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딛3강/선한 일에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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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디도서 공부 제 3 강
말씀 / 디도서 3:1-15
요절 / 디도서 3:8
선한 일에 힘쓰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지난 한 해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많은 일을 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사다난했던 2002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데 어서 잊을 건 잊고, 용서할 건 용서하며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충실히 살다보면 새 해에는 더욱 알찬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지난 한 해를 잘 정리하고 새해의 방향과 기도제목을 잡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디도서 3강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선한 일에 힘을 쓸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 신자의 교회 생활, 2장에서는 가정 생활, 3장에서는 사회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회생활 중에 먼저 국가에 대한 자세, 다음은 사회에 대한 자세,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말한 다음에 필요한 것을 예비하고 선한 일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첫째, 신자들은 통치자나 국가 기관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신자는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국가를 세우고 정부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절에서는 통치자들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했습니다(벧전 2:13). 국가는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조직되었습니다. 죄악 세계에서는 국가가 방범을 위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부와 조문을 해석하며 판결하는 법정과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 필요합니다. 타락한 인간 세계에 이런 기능들이 없다면 힘있는 자가 약자를 압제하고 무법이 판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정부는 이를 위해서 권선 징악의 기능을 합니다. 현대 정부 기능은 지식기반 경제 사회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합니다. 국가의 권한은 절대적이 아니라 제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마 22:21).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선한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1b 절을 보면 적극적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납세, 국방, 교육, 근로의 의무를 다할 뿐 아니라 기회만 있으면 선한 일을 행하기를 힘써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신자는 세속 사회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신자는 아무도 훼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훼방하지 말라는 것은 중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악한 일이 있어도 훼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를 받아도 다투지 말며 비난을 받아도 관용해야 합니다.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철저하게 정중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 세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얻게 됩니다. 히딩크는 선수들을 칭찬은 하지만 비난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는 것은 팀 내부에서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감독과 선수의 약속이고 신의였다고 합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죄를 짓고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온유함과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 때문에 그러해야 합니다. 물론 잘못을 묵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자들의 악에 대해서 꾸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이며 경쟁적인 사회에서 관용하고 온유하면 손해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희생없이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습니다. 이용당하더라도 온유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온유를 보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정직하고 믿을 만하다는 말을 듣고 존경과 신뢰를 받는다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이런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신자가 더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신자가 더 사납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명예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훈련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훈련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의롭게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세속 사회에 대해서 온유함을 나타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셋째, 우리도 전에는 악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과거에 다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영적인 사실에 대해서 무감각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시14:1). 영적으로 무지하여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항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와 마귀에게 속아 살았습니다. 악독과 투기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서 시기하고 투기하고 배 아파했습니다.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였습니다. 포르노를 보고 음란한 것들을 즐겼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삶은 가증스러웠습니다.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죄를 지었고 또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기본도 되어 있지 않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자였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할 때 죄인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넷째,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중생의 씻음은 거듭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이란 세례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부활과 함께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우리가 거듭남으로 인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었고 영적인 감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삶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삶, 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만드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새 생명을 입은 사람은 이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사십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되고 성장해 갑니다. 중생은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일이지만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우리가 풍성히 누리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아 가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인격에 대해서 알아가면 그에 대한 믿음과 확신도 더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아담 때에 하나님은 “네가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언약을 하셨고 이에 따라 아담은 그것을 지킬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키는 것, 곧 선악과를 먹지 않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노아 때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노아에게 “장차 홍수로서 심판을 할 것이니 너는 방주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그 방주에 타서 심판을 면하게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장차 홍수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니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방주에 탈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직 그와 그의 아내, 아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각종 짐승들만 방주에 타게 되어 홍수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주에 타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로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의 행함이란 노아의 말을 믿고 방주에 타는 것입니다. 노아가 전해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은 진실하며 그 말씀을 믿고 방주에 타야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만약 노아를 믿고 노아의 말을 믿었다 할지라도 방주에 타지 않으면 그도 똑같이 홍수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그에 따른 행함, 순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든다면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받고 나서야 강퍅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재앙은 애굽에 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인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짐승이든 예외 없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재앙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재앙을 피하는 방법은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기둥에 바르고 그 고기는 불에 구워 쓴 나물과 함께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죽음의 신이 그 집의 문 좌우 기둥에 발라 있는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갈 것이라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뜻대로 행한 자는 멸망 받지 않고 죽음이 피해 갈 수 있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하나님이 보낸 자로 믿지 않고 또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그의 말대로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설혹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진실임을 믿었다 할지라도 그의 말대로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다면 그 또한 죽음의 신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 하면서도 행치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사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미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재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예언의 말씀을 알고 믿어서 행하는 것이 준비하는 자요, 임박한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우리의 참된 소망은 영생입니다. 우리는 음란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의가 자라야 하고 그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믿음이 영원한 믿음이며 한번의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면 굳이 이런 권면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한 번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실족하여 세상에 빠졌더라도 그 사람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정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정은 미리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신자들이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힐 때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한 자이지만 이 자유로 죄지을 자유를 가진 자가 아니라 스스로 형제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택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할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충만히 거하심으로 그 능력으로 선한 일을 힘써야 합니다.
다섯째, 필요한 것을 예비하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고자 하는데 그 때에 급히 니고볼리로 오라고 합니다(12). 그리고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었는데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라고 합니다(13). 아데마나 두기고는 디도가 없을 때 그를 대신해서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는 지금 그레데를 방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은 그레데 성도들이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라고 합니다(14). 이 말은 물질적인 궁핍이 없이 자립하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직장과 사업에 힘을 써서 여유있게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남에 대한 선한 일이라든가, 구제나 협조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긴급히 필요한 일에 쓸 수 있게 끔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모스크바 센터 구입을 지원하기 위해서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또 선교사들을 급히 지원하려면 필요한 물질이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고 결과를 얻으려는 생각은 망상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시간과 재능을 낭비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기회를 상실합니다. 그리고 유혹에 쉽게 굴복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가난이 군사처럼 몰려 올 것입니다. 반대로 부지런함은 개인의 개성을 살려주고 삶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부지런함은 능력을 향상시키고 예전에 어려웠던 일들을 쉽게 만들어 주며 일을 더욱 능숙하고 빠르게 완수할 수 있도록 합니다. 부지런함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부지런함은 때가 되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줍니다.
동양속담에 “일하는 개가 게으름 피우는 사자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부지런함은 남보다 나를 앞서가게 만듭니다.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세네카의 말에는 “모두들 시간이 짧다고 불평하지만 우리는 쓸 줄 아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인생을 보낸다. 우리는 생명의 짧음을 불평하면서도 실제로는 생명이 끝없는 것처럼 행동 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게으름뱅이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게을러지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끈기있게 부지런함을 훈련하고, 근면한 체질을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우리는 2003년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는 현재의 습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초조해 하고,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항상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불운한 상황을 실제보다 훨씬 더 비관적인 눈길로 바라보고, 인생이 위급상황인 양 행동하는 습관에 젖어 있다면 우리의 삶 역시 이러한 습관의 반영물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믿음의 투쟁을 통해서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사랑과 인내력, 친절, 겸손 그리고 화평하는 좋은 자질을 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시간을 헛되게 흘려 보내고 멍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일 매일같이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 짓는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써야 할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재물과 지혜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를 하는 일 등을 포함해서 선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제자 양성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닮고자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가 양을 알고 그의 성장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선한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선한 일에 힘쓰기 위해서 성경 읽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 생각하는 습관, 남의 말을 듣는 습관을 기르고 책 읽는 습관을 길러야겠습니다. 선한 일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습관이 쌓여서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2003년도에 우리의 삶에서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디도서 3:1-15
요절 / 디도서 3:8
선한 일에 힘쓰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지난 한 해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많은 일을 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사다난했던 2002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가는데 어서 잊을 건 잊고, 용서할 건 용서하며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충실히 살다보면 새 해에는 더욱 알찬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 지난 한 해를 잘 정리하고 새해의 방향과 기도제목을 잡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디도서 3강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선한 일에 힘을 쓸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 신자의 교회 생활, 2장에서는 가정 생활, 3장에서는 사회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회생활 중에 먼저 국가에 대한 자세, 다음은 사회에 대한 자세,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말한 다음에 필요한 것을 예비하고 선한 일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첫째, 신자들은 통치자나 국가 기관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신자는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국가를 세우고 정부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1절에서는 통치자들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했습니다(벧전 2:13). 국가는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조직되었습니다. 죄악 세계에서는 국가가 방범을 위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부와 조문을 해석하며 판결하는 법정과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 필요합니다. 타락한 인간 세계에 이런 기능들이 없다면 힘있는 자가 약자를 압제하고 무법이 판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정부는 이를 위해서 권선 징악의 기능을 합니다. 현대 정부 기능은 지식기반 경제 사회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합니다. 국가의 권한은 절대적이 아니라 제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마 22:21).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훼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선한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1b 절을 보면 적극적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납세, 국방, 교육, 근로의 의무를 다할 뿐 아니라 기회만 있으면 선한 일을 행하기를 힘써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신자는 세속 사회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신자는 아무도 훼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훼방하지 말라는 것은 중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악한 일이 있어도 훼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를 받아도 다투지 말며 비난을 받아도 관용해야 합니다.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철저하게 정중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 세상을 차지하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얻게 됩니다. 히딩크는 선수들을 칭찬은 하지만 비난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는 것은 팀 내부에서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감독과 선수의 약속이고 신의였다고 합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죄를 짓고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온유함과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기 때문에 그러해야 합니다. 물론 잘못을 묵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자들의 악에 대해서 꾸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적이며 경쟁적인 사회에서 관용하고 온유하면 손해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희생없이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습니다. 이용당하더라도 온유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온유를 보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정직하고 믿을 만하다는 말을 듣고 존경과 신뢰를 받는다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은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이런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신자가 더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신자가 더 사납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명예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훈련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훈련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의롭게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세속 사회에 대해서 온유함을 나타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셋째, 우리도 전에는 악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과거에 다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영적인 사실에 대해서 무감각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시14:1). 영적으로 무지하여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이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항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와 마귀에게 속아 살았습니다. 악독과 투기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서 시기하고 투기하고 배 아파했습니다.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였습니다. 포르노를 보고 음란한 것들을 즐겼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삶은 가증스러웠습니다.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하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죄를 지었고 또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기본도 되어 있지 않는 자였습니다. 우리는 벌레만도 못한 자였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할 때 죄인들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넷째,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중생의 씻음은 거듭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이란 세례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부활과 함께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우리가 거듭남으로 인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었고 영적인 감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죄에 종노릇하던 삶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삶, 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만드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새 생명을 입은 사람은 이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사십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되고 성장해 갑니다. 중생은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일이지만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우리가 풍성히 누리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알아 가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인격에 대해서 알아가면 그에 대한 믿음과 확신도 더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아담 때에 하나님은 “네가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언약을 하셨고 이에 따라 아담은 그것을 지킬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키는 것, 곧 선악과를 먹지 않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를 지키지 못했을 때에는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노아 때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노아에게 “장차 홍수로서 심판을 할 것이니 너는 방주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그 방주에 타서 심판을 면하게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장차 홍수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니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방주에 탈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직 그와 그의 아내, 아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각종 짐승들만 방주에 타게 되어 홍수 심판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주에 타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로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의 행함이란 노아의 말을 믿고 방주에 타는 것입니다. 노아가 전해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은 진실하며 그 말씀을 믿고 방주에 타야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만약 노아를 믿고 노아의 말을 믿었다 할지라도 방주에 타지 않으면 그도 똑같이 홍수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그에 따른 행함, 순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든다면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받고 나서야 강퍅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재앙은 애굽에 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인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짐승이든 예외 없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재앙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재앙을 피하는 방법은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기둥에 바르고 그 고기는 불에 구워 쓴 나물과 함께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죽음의 신이 그 집의 문 좌우 기둥에 발라 있는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갈 것이라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뜻대로 행한 자는 멸망 받지 않고 죽음이 피해 갈 수 있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하나님이 보낸 자로 믿지 않고 또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그의 말대로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설혹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진실임을 믿었다 할지라도 그의 말대로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다면 그 또한 죽음의 신이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 하면서도 행치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사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미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재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예언의 말씀을 알고 믿어서 행하는 것이 준비하는 자요, 임박한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우리의 참된 소망은 영생입니다. 우리는 음란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의가 자라야 하고 그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믿음이 영원한 믿음이며 한번의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면 굳이 이런 권면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한 번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실족하여 세상에 빠졌더라도 그 사람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정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정은 미리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은 신자들이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힐 때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한 자이지만 이 자유로 죄지을 자유를 가진 자가 아니라 스스로 형제를 섬기는 일을 하도록 택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할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충만히 거하심으로 그 능력으로 선한 일을 힘써야 합니다.
다섯째, 필요한 것을 예비하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고자 하는데 그 때에 급히 니고볼리로 오라고 합니다(12). 그리고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었는데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라고 합니다(13). 아데마나 두기고는 디도가 없을 때 그를 대신해서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는 지금 그레데를 방문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은 그레데 성도들이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라고 합니다(14). 이 말은 물질적인 궁핍이 없이 자립하도록 힘쓰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직장과 사업에 힘을 써서 여유있게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남에 대한 선한 일이라든가, 구제나 협조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긴급히 필요한 일에 쓸 수 있게 끔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모스크바 센터 구입을 지원하기 위해서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또 선교사들을 급히 지원하려면 필요한 물질이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고 결과를 얻으려는 생각은 망상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시간과 재능을 낭비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기회를 상실합니다. 그리고 유혹에 쉽게 굴복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가난이 군사처럼 몰려 올 것입니다. 반대로 부지런함은 개인의 개성을 살려주고 삶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부지런함은 능력을 향상시키고 예전에 어려웠던 일들을 쉽게 만들어 주며 일을 더욱 능숙하고 빠르게 완수할 수 있도록 합니다. 부지런함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부지런함은 때가 되면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줍니다.
동양속담에 “일하는 개가 게으름 피우는 사자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부지런함은 남보다 나를 앞서가게 만듭니다.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세네카의 말에는 “모두들 시간이 짧다고 불평하지만 우리는 쓸 줄 아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인생을 보낸다. 우리는 생명의 짧음을 불평하면서도 실제로는 생명이 끝없는 것처럼 행동 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게으름뱅이의 기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게을러지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끈기있게 부지런함을 훈련하고, 근면한 체질을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우리는 2003년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는 현재의 습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초조해 하고,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항상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불운한 상황을 실제보다 훨씬 더 비관적인 눈길로 바라보고, 인생이 위급상황인 양 행동하는 습관에 젖어 있다면 우리의 삶 역시 이러한 습관의 반영물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믿음의 투쟁을 통해서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사랑과 인내력, 친절, 겸손 그리고 화평하는 좋은 자질을 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시간을 헛되게 흘려 보내고 멍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일 매일같이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 짓는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분명 이전과는 다르게 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힘써야 할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과 재물과 지혜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구제를 하는 일 등을 포함해서 선한 일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을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제자 양성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닮고자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가 양을 알고 그의 성장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선한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선한 일에 힘쓰기 위해서 성경 읽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 생각하는 습관, 남의 말을 듣는 습관을 기르고 책 읽는 습관을 길러야겠습니다. 선한 일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습관이 쌓여서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2003년도에 우리의 삶에서 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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