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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롬 11강(8:18-39)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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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9회 작성일 20-02-16 15:05

본문

2020년 로마서 제 11 강
말씀 | 로마서 8:18-39
요절 | 로마서 8:37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지난 주에는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가운데 승리하는 신자의 삶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따르는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되고,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환난과 유혹이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까?

  첫째,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며 기도해 주십니다(18-27).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자립을 위해 일을 하면서 양을 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겨야 할 때 육신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또 각종 질병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악인들의 죄로 인해서 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눈물과 애통하는 것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랑과 기쁨과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피조물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즉 모든 자연 만물을 인간의 통치 아래 두셨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저주로 인해서 자연만물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대로 인간의 구원은 우주적인 창조회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즉 죄와 악과 썩어짐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의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함께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사 11:6-8).”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말씀합니다(22).

  피조물이 탄식하듯이 우리 신자들도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고 싶습니다. 마음껏 하나님께 헌신하며 생명 구원 역사를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펄펄하게 살아 있는 욕망과 들끓는 목소리에 시달리고, 일을 하면 쉽게 지치고 원치 않게 허물을 드러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루 속히 육신조차도 구원받아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면 추하고 욕된 몸이 구속되어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이 됩니다. 연약한 몸이 강한 몸이 되며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영원한 몸이 됩니다. 이와 같이 몸의 구원은 신자들이 탄식하며 바라는 희망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구원이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지 모를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몰라 끙끙거리고 있을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께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위로자 성령을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섬세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각자 그런 기도의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저는 이번에 독일을 심방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일하심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태국에 단기선교를 다녀온 학생들도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19로 인해서 힘든 가운데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중국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경고로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고, 그 가운데서도 보호할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그의 구원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28-30).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이 말씀은 신앙체험에서 나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 안에는 실패도 실패로 끝나지 않고 성공을 위한 길이요, 불행도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든, 나빠 보이는 일이든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을 이루도록 기여한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신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이 행하는 악도 선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들이 범하는 죄는 결코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게 되었을 때 그의 범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단련과 성숙을 위한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 역시 그 자체가 선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믿음을 단련시키고 소망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인과응보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지는 모든 일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내 안에 조각되기까지, 성령의 열매를 맺기까지 회개하며 영적인 씨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과 그 공동체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시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영화까지도 다 과거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고난을 인내하며 이겨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31-39). 31-39절은 결론부분으로 승리의 찬가입니다. 이 본문에는 ‘누가’(τίς)라는 의문대명사로 시작하는 문장이 네 번 나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33), “누가 정죄하리요”(3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한 번 받은 구원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의 확신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대적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여 믿음에서 떨어뜨리고자 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본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여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판을 칠수록 의인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할수록 지식과 기술을 가신 사람들에게 부가 쏠리고 빈부격차는 갈수록 벌어집니다. 0.1%의 사람들이 자본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노예화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고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가난과 고난을 겪을 때 예수님 믿다가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피해 의식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시간 손해, 물질 손해, 청춘 손해, 이 손해를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심령이 딱딱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시간과 물질을 드려 양들을 말씀으로 섬겼는데 변화되지 않고 때로는 떠나보내야 할 때 그 동안 드린 헌신이 허망해 보입니다. 세상적인 동료들이 아파트를 사고 돈을 모으고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비교하고 힘들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때마다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도 아시고 이루어주십니다.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의 필요를 간과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담대하게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또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지을 때마다 사탄은 고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과 실수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아서 간구하십니다. 하루는 루터가 법정에 나와 싸울 때에 사탄이 그의 죄를 날카롭게 고발하였습니다. 이때 루터는 사탄을 향하여 네가 고발하는 죄가 그것 밖에 없느냐? 나의 주님은 그 보다 더 많은 죄들을 다 용서하여 주셨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고자 합니까? 35,36절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하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순교), 질병 등의 고난이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자가 격리를 하기도 하고, 학생 수양회가 취소되기도 하고, 하루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분들은 수입이 끊겨서 고통을 하고, 개학이 연기되어 자녀들을 유치원에 맡겨야 하는 직장맘들은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서 고통을 하기도 합니다. 중국 시황제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 애매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심판 앞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또 신앙으로 인해서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들의 아픔에 동참하며 이들을 위로하기를 기도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당하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가 모든 위험과 역경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자신 속에 내재하는 능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를 통해서만 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역경과 고난을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믿음의 승리를 체험했고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때로 힘이 들지만 최후 승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승리는 간신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깁니다. 이 정도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견뎌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난은 이보다 훨씬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것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때로 우리는 사망과 생명의 시련을 겪습니다. 천사들의 영적인 세력이나 권세 자들의 권세가 우리를 누를 때도 있습니다. 현재에 일어나는 환난이나 박해, 미래에 일어날 예측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고난도 있지만 풍요로운 물질적인 삶은 더 큰 위협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명예심, 부모 친척들의 정에 매여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높은 곳이나 깊은 곳에서나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태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집어 진다해도 버릴 수 없는 확신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아직도 중보하시고 우리가 고난 받을 때 함께 고난 받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탄식하며 기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모든 고난과 위험으로부터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누리며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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