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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024년 막9강(6:1-29) 둘씩 둘씩 보내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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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1회 작성일 24-06-0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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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9강
말씀 | 마가복음 6:1-29
요절 | 마가복음 6:7

둘씩 둘씩 보내시며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전도하러 오셨습니다(1:38). 예수님이 열둘을 부르신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어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3:14,15).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집중적으로 가르치고(4:11,34), 광풍을 잔잔하게 하고 군대 귀신을 제어하시고, 현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서 금의환향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위축되기보다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사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회개하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신약 교회도 핍박을 받을 때 위축되지 아니하고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1 학기가 막바지에 접어든 지금 여름 수양회를 초청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고향에서 배척 받고 모든 촌에서 가르치신 예수님(1-6).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을 떠나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동행하였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통찰하는 진리에 놀랐습니다. 그들의 놀람은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그들은 예수님이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었는지 의문을 나타내며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혈루증 걸린 여인을 고치고 야이로의 딸을 살린 권능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여동생들과 결혼한 사람들 즉 처남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들이 아는 얄팍한 지식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못하고 실족하게 되었습니다. 잘 안다는 생각이 그들을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감게 만들었습니다(4:12). 우리가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좀 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더 이상 남에게 배우지 않습니다.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목수,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무시하고 모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고 저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먼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그들이 영접하지 않은 것입니다(요 1:10). 빛은 어둠에게 접근하지만 어둠은 빛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도리어 저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셨습니다. 그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제한 받은 게 아니라 예수님이 능력을 억제하셨습니다. 고쳐주고 싶은데 그들의 믿음 없음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놀라움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받은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받는 배척을 선지자가 받는 배척으로 이해하셨습니다. 자기와 가깝고 잘 아는 사람한테 거절을 당하면 위축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정체성까지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고향 사람들의 외면을 통해 선지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고향에서 배척 받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을까요? 혈연과 지연 위주의 유대 사회에서 그들에게 배척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선지자로서 복음을 전하게 될 제자들이 겪을 일입니다. 힘이 없어서 배척 받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배척 받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배척 역시 제자들이 걸어야 할 제자도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환대를 받고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받으면 상처가 됩니다. 나의 전 존재를 거부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2,23).”

  둘째, 제자들을 둘씩 전도 보내심(7-13).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후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을수록 더욱 열심히 담대하게 일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도 그와 같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행 4:10). 그들은 공회에서 풀려나고 나서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고 담대히 말씀을 전합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4:30,31).”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대학 당국이 학칙을 개정하고 복음을 전하면 학교에서 나가라고 핍박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축되지 말고 학교 밖에서라도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관계전도를 통해서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겠습니다. 사실 한 분은 교문 앞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한 분은 학교에서 미술 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과 접촉점을 갖고 복음을 전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회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오는 양들을 환영하고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남편이나 아내, 친구들, 형제들, 이웃들을 일대일 말씀공부나 주일 예배, 7월 말에 있는 여름수양회에 초청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을 보내시면서 빈 손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또한 가까운 마을들로 전도 여행을 가기 때문에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자는 배부름과 안일함과 풍요함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또한 사치와 허영심을 멀리해야 합니다.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또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 아무도 책임을 지고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편안한 곳을 찾지 말고 불편한 자리라도 불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떠나라고 하십니다. 특히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림으로써 배척하는 사람들의 것을 조금이라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욕심이 없는 태도가 복음 전도의 열정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당시 랍비들이 이방 지역의 땅을 떠날 때 그들에게 묻은 오염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발의 먼지를 털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거절한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기억을 털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듣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매너 없는 행동이 아니라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셨습니다. 이는 둘이 증인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신빙성 있는 증언이라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신19:15). 또한 둘이 하나보다 낫기 때문입니다(전4:9,10). 둘이 함께 할 때 합심 동역의 의미가 있습니다(눅10:1). 또 합심하여 기도하라는 뜻입니다(마18:19). 제자 공동체 내에 편견과 차별이 있는데 둘씩 묶어서 보내심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도움을 받도록 하십니다. 또한 그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으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전우애가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가져야 할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고…’ 무엇이 없는가에 민감합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러나 구원 받은 신자들 특히 복음 전도자의 관심은 오히려 없어도 될 것들에 있습니다. ‘이것이 없어도 되고 저것도 없어도 되고…’ 이것이 구원 받은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함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에게 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만 붙들었을 때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순종하여 나갔습니다. 그들은 회개하라 전파하였습니다.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제자들은 회개하라고만 하지 않고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도 고치고 실제적인 필요를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일을 아홉 가지 하고 한 가지를 회개하도록 말하면 좋겠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헤롯 왕이 듣고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갈수록 죄를 죄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면 고발당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핀란드의 한 목사님은 회개하라는 말을 전했다가 감옥에 가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싫어해도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말은 ‘회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감당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만 복음을 전하면 자립적인 사람들로 키울 수 없습니다. 의존적이고 무기력한 사람들로 키우기 쉽습니다. 때로는 자기의 죄를 직면하도록 도와야 잘못된 행동을 바꾸고 변화하고 성숙해집니다. 저도 회개하라는 말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도 편하게 살자는 안이한 대인관계 양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죄를 직면하게 함으로 너나 잘 해라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하는 것도 있습니다. 나도 상처 받게 되고 나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또 회개하라고 말했다가 감정적이 되어 상처만 주고 피해를 주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서 내가 도와줄 수 없는 문제를 발견하게 될까봐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함으로서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타락함으로 인해 본성적인 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자신이 아무리 선과 진실을 추구하고 싶어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악을 숨기는 기만성과 간교함, 그리고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지 못하는 그림자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동정심만으로는 진정한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권면하여 연민과 부정적인 정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라 전파하는 가운데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셋째, 참된 증인 세례 요한의 순교(14-29). 저자는 제자들의 전도 여행 후에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풀어 놓고 있습니다. 먼저 당시 통치자 헤롯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헤롯은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헤롯의 첫째 부인은 당시 근동지역에서 가장 강력했던 아라비아 나바티안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공주였습니다. 외교적 동맹을 위해서 결혼했다가 이복 동생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해서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전쟁이 일어나서 패하게 됩니다. 빌립은 헤롯의 이복동생으로서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네 명의 통치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헤로디아는 또 다른 이복형제 아리스도 불루스의 딸이었습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와 근친상간 및 간음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도덕함을 지적하는 요한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보고 두려워하여 보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달갑게 들으면서 동시에 번민했습니다. 죄악된 욕망과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괴로워하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으로 인해 헤롯이 마음을 바꾸어 자기를 버릴까봐 두려워 떨었습니다. 

  헤롯은 자기 생일 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추는 것을 보고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그녀가 원하면 나라의 절반까지 주겠다는 헛맹세를 하였습니다. 살로메의 춤이 헤롯을 미치게 한 것입니다. 그녀가 자기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하였을 때, 심히 근심하면서도 자기의 맹세와 주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결국 요한의 머리를 목 베어 접시에 담아서 딸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정욕과 헛된 자부심의 노예가 되어 두고두고 후회할 악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의롭게 살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죄악된 욕망과 사람들의 요구에 떠밀려 원치 않는 악행을 저질러야 하는 죄의 포로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갈릴리 최고 권력자의 실상이었습니다. 헤롯은 진짜 왕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헤롯 대왕 이후로는 유대인들로부터 왕권을 박탈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헤롯도 폐위 될 때까지 로마 정부로부터 왕의 호칭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헤롯을 ‘왕’으로 부른 이유는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또한 요한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면서, 두 번이나 그가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능력이 여전히 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계승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목 베었지만, 그것으로 요한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은 계속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증인은 순교자라는 뜻이 있는데 세례요한은 가장 영향력 있는 증인이었습니다. 

  나아가 요한의 죽음은 앞으로 예수님이 걸어가실 길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히셨을 때 사역을 시작하심으로 요한처럼 고난의 길을 가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1:14). 헤롯이 요한의 말을 듣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헤로디아의 계략에 넘어가 요한을 죽인 것은, 나중에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쓰다가 결국 종교지도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십자가형에 내어주는 모습과 비슷합니다(15:15). 헤롯이 요한의 부활을 얘기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의 길이 될 것이고 우리들의 길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 한가운데 요한의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요한의 죽음이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한의 죽음이 씨앗처럼 뿌려졌고 제자들의 사역으로 결실했다는 느낌을 줍니다.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AD 155-240)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박해를 통해서 복음역사가 오히려 힘을 발휘하고 왕성해진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신자들에게 환난과 박해가 있지만 교회는 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왕성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이 둘씩 둘씩 제자들을 보내신 사건은 어둡고 불의한 시대 속에서 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의인이 목 베임을 당하는 어두운 시대에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도리어 도전하고 흐름을 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이 없으면 세상은 어둡기만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아니라 무신론과 이단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귀신과 질병, 정욕과 물질, 타락한 권력자가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제자들이야말로 세상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초청하고 회개하라 전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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