통한 세계 선교도 좋은 전통입니다. 주일성수라는 전통이 좋은 것이지만 예배가 언제 끝나나, 메시지가 너무 길다라며 마음을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어려운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메시지를 들음으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예배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삶의 원리들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주신 법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씀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단어가 같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에게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부모님께 드릴 수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이를 감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예수님 때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고르반 전통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그들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첫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생각과 삶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전통 아래 있었고, 하나님의 법이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을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앞세우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 사람의 속에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 나갈 때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음식법을 부정하기보다는 음식법보다 도덕법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의적으로 부정한 음식이 여전히 있지만 윤리적 정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 인간을 부정하게 하는 부정한 음식은 없고 모든 음식이 정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나누는 기준도 바뀌었습니다. 음식을 포함하여 사람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정결과 부정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음식물이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소화기관을 거쳐 배설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악한 시선, 악한 의도, 이기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윤리적 지각이 없는 어리석음)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1-23).” 예레미야 17장 9절은 이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이 부정해지고 정결해지는 여부는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잠언은 생명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에서 흘러나온다고 하였습니다(잠4:23).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먼 상태가 더러운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깨끗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정결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3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흠없고 점없는 그 피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쏟으시고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예수님(24-30). 예수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왔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하신 큰 일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3:8).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은 쉬기 위해서, 또는 제자들이 아무리 가르쳐도 깨달음이 없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자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양들에게서 숨길 수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볼 때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구하는 여인에게 매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어머니에게는 딸의 기침 소리가 천둥소리같이 크게 들린다고 합니다. 자녀에게 먹여야 할 떡을 먼저 개들에게 던지는 엄마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구원하기 위해서 힘을 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다음에 이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옳은 소리라고 해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상처가 많은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하며 대들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로 인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뭐라고요, 내가 개라고요!” 사마리아 여인은 냉수 한 그릇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하며 쏘아 붙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님께 “지금 나에게 갑질을 하는거요”라고 말하며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말을 들을 때 정말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의 요구를 그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조차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한 딸의 어머니로서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들개가 아니라 집 안에서 가족처럼 여기는 애완용 개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부스러기만한 은혜만 주셔도 딸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말에 감동을 받으시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29,30).”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고치신 유일한 사건입니다. 우리 속담에 “한 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님이 여자의 대답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의 말’에 ‘능력의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귀신을 쫓아내주신 그 이상의 은혜가 있습니다. 부정함 그 자체였던 여자가 정결하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개와 같던 이방인 여자를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한 이방인 여자를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상 아래 애완견에 불과한 여자를 정식 가족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딸에 대한 이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악한 마음을 가진 부정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의 고백을 할 때 깨끗해집니다.
셋째,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예수님(31-37). 예수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시돈, 데가볼리 지방 모두 이방인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방 선교의 선구자이십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나와 예수님께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귀가 막히고 말을 하지 못하니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또 그 부모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 쨍하고 볕들 날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외진 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탄식’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여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이 사람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앞선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료 방법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그는 나아온 사람이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시각적인 행동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귀는 지금까지 꽉 막혀 있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보면 꽉 막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할 말 다 하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제대로 할 말을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말,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데, 불평, 원망, 불신을 담은 악한 말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어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꽉 막힌 관계를 탄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막힌 귀를 열어주시고 묶여 있는 혀를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더러운 마음이 깨끗하게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의 사랑을 알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함으로 마음이 깨끗해지고 그의 임재를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용서하고 공동체가 정결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7:1-37
요절 | 마가복음 7:20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인데 사실은 사람이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말과 행동을 더럽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우리가 깨끗하게 되려면 먼저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1-23).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젊은 청년들입니다. 열두 명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니 먹을 것이 항상 부족하였습니다. 행동이 늦으면 먹을 것이 없으니 제자들은 손을 씻고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율법에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장들에게만 물로 손을 씻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출30:18-21). 바리새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행동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일반인들에게도 적용하였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손 씻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병원에는 손 씻는 방법 여섯 가지 권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마주 대고 문지르기, 손등과 손바닥을 마주 대고 문지르기, 손깍지를 끼고 문지르기, 손가락을 마주 잡고 문지르기, 엄지손가락을 돌려주며 문지르기, 손톱 밑을 깨끗하게 문지르기 등입니다. 세균에 오염되거나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민감하게 손 씻기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저도 밖에서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손을 씻지 않으면 집 안에서 난리가 납니다. 손을 씻지 않으면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비난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변호해 주셨습니까?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6-9).”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세워진 것입니다. 전통은 정체성과 소속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과도한 전통고수는 공동체의 발전과 혁신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전통에 얽매여 새로운 아이디어와 방식을 수용하기가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전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배제할 수 있습니다. 전통만을 고집하다 보면 공동체가 경직되고 폐쇄적이 되어 다양성과 창의성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을 계승하되 시대와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화와 혁신을 수용하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전통을 고수하되 유연성과 개방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좋은 전통들이 있을까요? 경건의 시간으로 “일용할 양식”을 먹습니다.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하거나 그룹으로 공부하고 소감을 써서 나누는 것도 좋은 전통입니다. 평신도 선교사들을 통한 세계 선교도 좋은 전통입니다. 주일성수라는 전통이 좋은 것이지만 예배가 언제 끝나나, 메시지가 너무 길다라며 마음을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어려운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메시지를 들음으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예배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삶의 원리들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도록 주신 법입니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씀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단어가 같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 생명을 얻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에게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부모님께 드릴 수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이를 감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예수님 때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고르반 전통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그들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첫자리에 두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생각과 삶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전통 아래 있었고, 하나님의 법이 더 이상 효력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을 앞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앞세우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 사람의 속에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면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 나갈 때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다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가?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단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음식법을 부정하기보다는 음식법보다 도덕법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의적으로 부정한 음식이 여전히 있지만 윤리적 정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 인간을 부정하게 하는 부정한 음식은 없고 모든 음식이 정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나누는 기준도 바뀌었습니다. 음식을 포함하여 사람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정결과 부정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음식물이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소화기관을 거쳐 배설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악한 시선, 악한 의도, 이기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윤리적 지각이 없는 어리석음)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1-23).” 예레미야 17장 9절은 이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이 부정해지고 정결해지는 여부는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잠언은 생명의 근원이 사람의 마음에서 흘러나온다고 하였습니다(잠4:23).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먼 상태가 더러운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깨끗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정결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5:3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깨끗해집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흠없고 점없는 그 피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쏟으시고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예수님(24-30). 예수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왔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하신 큰 일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잘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3:8). 한 집에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은 쉬기 위해서, 또는 제자들이 아무리 가르쳐도 깨달음이 없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에 전념하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자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양들에게서 숨길 수 없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볼 때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를 구하는 여인에게 매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어머니에게는 딸의 기침 소리가 천둥소리같이 크게 들린다고 합니다. 자녀에게 먹여야 할 떡을 먼저 개들에게 던지는 엄마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구원하기 위해서 힘을 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다음에 이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옳은 소리라고 해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상처가 많은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하며 대들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로 인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뭐라고요, 내가 개라고요!” 사마리아 여인은 냉수 한 그릇 달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하며 쏘아 붙였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예수님께 “지금 나에게 갑질을 하는거요”라고 말하며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말을 들을 때 정말 눈물이 납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의 요구를 그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조차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한 딸의 어머니로서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들개가 아니라 집 안에서 가족처럼 여기는 애완용 개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부스러기만한 은혜만 주셔도 딸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말에 감동을 받으시고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29,30).”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고치신 유일한 사건입니다. 우리 속담에 “한 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예수님이 여자의 대답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믿음의 말’에 ‘능력의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귀신을 쫓아내주신 그 이상의 은혜가 있습니다. 부정함 그 자체였던 여자가 정결하게 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개와 같던 이방인 여자를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한 이방인 여자를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상 아래 애완견에 불과한 여자를 정식 가족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딸에 대한 이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악한 마음을 가진 부정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의 고백을 할 때 깨끗해집니다.
셋째,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예수님(31-37). 예수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시돈, 데가볼리 지방 모두 이방인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이방 선교의 선구자이십니다.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나와 예수님께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귀가 막히고 말을 하지 못하니 본인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또 그 부모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 쨍하고 볕들 날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외진 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탄식’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여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이 사람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앞선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료 방법은 이전과 달랐습니다. 그는 나아온 사람이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시각적인 행동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귀는 지금까지 꽉 막혀 있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보면 꽉 막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할 말 다 하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제대로 할 말을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말,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데, 불평, 원망, 불신을 담은 악한 말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어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꽉 막힌 관계를 탄식하시며 기도하심으로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막힌 귀를 열어주시고 묶여 있는 혀를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더러운 마음이 깨끗하게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의 사랑을 알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함으로 마음이 깨끗해지고 그의 임재를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용서하고 공동체가 정결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