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마가복음 2024년 막8강(5:21-4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1회 작성일 24-05-26 13:44

본문

2024년 마가복음 8강
말씀 | 마가복음 5:21-43
요절 | 마가복음 5: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인간은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마음의 충격과 상처의 잔재가 있습니다. 버림받은 인간이 받은 마음의 상처 중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 있습니다. 그 공포와 불안이 극대화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관계를 맺고 싶으면서도 잘 맺지 못하고 자기를 숨겨 버리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료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또한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기 쉬운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마음의 두려움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1장,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21-34).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서 다시 맞은편 가버나움으로 건너오셨습니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아직 바닷가에 계실 때에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받기 위해 나온 관리는 이 사람이 처음입니다. 그는 간곡히 구하였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열 두 살 된 외동딸이 죽어가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구구절절 딸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칩니다. 당시에는 여자 나이 열두 살이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서 남편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아기자기하게 살며 행복을 맛보아야 할 나이인데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이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이런 큰 움직임 뒤에 믿음으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자궁출혈로 인한 부인병입니다. 그녀는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습니다. 명의라는 명의를 다 찾아가 봤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있게 덤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곶감을 다 빼먹고 즉, 돈만 받아먹고 다른 데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다른 병원을 가보았지만 역시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몸은 더 피폐해졌습니다. 더 힘든 것은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외로움과 고립 가운데 사는 것이었습니다. 악성 빈혈과 무기력으로 누워있는 날이 많아서 하루 하루 우울한 마음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여자로서 너무나 지참하고 죽지 못해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병으로 인해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고, 혹시 결혼을 했어도 이혼을 당했을 것입니다.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이 여자의 상처와 아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모양의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은 이 여인의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3:10과 6:56 말씀을 참고해 볼 때 이 여인은 예수님께 손을 대고 나은 사람들의 소문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소문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하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생각했다’는 말은 ‘말하다’는 동사의 미완료로 계속 말했다는 의미입니다(she kept saying). 그녀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소문만 들었지만, 듣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그가 하신 말씀들을 계속 되뇌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싹 트고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으리라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무리들을 뚫고 예수님을 만질 수 있는 용기를 낳았습니다. 말은 행동을 낳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만 살짝 손을 대었는데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라버렸습니다. 여인은 몸과 마음에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여인은 피가 계속 흐르던 자신의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이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일 행한 여자를 적극적으로 찾으셨습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를 하나님의 딸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몸도 아니고 손도 아닌, 예수님의 ‘옷에만’(even his garments) 손을 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가냘픈 육신이나 사회적 신분만큼이나 가냘픈 느낌이 듭니다. 자신이 부정하다, 쓸모없다는 생각이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주저앉지 않고 가냘픈 믿음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바꿔놓는 위대한 믿음의 터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몇 번 말씀 듣고 믿음이 안 생긴다고 할 게 아닙니다. 몇 번 듣고 믿음이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소리내어 말을 하다보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이 생기게 될 줄 믿습니다. 로마서 10:9을 보면 순서가 이상하게 보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며”가 “네 마음에 믿으면”보다 먼저 나옵니다. 고백의 위력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마치 타인의 은행 계좌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돈을 인출해 낸 것하고 비슷합니다. 믿음이 그 비밀번호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예수님 안에 있는 무한한 능력의 창고에서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함부로 그 능력과 지혜를 빼간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 믿음이 없어서 안 가져가냐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만 터치한 것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정확하게 알아차리십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예수님은 민감하게 우리의 믿음에 반응하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딸을 찾고 계십니다. 믿음의 아들도 찾고 계십니다.

  둘째로, 떨고 있는 여인에게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평안히 가라’(ὕπαγε εἰς εἰρήνην)는 말씀은 ‘평안을 향해 (혹은 안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병’은 ‘μάστιξ,마스틱스’로 ‘채찍’입니다. 그동안 여자가 부정한 혈루증 때문에 채찍에 얻어맞는 것처럼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그녀에게 평안의 세계를 열어 주시고 그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딸이 채찍에 맞으며 고통하는 걸 두고 갈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녀가 병만 나아서 가지 않고 고통이 없는 평안의 세계로 가도록 하기 위해 그토록 찾고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깊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여자는 애초에 혈루증이 나을 거라는 믿음만 가지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믿음으로 혈루증이 나았을 때에도 부정의 문제는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자의 믿음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온전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강 같은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 2 장,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35-43).

  예수님이 여자와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당신의 딸이 죽었다는 말은 이제 모든 것이 소용없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을 괴롭게 했고 계속하면 예수님을 더 괴롭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말이요, 불신의 말이요, 사탄적인 말입니다. 그들은 회당장의 집 사람들로서 회당장을 사랑하고 그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여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설적인 이 말은 독을 품은 말이요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다고 번역을 했는데 원어의 뜻은 “있던 말을 거부하고(배격)하고”입니다. 무시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 집에서 온 사람들을 그의 일에 참여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가던 길을 계속 가라는 것입니다. ‘믿으라’는 말씀은 현재명령형으로서 계속 믿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어가는 딸을 살리실 수 있다고 나왔을 때 가졌던 그 믿음을 계속 지키라는 말입니다. 상황은 전보다 더 안 좋아졌어도 믿음은 나빠지지 않게 계속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더 안 좋아진 상황과 예수님의 능력을 한계짓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딱딱해지고 염려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야말로 예수님의 말씀만 붙들고 믿음을 지킬 때입니다.

  또한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그의 믿음을 한 단계 더 높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병만 고치는 분이 아니라 죽음도 정복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를 지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똑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 아니하십니다. 새롭게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야이로에게 맞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지금 나의 상황에 맞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경험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야이로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금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사탄에게 종 노릇을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며 두려움의 종된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잘못에 대한 두려움, 알 수 없는 두려움의 고통,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말을 할 때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나 않을지, 실수하지 않을지 몹시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우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런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어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잘한 것 보다는 못한 것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등감이 있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기에 완전을 추구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어렵고 자신의 부족함을 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며 실수뿐만 아니라 온갖 죄를 다 지어도 여전히 사랑하는 딸이요 아들로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힘쓸 때 두려움이 물러가고 평안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담대해집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러자 그들이 비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소녀에게는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소녀는 식물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는 죽음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죽음은 부정(不淨)의 최고 단계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상태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고통입니다. 야이로에게 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나온 야이로를 그런 고통 속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나 죽음의 고통조차도 예수님의 통제 밑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의 고통까지 경험하게 하시지만 이를 통해 예수님이 죽음까지 다스리시는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는 장차 죽을 몸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키실 것이고 죽은 자도 살리사 영생에 합당한 몸으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처음 가졌던 믿음을 지켜서 죽음까지도 통제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07건 1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07 마가복음 이엘리야 75 09-08
106 마가복음 이엘리야 71 09-01
105 마가복음 이엘리야 75 08-25
104 마가복음 이엘리야 61 08-18
103 마가복음 이엘리야 87 07-29
102 마가복음 이엘리야 67 07-29
101 마가복음 이엘리야 66 07-21
100 마가복음 이엘리야 78 07-14
99 마가복음 이엘리야 74 07-07
98 마가복음 이엘리야 63 06-30
97 마가복음 이엘리야 151 06-23
96 마가복음 이엘리야 66 06-16
95 마가복음 이엘리야 58 06-09
94 마가복음 이엘리야 61 06-02
열람중 마가복음 이엘리야 72 05-26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