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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24년 막10강(6:30-56)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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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8회 작성일 24-06-0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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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0강
말씀 | 마가복음 6:30-56
요절 | 마가복음 6:38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어느 18살 고등학생이 7살 아래의 동생과 편찮으신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들어온 동생이 치킨이 먹고 싶다며 울며 보채자, 학생은 동생을 달래주려고 밖으로 같이 나왔습니다. 학생 수중엔 5000원이 전부였는데 5000원 어치의 치킨을 먹을 수 있는지 가슴조려 묻지만 돌아오는 건 치킨가게 업주의 냉대뿐입니다. 이들이 철인 7호 수제치킨 집에 들어갔는데 쭈뼛하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치킨 전문점 사장이 가게 안으로 형제를 들입니다. 놀랍게도 이 철인 7호 수제치킨 집은 홍대 근처에 있습니다. 제가 어제 일부러 가보았습니다. 젊은 사장은 형제에게 1만9900원짜리 '난리세트' 메뉴를 만들어 내어줬습니다. 학생은 치킨의 양이 너무 많이 나와 “잘못 주신 것 같다”고 말했으나 젊은 사장은 콜라 2병까지 내오며 “식으면 맛없으니 얼른 먹으라”고 했습니다. 사장은 돈을 받지 않고 형제를 그냥 보냈습니다. 학생은 돈을 내기 위해 다음 날 가게를 다시 찾았지만 사장은 꾸짖듯 돈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동생은 형 몰래 가끔 치킨 집을 찾았고, 그럴 때마다 사장은 공짜 치킨을 내줬습니다. 어느 날은 덥수룩한 동생의 머리를 보고, 미용실로 데려가 깨끗하게 이발까지 해줬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든 형은 동생에게 가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형은 코로나로 자영업자들이 너무 힘들다는 소식을 접하고, 용기를 내어 볼펜을 들고 프랜차이즈 본사에 사연을 담아 편지를 보냈습니다. “처음 보는 저희 형제에게 따뜻한 치킨과 관심을 준 사장님께 진짜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 싶다”고 마무리하면서...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메시지를 다 듣고 나서 영상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제 1 장,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0-44)

  전도여행 후에 예수님은 사도들에게서 보고를 받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한즉 나음을 얻고 회개하라 전파하니 눈물로 회개하며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하느라 피곤하고 지쳐 있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들은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MT를 갖고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알아보고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이미 큰 무리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구름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큰 무리를 볼 떼 학을 뗐을 것입니다. 이 찰거머리 같은 인간들, 우리도 좀 쉬자 하면서 속으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우리는 일대일로 성경 공부를 합니다. 이는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고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큰 무리를 볼 때는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며 외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성숙하고 성장한다는 것은 사랑의 크기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영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말씀을 주고 여러 모양의 필요를 채워주고 사랑하지만 다 남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말없이 떠나갑니다. 그렇게 희생하고 섬겨주어도 양들은 목자의 소망처럼 변화되거나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목자가 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맡겨 주신 영혼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목양이 행복한 이유는 많던 적던 사랑할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영혼,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는 일인데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사랑의 대상이 있고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양은 사랑의 크기만큼 맡겨준 영혼을 품을 수 있습니다. 목양은 평생을 걸쳐 사랑의 크기를 키워가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가 행복하지 않을 때, 목양이 잘 안될 때 내가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가? 질문해 봅니다. 목회의 어려움이나 스트레스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과 변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내가 자기부인을 못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크기는 손해 보더라도 섬기려는 마음, 희생하려는 노력으로 커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목양은 사랑하며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자’가 없어서 불쌍하다고 보셨습니다. 헤롯 왕을 비롯해서 바리새인처럼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많이 있었지만, 목자처럼 돌봐주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양들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목자다운 목자가 없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가르치는 분량이 많기도 하고 오래 가르쳤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무리들은 몰라서 고생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자로부터 받아야 할 도움은 ‘여러 가지 가르침’이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는 것이고 제대로 된 ‘가르침’이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삶을 가르치고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며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하셨고, 권위 있는 새 교훈을 나누셨습니다. 지식과 정보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치료하고 죄사함을 주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꿰뚫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 시대의 문제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라 말씀이 없어서 기갈이 들어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때가 저물어가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제안을 했습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헤쳐,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자들은 휴식을 반납하면서까지 무리들을 섬기는 예수님의 말씀사역을 동역했습니다. 분명히 자기들도 배가 고팠겠지만, 그래도 무리들을 먼저 생각해서 예수님에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뜸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 같으면 예수님이 알아서 해결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자들이 큰 무리의 목자가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십니다. 제자들에겐 큰 도전이지만 동시에 성장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본래 백성들을 먹이는 것은 왕이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러나 당시 헤롯 왕은 백성들을 먹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의인 요한을 체포하고 자신의 정욕을 채워준 어린 소녀를 위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음식을 담는 그릇에 얹어주었습니다(6:28). 의인의 머리를 음식처럼 담아준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헤롯이 아니라 제자들이 무리들의 목자요 왕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복의 근원으로 쓰임 받도록 도우십니다. 축복을 받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신들보다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즉 목자의 입장에서 일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제자들을 동역자로 세우시며 그 시대의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f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f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이백 데나리온 즉 2000만원을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 사람들 수중에 천만 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에는 “지금 정녕 저희들의 형편을 모르시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지금 그들에게 떡 몇 개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떡 몇 개를 알아보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일을 시작할 수 없지만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이거라도’ 하는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예수님에게 들고 나오길 원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찾아보면 많은 것이 있습니다. 센터 건물이 있고, 동아리 방이 있습니다. 20여명의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동역할 수 있는 학사님들, 사모님, 목자님들이 있습니다. 목자님들이 연구하고 저장해 놓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필요한 돈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믿음을 더하고 사랑을 더해서 섬길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정말 없다면 없는 가운데 섬기는 것을 보고 양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없는 가운데 섬길 때 하나님이 채워주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사랑으로 믿음으로 섬기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름 수양회 준비도 2080원칙(20%가 일하고 80%는 논다)이 아니라 모두가 다 참석해서 준비하고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자가 가진 은사들, 시간, 물질, 지식을 드려서 섬기는 가운데 모두가 배부르게 먹는 축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보고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 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습니다. 

  제 2 장.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45-56).

  예수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리를 다 보낸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역사 후에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갖고자 힘을 쓰셨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의 인기를 물리치고 고립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되새기며 십자가를 지고 갈 준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까요?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전도 여행 후에 잠깐 쉬고자 계획을 했지만 큰 무리 때문에 무산이 되고 도리어 오천 명을 먹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오후 6시에 이제 좀 쉬려나 생각했는데 새벽 3시 까지 9시간 동안 바람이 거스르므로 노를 젓는 근육이 녹아났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힘들어 물속에 빠져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을 아셨습니다.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새벽 3-6시쯤이었지만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캄캄한 밤에 바람이 부는 바다 위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질렀습니다. 물 위를 걸어서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물 위를 걸으시는 분으로 자기를 소개합니다(욥9:8;시77:19)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욥9:8)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시77:19)
. 예수님은 성경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여기까지 오셔서 그냥 지나가려고 하셨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를 계시하시면서 지나가시는 모습과 비슷합니다(출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이심을 제자들에게 나타내고 계십니다.

  50b-51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하시며 “나다”(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라고 선언하십니다. 구약 성경 70인역 번역에서 하나님은 “ἐγώ εἰμι” 즉 ‘항상 있는 자’(I am continually being/doing)로 계시하십니다(사41:4,43:10)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4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43:10) 
. 또 하나님이 출애굽 역사를 앞두고 모세를 부르시면서 자기를 계시하실 때나 출애굽 후 십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표현입니다(출3:14,20:2).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해졌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4:12).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백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먹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시며, 홍해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를 걸어가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상에 눕혀서 그 곳으로 데리고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님께서  옷술만에라도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습니다.

  45절에서 예수님은 원래 제자들에게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최종 도착지가 벳새다의 반대편인 게네사렛 땅이었습니다. 원래 가려던 벳새다는 8장 22절에 가서야 도착합니다. 여정의 변경이 생긴 것입니다. 벳새다를 거쳐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신앙고백 하려던 여정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영적인 둔함 때문에 늦춰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게네사렛 사람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하시는 행동은 나오지 않고 게네사렛 사람들의 믿음의 행동을 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56절에서 ‘성함을 얻으니라’는 ‘ἐσῴζοντο,에소존토’로 ‘구원 받았다’는 의미다.
. 제자들만 못 알아봤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파도를 탄 것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배불리 먹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항상 살피고 계시며 인생의 역풍이 부는 현장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에고 에이미’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기억하고 삶 가운데서 깨닫고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양들을 먹이기를 기도합니다. 부족한 가운데 양들을 먹이며 하나님이 채우시고 복 주심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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