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서 2021년 딤후1강(1:1-1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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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디모데후서 제 1 강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요절 |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기독 청년’의 신앙 수준 변화를 살펴보면, 코로나 이전보다 ‘약해진 것 같다’는 응답이 34%였습니다. 신앙이 ‘깊어진 것 같다’는 응답은 11%였습니다. 핍박을 받으면 누구나 약해집니다. 디모데도 핍박 가운데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편지를 써서 격려해 줍니다. 이 시간 연약해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를 할 때에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그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의 거짓 없는 믿음을 확신하고 디모데를 일깨워서,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려고 합니다. 한번 받은 은사를 그대로 계속지속 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끔가다 그 은사가 식어지고 사명의식이 희미해질 때 다시 은혜를 받아 은사를 불타게 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주신 것”은 헬라어의 부정 과거를 번역한 것으로 어떤 특정한 일회적 동작을 의미합니다. 디모데가 성직을 임명받을 때 이미 받은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이미 주신 것입니다.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비겁함의 영, 소심한 마음, 위축된 마음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속에 넣어 둡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못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지만, 나이 많고 신앙적으로 선배인 장로들 아래에 있습니다. 장로들이 교회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더구나 교회 내에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부인하고 성도들을 꾀었습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디모데의 선생이요, 영적 아버지인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책임자로서 교회를 바르게 이끌어가야 하는데, 마음이 눌려 있어서 이 상황을 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심약한 마음에 눌려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런 상황에 두셨는가 생각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새번역과 NIV 영어 성경은 마음을 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그 종이 비록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이전에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새로운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능력, 사랑, 절제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디모데가 현재 조용하게, 고난을 견디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격적인 힘이요, 초인간적인 능력이요, 하나님의 힘 자체입니다. 이 단어는 다이나마이트로 번역되어 폭발하는 힘을 표시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능력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획기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이 능력은 내적인 것으로, 디모데로 하여금 현재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를 단절시키거나 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자신을 붙잡아 끌어올릴 수 있는 내적 힘입니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입니다. 로마 제국의 권세보다 더 강력한 그 능력에 의해서 핍박 속에서도 구원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19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빌립보서 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인간관계의 어려움, 건강 문제의 어려움, 물질적인 어려움, 자녀 양육의 어려움 등 고난이 없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사야 41:10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창세기에서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노예로서 맡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거기서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간수로서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은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때 바로 왕의 신하들을 돌보면서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일 이후 2년이 지나서 바로 왕 앞에 서서 그의 꿈을 해석해 주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깁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려면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여 제자로 삼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디모데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말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마음이 눌리는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그런 상황을 잘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 힘든 상황에서 도망하거나, 사람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능력입니다. 자기를 누르는 사람들,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런 사람을 아주 외면해 버리지 않고, 오히려 존중하고 사랑하고자 애쓰는 것도 능력입니다.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지난 해에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일 예배 참석자가 6%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내적으로 강해졌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며 믿음의 중심을 지키도록 능력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요, 변함이 없는 사랑이요 사람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빵을 사고 싶을 때는 동전을, 가구를 사고 싶을 때는 금전을, 사랑을 사고 싶을 때는 당신 자신을 지불하라.” 너무나 값진 속담이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목자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남을 존중하려면 사람을 자기 편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하나님 편에서 보니,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존중하고 해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도 자기를 힘들게 하는 장로들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종으로 보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 분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람은 온유하고,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절제는 자기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즉 자기의 감정을 제어하고 주변상황에 마구 끌려가는 자신을 다잡습니다. 절제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겉으로 볼 때, 디모데는 자기를 제어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쉽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디모데는 그런 자신이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두려움의 영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볼 때에는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절제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디모데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자신에게 두려움의 영이 가득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자기를 보면 마음이 슬펐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절제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능력, 사랑,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말하며 격려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로 하여금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결코 인간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모든 고난보다 더 강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회피하고자 하면 현재의 상황이 더 힘겹게 여겨집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용기를 줍니다.
바울이 겪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고 쇠사슬, 착고에 매여 있습니다. 어두운 감옥에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감옥의 맛없고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런 것도 고통이지만, 감옥에 갇혀 있어서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할 수 없고 자기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 있지는 않지만,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자기 생각을 마음껏 펼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디모데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디모데가 할 일은 그 상황에서 고통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이미 그런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 힘을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 내적 힘을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입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 2:8,9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편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게 된 것,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 내에서 마치 갇힌 사람처럼 된 것은 사람들 때문도 아니요, 자신들의 죄나 약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이나 디모데를 구원하시고 거룩하신 부르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의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상황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되면, 그 상황은 옳지 않은 것,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코로나 상황에서는 행동이 제약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모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모이기를 힘쓰라”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모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유롭게 모이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일대일을 하고, 팀모임을 하고 요회모임을 합니다. 저와 아내는 매주 목자부부와 교제와 기도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교제 시간에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며 목자님들과의 관계가 한층 더 깊어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교제의 통로를 찾았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과 영원한 삶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을 소유했고, 그 복음을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며 전파하고 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이는 주님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과 그 열매들을 하나님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죄수로 잡혀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헛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란 ‘동편’이란 뜻으로 에베소를 수도로 하는 로마의 한 주를 가리킵니다. 원래 버가모 왕국이었으나, 주전 130년 아탈루스 3세 때 로마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4세기에 이르러 태평양까지 광활한 지역이 아시아로 불리어 대아시아와 소아시아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떠난 사람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습니다. 함께 동역을 했던 동역자들이 떠나갈 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4장 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사람들이 바울을 버리고 간 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충격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떠날 때 큰 상처를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버리고 세상으로 갈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바울도 슬픔과 깊은 외로움을 겪었습니다(4:11).
그러나 다 버리고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가 있었고 오네시보로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자주 바울을 격려해 주었고 그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있을 때에 그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습니다.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를 하였습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을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고,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디모데는 바울이 전한 교훈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본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디모데에게 그 복음을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젊은 디모데는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 역시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할 것입니다(2:2). 이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에,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코로나로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대한 마음으로 고난을 감수하면서 복음을 지키고 전파하며 계승해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힘들다고 떠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말씀 | 디모데후서 1:1-18
요절 |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기독 청년’의 신앙 수준 변화를 살펴보면, 코로나 이전보다 ‘약해진 것 같다’는 응답이 34%였습니다. 신앙이 ‘깊어진 것 같다’는 응답은 11%였습니다. 핍박을 받으면 누구나 약해집니다. 디모데도 핍박 가운데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편지를 써서 격려해 줍니다. 이 시간 연약해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를 할 때에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그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의 거짓 없는 믿음을 확신하고 디모데를 일깨워서, 그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려고 합니다. 한번 받은 은사를 그대로 계속지속 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끔가다 그 은사가 식어지고 사명의식이 희미해질 때 다시 은혜를 받아 은사를 불타게 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주신 것”은 헬라어의 부정 과거를 번역한 것으로 어떤 특정한 일회적 동작을 의미합니다. 디모데가 성직을 임명받을 때 이미 받은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이미 주신 것입니다. 새번역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비겁함의 영, 소심한 마음, 위축된 마음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속에 넣어 둡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못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지만, 나이 많고 신앙적으로 선배인 장로들 아래에 있습니다. 장로들이 교회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더구나 교회 내에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부인하고 성도들을 꾀었습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디모데의 선생이요, 영적 아버지인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책임자로서 교회를 바르게 이끌어가야 하는데, 마음이 눌려 있어서 이 상황을 치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심약한 마음에 눌려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런 상황에 두셨는가 생각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능력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새번역과 NIV 영어 성경은 마음을 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그 종이 비록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이전에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새로운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능력, 사랑, 절제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디모데가 현재 조용하게, 고난을 견디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격적인 힘이요, 초인간적인 능력이요, 하나님의 힘 자체입니다. 이 단어는 다이나마이트로 번역되어 폭발하는 힘을 표시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능력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획기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이 능력은 내적인 것으로, 디모데로 하여금 현재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를 단절시키거나 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자신을 붙잡아 끌어올릴 수 있는 내적 힘입니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힘입니다. 로마 제국의 권세보다 더 강력한 그 능력에 의해서 핍박 속에서도 구원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19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빌립보서 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인간관계의 어려움, 건강 문제의 어려움, 물질적인 어려움, 자녀 양육의 어려움 등 고난이 없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사야 41:10은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창세기에서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노예로서 맡은 일에 충성하였습니다. 그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거기서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간수로서 충성을 다 하였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은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때 바로 왕의 신하들을 돌보면서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일 이후 2년이 지나서 바로 왕 앞에 서서 그의 꿈을 해석해 주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깁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려면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여 제자로 삼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디모데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말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마음이 눌리는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그런 상황을 잘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 힘든 상황에서 도망하거나, 사람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능력입니다. 자기를 누르는 사람들,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그런 사람을 아주 외면해 버리지 않고, 오히려 존중하고 사랑하고자 애쓰는 것도 능력입니다.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지난 해에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일 예배 참석자가 6%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내적으로 강해졌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며 믿음의 중심을 지키도록 능력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요, 변함이 없는 사랑이요 사람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빵을 사고 싶을 때는 동전을, 가구를 사고 싶을 때는 금전을, 사랑을 사고 싶을 때는 당신 자신을 지불하라.” 너무나 값진 속담이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양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목자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남을 존중하려면 사람을 자기 편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하나님 편에서 보니,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존중하고 해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도 자기를 힘들게 하는 장로들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종으로 보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 분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람은 온유하고,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절제는 자기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즉 자기의 감정을 제어하고 주변상황에 마구 끌려가는 자신을 다잡습니다. 절제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겉으로 볼 때, 디모데는 자기를 제어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쉽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디모데는 그런 자신이 사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두려움의 영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볼 때에는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절제의 영을 주셨기 때문에 디모데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자신에게 두려움의 영이 가득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자기를 보면 마음이 슬펐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절제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디모데에게 능력, 사랑,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말하며 격려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로 하여금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결코 인간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모든 고난보다 더 강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회피하고자 하면 현재의 상황이 더 힘겹게 여겨집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용기를 줍니다.
바울이 겪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고 쇠사슬, 착고에 매여 있습니다. 어두운 감옥에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감옥의 맛없고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차가운 돌바닥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런 것도 고통이지만, 감옥에 갇혀 있어서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할 수 없고 자기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 있지는 않지만,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자기 생각을 마음껏 펼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디모데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디모데가 할 일은 그 상황에서 고통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이미 그런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 힘을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 내적 힘을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입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 2:8,9을 생각나게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 편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게 된 것,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 내에서 마치 갇힌 사람처럼 된 것은 사람들 때문도 아니요, 자신들의 죄나 약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이나 디모데를 구원하시고 거룩하신 부르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의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상황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되면, 그 상황은 옳지 않은 것,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코로나 상황에서는 행동이 제약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모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모이기를 힘쓰라”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모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유롭게 모이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운데서 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일대일을 하고, 팀모임을 하고 요회모임을 합니다. 저와 아내는 매주 목자부부와 교제와 기도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교제 시간에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며 목자님들과의 관계가 한층 더 깊어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교제의 통로를 찾았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과 영원한 삶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을 소유했고, 그 복음을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며 전파하고 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이는 주님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과 그 열매들을 하나님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죄수로 잡혀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헛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능히 지키실 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습니다. 여기서 ‘아시아’란 ‘동편’이란 뜻으로 에베소를 수도로 하는 로마의 한 주를 가리킵니다. 원래 버가모 왕국이었으나, 주전 130년 아탈루스 3세 때 로마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후 4세기에 이르러 태평양까지 광활한 지역이 아시아로 불리어 대아시아와 소아시아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떠난 사람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습니다. 함께 동역을 했던 동역자들이 떠나갈 때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4장 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사람들이 바울을 버리고 간 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충격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떠날 때 큰 상처를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버리고 세상으로 갈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바울도 슬픔과 깊은 외로움을 겪었습니다(4:11).
그러나 다 버리고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가 있었고 오네시보로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자주 바울을 격려해 주었고 그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있을 때에 그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습니다.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를 하였습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을 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고,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디모데는 바울이 전한 교훈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본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디모데에게 그 복음을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젊은 디모데는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복음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 역시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할 것입니다(2:2). 이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나라에,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코로나로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대한 마음으로 고난을 감수하면서 복음을 지키고 전파하며 계승해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힘들다고 떠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의 영과 사랑의 영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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