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로마서 2020년롬 17강(14:1-15:13) 서로 받으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24회 작성일 20-03-29 21:23

본문

2020년 로마서 제 17 강                                     
말씀 | 로마서 14:1-15:13
요절 | 로마서 15:7 
서로 받으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교회는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같은 믿음, 같은 성령, 같은 말씀을 받고 같은 비전을 갖고 나아가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갈등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비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가치관과 세계관, 생활 습관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 안식일이나 유월절과 같이 날이나 절기를 준수하는 문제로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다루면서 “서로 받으라”고 권면하면서 왜 우리가 서로 받아야 하는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공동체 내에서 성도간에 실제적인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1-12). 당시 로마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들, 두 부류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어릴 때부터 구약 율법에서 금한 돼지 고기를 비롯해서 몇몇 고기들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은 먹는 문제나 절기 문제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도 시장에서 사다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고기들은 오늘날처럼 원산지가 어디인지 분명히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인지, 아니면 도축업자에게서 바로 넘겨진 고기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혹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이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으로 도대체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고기는 먹지 말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아예 속 편하게 채소만 먹었습니다. 반면에 이방인 신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뭐 어떻다고, 없어서 못 먹지”하면서 유대인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쩝쩝 맛있게 갈비를 뜯어 먹었습니다. 이런 이방인 신자들을 보면서 유대인 신자들은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태생은 어쩔 수 없어” 속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일 예배 서빙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의 식사 서빙 순서였는데 돼지삼겹살을 주 메뉴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그 동안 쌓였던 불만을 노골적으로 터뜨렸습니다. 주일 예배에서 받은 은혜는 다 사라지고 고성이 오갔습니다.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먹는 문제로 교회가 분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니라 구원 받은 후에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연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란 그것을 먹어도 되나 믿음이 안 생겨서 먹지 못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도 거리낌 없이 먹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도 죄가 아니요 고기를 안 먹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서로 믿음이 다른 것이고 성장 환경이 다른 것뿐입니다. 바울은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주인이 그 집 하인을 용납했는데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월권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강한 사람은 강한 대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연약한 대로 받아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종된 형제자매를 세우시고 바꾸어 가십니다. 그러니 내가 연약한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그의 주인 된 하나님을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형제를 사랑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당시 유대인 신자들은 절기를 중요하게 여겨서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 월삭일 등등 여러 절기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이 절기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데 유대인 신자들은 이 절기들을 지키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니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신자들은 그런 유대인 신자들을 믿음이 없고 율법적이라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 신자들은 “저 교만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면서 판단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절기를 중요하게 여겨도 “주를 위하여”, 절기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주를 위하여”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를 위하여”가 중요한 것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괜찮아 보이고 좋아 보여도 그것이 “주를 위하여”가 아니고 “나를 위하여”이면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조금 초라해 보이고 혹은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을지라도 “주를 위하여”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귀한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문제, 성경이 직접 금하거나 행하라고 밝히지 않은 것은 각자 자기 마음에 확정한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보다는 예배의 본질에 대해 주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어떠한 형식을 고착화시키지 말고 다만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고 충고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할 때,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인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지 그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빌 1:20).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간의 관계에서도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생각, 자기 판단, 독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고 형제를 겸손히 영접하고,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모든 사람은 인생을 마친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심판자들이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심판석에 앉고 형제는 피고석에 앉힐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사야 45장 23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보편적 심판권을 말씀합니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1,12).” 우리는 각자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날이 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남을 판단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쓰지 말고 나를 돌아보고 말씀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는 투쟁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13-23). 신자들은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13-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형제 앞에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두르고 바다 속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막 9:42).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귀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귀한 형제를 음식 하나로 망하게 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21절에서 바울은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자유 즉 선한 것으로 인해 약한 자에게 손해를 입히게 되면 비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하고 덕을 세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17). ‘의’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평강’은 분쟁과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서로 용납할 때 평화로운 상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영적인 기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의’를 이루고,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어 평강을 이루고, 그 결과로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합니다. 덕이란 신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음식이나 날과 같이 비본질적인 문제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8:13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연약한 형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를 절제하는 이런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바울은 형제들에게 믿음으로 살도록 권면합니다. 만물은 다 깨끗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일지라도 믿음으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먹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먹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즉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와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양심을 따라서 행하고, 신앙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으면 잠시 멈추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하고, 여전히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의심하면서 하는 것은 신앙양심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셋째, 피차 덕을 세워야 합니다(15:1-13). 15장 1절에서는 다시 “믿음이 강한 자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비방을 받으시고 저주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짐을 서로 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기쁘게 하고 형제를 즐겁게 하는 생활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일수록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날마다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하기를 원합니까? 5-7절을 보십시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과거 우리는 죄로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내면이 연약하고 무기력하고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우리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이처럼 하나 됨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영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다 다릅니다. 같은 배 속에서 태어난 형제라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이해하고, 그 앞에 부딪칠 것이나 넘어질 것을 두지 아니함으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될 때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여 하나가 될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될 때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될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로마 교회를 축복하면서 그들이 갖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바로 그 소망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 그것을 소망하며 기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수호하는 일, 양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지만, 그 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주를 위해서 서로를 영접함으로 성령의 한 그릇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55건 1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