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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년 롬16강(13:1-14) 빛의 갑옷을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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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6회 작성일 20-03-2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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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 16 강                                                       
말씀 | 로마서 13:1-14
요절 | 로마서 13:12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는 지난 주부터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천편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신자들이 가져야 할 국가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이웃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오는 종말의 때에 우리 신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마치 종말이 온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오실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오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기 위해서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어려운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신자의 국가관. 1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위에 있는 권세’는 국가의 통치 세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권세를 잡은 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왕을 세우시고 장관들과 공무원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국가는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경제를 일으키고 교육 제도와 의료기관을 세워서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들로 인해서 우리는 안심하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합니다. 우리는 이번에 코로나 19로 인해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방역작업과 검역, 치료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검역을 위해서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고 바이러스로부터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합니다. 국민이 해외에서 바이러스에 오염되거나 해를 받게 될까봐 전세기를 띄워서 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4월 초까지는 공예배 대신에 가정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권세자들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게 됩니다. 서울시에서는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되 바이러스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들을 따르지 않으면 300만원 벌금과 구상권을 물리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처벌이 무서워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권세자들이 하는 일은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회정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권세자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의 약자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악한 사람들이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권세를 가진 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칼을 가진 것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을 행할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본래 제사장이 감염병을 분별하고 병든 사람을 사회로부터 격리를 시키고, 치료가 끝나면 사회에 복귀하도록 증서를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사와 간호사, 질병관리본부에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입니다. 이들이 전문지식을 통해서 감염병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여기서 양심을 따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국가의 기능을 양심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양심에 따라서 선을 행할 때 권력자들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제약을 받지 않게 됩니다.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금을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을 씁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한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조세를 포함한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 사항을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 권력이 이런 역할을 하지 않고 불법을 행하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위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때에는 어렵지만 불복종 운동을 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사도들을 붙잡아 때리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행4:19,20, 5:29). 그리고 더욱 힘써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을 하되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복종해야 합니다. 권세자들과 하나님의 뜻이 대치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직장 상사나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존경하고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불의를 행하도록 강요하거나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면 겸손하면서도 분명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권위가 상실되어가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자들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사랑은 율법의 완성. 8절을 보십시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명령은 우리가 빚을 갚지 않고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빌리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2절에서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주택 담보나 학비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급한 상황이 생겨서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갚을 능력이 없는데 돈을 빌리는 것입니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것은 도둑질 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시 37:21).

  그런데 갚을 수 없어도 빚을 질 수 있고, 많은 빚을 질수록 좋은 빚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은 본질상 그 빚을 갚는다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의무입니다. 사랑은 할수록 더 강렬해집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좀 더 사랑하고 싶은 아쉬움만 남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내면이 건강하고 자존감이 생깁니다. 반면에 사랑을 받지 못하면 내면이 삐뚤어지고 자존감이 없어집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이 사랑을 베풀고자 할 때 그 사랑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세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부담으로만 여기면 사랑이 흐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풍성한 사랑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나 친구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고귀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넓고도 깊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서 자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사랑을 덧입고 일생 동안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받은 사랑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갚고자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이 사랑입니다. 십계명에는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등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게 되면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것도 이웃사랑에 대한 실천입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기 않기 위해서 공예배를 드리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보전하는 일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신자는 힘들고 어려운 형제들을 볼 때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웃을 위해 내 자신을 내어줍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어느 율법이든지 사랑을 떠나서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사랑의 법이 모든 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시민법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도와줄 의무가 없다고 해서 돕지 않으면 시민법에는 걸리지 않지만, 사랑의 법에는 걸리게 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고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법입니다.

  셋째, 빛의 갑옷을 입자. 11,12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이 말씀은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그 이유는 ‘이 시기’를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시기’란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경건한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도둑 같이 순식간에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아마겟돈을 연상하게 합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변화되는 국내와 국제적인 상황들을 보면서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이 만명을 넘어섰습니다. 국제항공노선들이 문을 닫고 경제활동이 마비되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해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때에 영적인 잠을 자고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는데도 영적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잠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둠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세상이 얼마나 타락해가고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시대가 따로 없습니다. 노아 시대처럼 사람들이 육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텔레그램 성착취방을 운영해온 ‘엔(n)번방’ 가입자들이 행한 죄악들이 드러나면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낮을 대비해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갑옷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빛의 갑옷’은 우리 몸에 어두움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어해 줍니다. 빛 된 선한 행실이 어두움에서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또한 빛의 갑옷은 신앙생활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어둠의 일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빛을 비추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방탕은 원래 축제의 행렬을 뜻했습니다. 축제의 끝은 술 취함과 남녀가 뒤엉켜 육욕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음란과 호색은 성적인 타락을 가리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성적으로 아주 문란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로마의 멸망은 성적인 타락에서 기인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낮에는 단정히 행하다가 밤만 되면 야수로 변합니다. 놀더라도 그냥 놀지 않고 꼭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서 본성대로 행합니다. 술에 취하면 평소 조용하던 사람도 고성방가를 하고 음탕한 생각에 빠져 호색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것과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것과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행하는 것이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합니다. 죄악된 이 세상에서 철저히 말씀중심으로 생각하고, 말씀 중심으로 결정하고, 말씀 중심으로 행동합니다.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삶 속에서 섬세하게 도우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아주 깊은 어둠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멀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 각자가 변화되지 않은 죄악된 습관들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옷, 빛의 갑옷을 입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이 어두운 시대에 빛을 발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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