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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서 2021년딤후2강(2:1-26)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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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1회 작성일 21-02-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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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디모데후서 제 2 강
말씀 | 디모데후서 2:1-26
요절 | 디모데후서 2:15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결혼하신 분들은 자기가 결혼을 할 때 주례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주셨는지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전할 딤후 2:15절은 전요한목자님께서 제 결혼을 주례하실 때 주신 말씀입니다. 제가 평생 목자로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는 핵심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입니다. 이 시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더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신실한 일꾼(1,2).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내 아들아!”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앞에서는 내 사랑하는 아들, 믿음 안에서 참된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를 떠나간 사람들이 있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오네시보로가 있습니다. 디모데도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면서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두려움이 많고 건강도 좋지 않지만 울면서라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특별히 죄사함의 은혜와 부르심의 은혜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내적으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즉 32만년의 월급에 해당하는 죄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으로부터 죄사함의 은혜를 받고 누립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도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사함의 은혜를 받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핍박자로서 복음의 원수 되었던 자신을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내가 누군가를 섬길 때 우리는 은혜를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권면합니다. 사람들과 다투고 논쟁하기보다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충성된 사람들과 함께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대일로 양을 섬기는 것이 은혜입니다. 양을 섬기다보면 자기가 깨어 있게 됩니다. 그렇게 복음 역사는 충성된 사람들에 의해서 계승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 교황청 근위대는 스위스 군인들이 맡고 있답니다. 그 이유는 스위스 군대의 충성심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를 지키던 프랑스 군인들은 시민군의 공격을 피해 모두 도망 같습니다. 786명의 스위스 군대만 남아서 왕을 호위하였습니다. 시민군은 용병들에게 너희 나라 왕도 아니니 순순히 비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군대는 우리는 왕을 지키기 위해서 고용된 군인이기 때문에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비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스위스 용병과 루이 16세는 시민군의 공격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후 로마 교황청은 충성된 스위스 군대를 근위대로 선발하여 지금까지 500년 동안 지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키는 자가 충성된 자입니다.

  둘째, 함께 고난을 받는 일꾼(3-13) 3,4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고자 할 때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가르쳐도 사람이 잘 변화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의 갈등도 생깁니다. 나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고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으며 목자로 쓰임 받는 것이 특권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많이 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나를 부르신 왕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닮아갑니다. 고난 속에서 주님의 위로가 있고, 열매가 있고 영광이 따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받는 고난은 감추어진 특권입니다.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고난도 끝이 있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만큼만 주님이 주십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고난이 오면 피할 길을 주님이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서 세상 소망을 버리고, 강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법대로 하지 않아서 욕을 먹고 감옥에도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뛰어나도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승리의 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실 당시 로마 사회는 귀족들이 땅을 소작인들에게 분배하고 그들은 일을 하지도 않고 부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파격적으로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직분을 얻었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군사요, 경기하는 자요, 농부와 같이 충성스럽게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받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말씀대로 살고자 하고 지나고 보면 그것이 맞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7절에서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무지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이해력을 주십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이 이르심으로 우리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번영신학의 영향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더욱 안락한 삶을 살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에 따르는 고난으로 인해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 속에서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닮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사람이 겸손해지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웁니다.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깊이 닮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매인 가운데 썼지만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모이는데 제약이 있지만 온라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직장에 매이고, 육아에 매이고, 자기 문제에 매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고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자라고 있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붙잡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말씀을 전하고 배우는 일, 실천하고자 할 때에 따르는 고난을 잘 견디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참음은 동역자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와 영광과 열매를 얻는 것은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11-13절에 미쁘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미쁘다는 말은 하나님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십니다.

  셋째,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자신을 드리는 일꾼(14-26). 사도 바울은 거짓 선생들과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합니다.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사람들을 망하게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할 때 입을 다물고 있기보다 열심히 생각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말다툼을 하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또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려야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다툼이 이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디모데가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옳게 분별한다’는 뜻은 헬라어로 ‘오르도토메오’ ‘똑바로 자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정통(orthodoxy)이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풍성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 저자의 의도를 찾아야 하고, 문맥을 따라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관찰, 해석, 적용의 순서를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도록 배웠습니다. 해석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적절하게 적용을 해야 합니다. 양들의 수준에 맞게 쉽게 전해야 합니다. 사실 쉽게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본문을 완전히 이해하면 쉽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다룰 수 있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묵상하고, 자기가 먼저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살아 있는 말씀 공부를 할 수 있고,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사역에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거짓 선생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습니다.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습니다. 악성 종양은 암과 같은 말입니다. 암은 아무데나 잘 붙어서 퍼져나갑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선생들의 말은 아무 데나 붙어서 잘 퍼져나갑니다.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습니다. 곧 교회는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십니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압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교회는 견고히 서고 성장합니다.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넷째, 깨끗한 그릇(20-26).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습니다. 금 그릇과 같은 귀한 그릇은 함부로 쓰지 않고 대개 보관을 합니다. 좋은 그릇은 주인이 자주 쓰는 그릇입니다. 주인은 깨끗한 그릇을 씁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금이 가고 깨진데다 생김새까지 못난 항아리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항아리의 주인은 물을 길어 오는데 늘 그 항아리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깨어진 항아리는 마치 온전한 항아리처럼 자기를 아껴 주는 주인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은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 없었습니다. 이유는 돌아오는 길에 그 많은 물이 새어 버려 주인의 수고에 보답을 못하니 말입니다. 어느 날 깨진 항아리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차라리 저를 버리시고 새 항아리를 구하시지 그러세요. 저는 금이 가고 깨져 소용이 없는 데다 볼품마저 없잖아요. 더군다나 주인님을 늘 피곤하게만 만들뿐일걸요.” 그러자 주인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려므나.” 그제야 항아리는 생각 없이 주인님과 다니던 그 길을 보았습니다. 길가에는 예쁜 꽃들이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아름답게 자라 있었습니다.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과 같았습니다. “주인님, 어떻게 이 산골에 이런 아름답고 예쁜 꽃들이 피어 있을 수 있을까요?” 주인이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습니다. “메마른 산, 길가에서 너의 깨어진 틈으로 새어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쓰임 받을 때 손해를 본 같고 헛된 일을 한 것 같은 수고를 통해서 주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한 수고는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가능성 많은 청년들이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탄은 정욕에 약한 청년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정욕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청년인 디모데 역시 정욕의 유혹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도 함께 받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주의 종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합니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입니다.” ‘깨어’는 냉철함을 되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거짓교훈과 분열의 원인입니다.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며 거짓교훈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오늘날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이후에 돈도 많이 벌고 병도 낫고 건강하게 살고 세상에서 출세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꿉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신앙을 가지고 살면 자연히 고난이 따릅니다. 일대일을 하고, 소감을 쓰고, 일용할 양식을 하고, 요회 모임을 하고, 팀모임을 하고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의 통로요 예수님을 배우는 훈련코스입니다. 자기 훈련이 없이 우리는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할 때 흘린 한 방울의 땀이 전쟁에서 피 한 방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훈련을 잘 감당할 때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고 이웃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훈련을 받는 것은 힘들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쉽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때 즐겁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스피릿이 있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기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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