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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서 2024년신년 3강(딤후 4:1-2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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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3회 작성일 24-01-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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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신년 말씀 3강
말씀 | 디모데후서 4:1-22
요절 |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올해 신년 방향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삶,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이것을 남에게 전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바른 관계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의 사정을 알게 되면 더욱 경우에 맞게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왜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지, 어떤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엄숙하게 명령합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우리가 왜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까? 성경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성경을 공부할 때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구원이 필요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어린 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성경은 배우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받고 순종하며 살아온 사람과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은 성품과 그가 맺은 열매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그들이 맺은 열매, 성품의 변화, 추구하는 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매우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씀을 전파하라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나타나셔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 날짜는 정해져 있고, 재판은 임박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각 사람은 선한 일이든지 악한 일이든지 그 몸으로 행한 모든 일을 따라, 마땅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고후 5:10).” 예수님은 최종 판결을 앞두고 모든 사람에게 그 법을 알리십니다. 말씀 전파를 통해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큰 소리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 가서 말씀을 전하자고 하면 어떤 학생들은 왜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데 가서 일방적으로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가, 전하고 싶지 않은데 왜 자유를 침해하느냐고 따집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지 않고서 일방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무례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서 그 영혼을 사랑하고 예의바르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먼저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관계성을 맺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겔3:11). 말씀을 듣고 그들이 회개하면 구원을 받지만 그들에게 전하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국회에서 법을 개정해서 행정부에서 시행령을 선포하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 법인데 왜 일방적으로 선포하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법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어겼을 때 처벌을 감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한 번 오셨고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 전파는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자립을 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양들을 얻기 위해 하는 일도 아닙니다. 자립이 안 되고 양이 없어도 그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있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미리 선교사님은 주재원으로 인도에 가서 처음에는 의자와 화분을 놓고 4개월을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롱리형제가 교수님의 소개로 주일예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예배에 오지 않았습니다. 지미리 선교사님은 그의 자취방에 심방을 갔지만 없었습니다. 종이에 말씀을 써서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일개월을 했는데 고향에서 돌아온 그가 방문 앞에 쌓인 말씀들을 다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 신실하게 주일 예배를 오게 되었고 인도 UBF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이름은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는 창1:28 말씀을 받고 자기 친구들을 매주 한 명씩 주일예배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디모데는 연소합니다(딤전4:12).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들 앞에서 말씀을 전할 때 권위가 안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파할 때 다른 권위를 의지하거나 내세우면 안 됩니다. 말씀 전파는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고 해서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권위가 좀 더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한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디모데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죤 번연은 복음을 영접한 후 침례교 신자가 되었고,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평신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국교회 신자인 찰스 2세의 탄압으로 12년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열 살 딸과 아내가 면회를 왔을 때, 그는 살이 뼈에서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꼈다고 합니다. 영국 국교회 당국자들이 설교를 그만두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설교하라고 부르셨으니 나는 설교를 그만 둘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설교를 하면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하자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감옥에 가면 누가 내 가족을 돌보겠는가? 그렇지만 하나님이 나를 설교하라고 부르셨는데 어떻게 입을 닫을 수 있겠는가!” 그는 감옥 속에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로역정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말씀 전파자에게는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십니다. 디모데는 지금 말씀을 전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을 생각할 때에 말씀을 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고,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딤후3:2-5). 우리는 말씀 전하기 좋은 시절이 오기를 바라지만, 사실 언제나 말씀을 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두움의 권세들이 역사하고 있고, 우리는 죄인들 속에서 살고 있기에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파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상황을 알고 거기에 맞게 인격적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올바로 깨닫게 해주고, 어떤 사람은 꾸짖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듣는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도록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내가 맡은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딤후2:9). 우리는 말씀을 늘 가까이에 두면서 준비하고 있다가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나 시대 상황보다 전파하는 사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환경이 준비되는 것보다 사람이 준비되는 게 중요합니다. 환경은 좋을 수도 있고 안좋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준비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또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의 죄 문제는 동일합니다. 사람은 매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조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다가 스스로 지쳐서 그만두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영접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신중하다’는 말은 절제하면서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무게가 있으면서도 과도함,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선과 악, 의와 죄의 경계가 많이 모호해졌습니다. 과거엔 그나마 도덕적, 윤리적인 선(line)이 있었는데, 지금은 선을 악하다고 하고 악을 선하다고 말합니다. 말씀 전파자는 이런 시대 영향으로 같이 마음이 무디어지면 안 됩니다. 말씀에 기초한 분명한 가치관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어려움을 만날 때 용감하게 견딘다는 뜻입니다. 바른 교훈을 받지 않으려는 시대에 사역을 하고 한 사람을 도우려면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습니까? 슬프다고, 외롭다고, 힘들다고 피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용감하게 견뎌야 합니다. 견디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전도자로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6,7절을 보십시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전제’는 ‘부어드리는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태워서 드릴 때 제물의 피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그릇에 모았다가 마지막으로 제단 아래에 부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정부에 의해 곧 참수를 당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는 것을 단순히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조차도 하나님께 부어지는 제사로 보고 있습니다. 감옥 생활을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 예배자의 삶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구원역사를 완성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교로 사명을 마치게 될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새로운 여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신 곳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더 기쁜 만남을 위한 잠간의 이별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앞둔 바울의 현재 모습은 슬픔이 아니라 기대와 희망에 차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싸움, 그에게 주어진 코스를 끝까지 달려왔고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그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달리기 선수가 승리의 면류관을 사모하듯이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이 면류관은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이 마지막 심판의 때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씌워주십니다. 바울은 ‘생명의 면류관’(계2:10)이 아닌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말씀 전파자의 삶을 마치면서 자신의 인생이 의로우신 재판관 앞에 서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의로운 길을 걸어 온 사람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아왔고 말씀을 전파하는 삶을 의로운 삶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돌이켜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전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가르치고 책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고 하나님께 가는 길이라고 가르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말씀 전파자의 삶은 의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유언적인 고백은 말씀 전파자들이 세상의 인정이나 판단에 매이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전파하며 살아야 함을 웅변합니다. 그 면류관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십니다.

  바울의 현재 형편이 어떠합니까?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왜냐하면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데마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이 옥중서신을 기록할 때만 해도 바울을 도왔던 자인데(골4:14),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렸습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주님의 일을 하려고 각각 갈라디아와 달마디아로 갔고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아마도 편지를 배달하러 갔을 것입니다. 현재는 누가만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마가는 바울과 첫 번째 선교여행을 하다가 도중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행13:13; 15:38-39). 그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싸우고 갈라섰습니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화해를 하였고 복음을 위해서 한 마음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는 것을 볼 때 마가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지금 동역자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올 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좀 더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책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아마도 구약 성경일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인생 마지막에 남은 것이 그가 키운 제자들과 그가 보낸 편지와 겉옷 한 벌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얻었고 그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바울이 끝까지 말씀 전파자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17,1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내가 했다고 말하지 않고 두 번이나 주께서 했다고 간증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버렸지만 주님은 함께 하시면서 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그는 말씀을 온전히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평생을 전도자로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었던 원천은 그가 이룬 업적이나 그가 전도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었습니다. 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가 이 시대 가운데서 전도자로서, 성경선생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고 말합니다. 이 집은 가정교회를 의미합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부부이면서 바울과 목숨을 내놓고 동역하였습니다. 오네시보로도 자기 집을 개방하여 가정교회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 지방의 재무담당자였고(롬16:23), 디모데와 함께 마게도냐로 파송되었습니다(행19:22). 드로비모는 에베소 토박이로서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때 헬라와 드로아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배 타고 오는 길에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행20:1-5; 21:29). 그가 병이 들어서 밀레도에 두어 병을 치료하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오라고 요청합니다. 추운 겨울이 기다리고 있고, 동시에 디모데의 위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는 동역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유언적인 편지를 마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가족과 같이 매우 친밀한 삶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바울이 세운 교회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저는 지난 주 아시아 지부장 수양회에 참석하여 두 강의 말씀을 인도하고 각 나라에서 온 선교사님들과 교제하였습니다. 아시아 지부장 수양회에서 이요한 목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허지은에스더 선교사와 함께 미국 스프링필드 센터를 개척하고 있는 책임목자입니다. 그는 2주 전에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홉명의 단기 선교팀을 꾸려서 말레이시아에 왔습니다. 이들은 성탄 전야에 캠퍼스를 심방하여 전도하고 지지난 주에 모나시 대학에서 요한복음 공부 모임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새 양 5명이 왔습니다. 아시아 지부장 수양회 후 목요일에 빈센트 리, 아이손홍, 베키 홍, 두 살 된 아들 나다니엘, 그리고 로니 목자와 함께 저는 모나시 대학을 심방하였습니다. 함께 햄버거를 먹고 쥴리 자매와 요한복음 2장을 공부했습니다. 쥴리는 대학원생인데 두 번째 참석하여 마음을 열고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 로니와 빈텐트 목자는 모임 전에 전도하고, 모임 후에 전도하여 한 명의 학생에게서 전화번호를 받고 다음 주 모임에 오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씀을 공부하고 모나시 캠퍼스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말레이시아 목자님들의 헌신을 볼 때에 기쁨과 감사가 되었습니다. 또 한 사람 이요한 목자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말씀전파에 대한 열정이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하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혼자서 캠퍼스에 나아가 말씀을 전하기는 어렵지만 동역자들과 함께하면 수월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간에 말씀을 전파하는 역사에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전파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고 안 듣고, 남고 안 남고에 관계없이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새해에 한명에게라도 말씀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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