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20년롬12강(9:1-33)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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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 12 강
말씀 | 로마서 9:1-33
요절 | 로마서 9:16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는 때로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하나님은 왜 나를 목자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나?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등등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인데 왜 메시야를 거부하고 복음 전파를 훼방하는가? 사도 바울이 고민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주권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축복과 특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상태에서 구원하여 양자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적과 권능과 임재를 이스라엘만큼 많이 경험한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율법을 주시고, 예배와 약속들과 믿음의 조상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핍박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큰 은혜입니다. 그는 그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고 동족 유대인들의 완악함이 마음 아팠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요 1:13). 내가 구원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 사라의 죽음 후에 후처가 낳은 6명의 자녀가 있지만 오직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혈통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혈통으로 택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한다고 해서 구원을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4에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택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서라거나 쓸 만한 점이 있어서라거나 뭘 잘 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서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택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택 받았다는 것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의를 없애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뜻을 영접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무관심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다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아닙니다. 세계전문인선교회 국제대표인 호성기 목사는 “이 시대 가장 시급한 선교지는 나의 자녀와 다음세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버림을 받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난리를 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면 변화될 것이라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다면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택함을 받아도 허물과 실수로 인해서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택하시기 때문에 자격 없는 죄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이후에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며 변경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에서는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만 택했다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임의로 선택하여 구원하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가상의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모든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야곱을 택하신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이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말미암아 새로운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고 계속해서 함께 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셔도 좋으니 자기 백성을 용서해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하기 위해서 9-11장을 할애하였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완악하게 한다고 해서 그 마음에 악한 마음을 심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완악한 마음의 상태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우상들은 다 헛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이집트와 온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서 그의 능력과 그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셨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끝없이 질문을 할 수 있지만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명쾌한 대답은 하나님이 좋아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누가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겠습니까?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동급이 아닙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청자를 만들 수도 있고 뚝배기를 만들 수도 있고 요강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진흙이 “나를 왜 요강으로 만들었어요” 따질 수 없습니다. 무엇을 만들든지 토지장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듯이 하나님께도 자유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 즉 바로 왕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되 용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가장 먼저 복음을 들었습니다. 또한 어떤 민족보다도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환경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교만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들인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으로서 깊은 회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완악한 유대인들을 그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심판을 자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자유를 사용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더 많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발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반발심과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 결과 두려움과 불안과 방황 가운데 일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반대로 욥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자녀들을 다 잃고, 있던 재산도 다 날려 버리고, 지독한 병에 걸려 죽지 못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영접하고 찬양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라(욥1:21).” 그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고, 은혜의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했으면서 왜 이렇게 늦으시냐고 불평을 하고 또 그의 약속에 대해서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벌써 오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의 그릇’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입니다(24).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긍휼의 그릇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은 호세아의 글에도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 백성이 아닌 자는 비유대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유대인 중에서도 택하신 자들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인 중에서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7-29).”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서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핍박하지만 남은 자들이 있고 그들이 초대 교회를 이루고 세계 구원 역사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소수가 되고 있는 때입니다. 사회의 주류가 복음을 배척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타락한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한다 해도 남은 자들은 끝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아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은 자들은 비록 소수지만 그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요 그 시대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주님의 제자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믿음에서 난 의를 얻었습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고자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으로 부딪칠 돌에 부딪쳐 깨져버렸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자기 의를 추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요 거치는 바위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구원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성품을 날마다 묵상하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긍휼이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닫고 찬양합니다.
말씀 | 로마서 9:1-33
요절 | 로마서 9:16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는 때로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을까?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하나님은 왜 나를 목자 가정에 태어나게 하셨나?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등등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인데 왜 메시야를 거부하고 복음 전파를 훼방하는가? 사도 바울이 고민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주권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축복과 특권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노예상태에서 구원하여 양자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적과 권능과 임재를 이스라엘만큼 많이 경험한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율법을 주시고, 예배와 약속들과 믿음의 조상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핍박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큰 은혜입니다. 그는 그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고 동족 유대인들의 완악함이 마음 아팠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유대인이라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요 1:13). 내가 구원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 사라의 죽음 후에 후처가 낳은 6명의 자녀가 있지만 오직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혈통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혈통으로 택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한다고 해서 구원을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4에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택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서라거나 쓸 만한 점이 있어서라거나 뭘 잘 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서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택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택 받았다는 것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의를 없애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뜻을 영접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무관심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다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아닙니다. 세계전문인선교회 국제대표인 호성기 목사는 “이 시대 가장 시급한 선교지는 나의 자녀와 다음세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거듭남을 위해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버림을 받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난리를 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면 변화될 것이라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다면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택함을 받아도 허물과 실수로 인해서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택하시기 때문에 자격 없는 죄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이후에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는 것이며 변경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에서는 택하지 않으시고 야곱만 택했다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임의로 선택하여 구원하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가상의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모든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야곱을 택하신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한 이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말미암아 새로운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고 계속해서 함께 해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셔도 좋으니 자기 백성을 용서해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설명하기 위해서 9-11장을 할애하였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완악하게 한다고 해서 그 마음에 악한 마음을 심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완악한 마음의 상태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받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우상들은 다 헛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또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이집트와 온 세계가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서 그의 능력과 그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셨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끝없이 질문을 할 수 있지만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명쾌한 대답은 하나님이 좋아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누가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겠습니까?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동급이 아닙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청자를 만들 수도 있고 뚝배기를 만들 수도 있고 요강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진흙이 “나를 왜 요강으로 만들었어요” 따질 수 없습니다. 무엇을 만들든지 토지장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듯이 하나님께도 자유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 즉 바로 왕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되 용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가장 먼저 복음을 들었습니다. 또한 어떤 민족보다도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환경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교만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들인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으로서 깊은 회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완악한 유대인들을 그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심판을 자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자유를 사용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더 많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하시려는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발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반발심과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 결과 두려움과 불안과 방황 가운데 일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반대로 욥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자녀들을 다 잃고, 있던 재산도 다 날려 버리고, 지독한 병에 걸려 죽지 못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든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영접하고 찬양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라(욥1:21).” 그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고, 은혜의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약속했으면서 왜 이렇게 늦으시냐고 불평을 하고 또 그의 약속에 대해서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벌써 오셨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긍휼의 그릇’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입니다(24).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긍휼의 그릇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은 호세아의 글에도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 백성이 아닌 자는 비유대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유대인 중에서도 택하신 자들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인 중에서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7-29).”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서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핍박하지만 남은 자들이 있고 그들이 초대 교회를 이루고 세계 구원 역사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소수가 되고 있는 때입니다. 사회의 주류가 복음을 배척하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거룩한 씨가 있습니다. 타락한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한다 해도 남은 자들은 끝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아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은 자들은 비록 소수지만 그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요 그 시대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주님의 제자로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믿음에서 난 의를 얻었습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고자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으로 부딪칠 돌에 부딪쳐 깨져버렸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자기 의를 추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요 거치는 바위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구원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긍휼히 여기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성품을 날마다 묵상하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긍휼이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닫고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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