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디도서2강/선한 일에 열심인 친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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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디도서 공부 제 2 강
말씀 / 디도서 2:1-15
요절 / 디도서 2:14
선한 일에 열심인 하나님의 친 백성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음이 살아 있다면 선한 일에 열심을 내고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행실을 보이는 것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의 능력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 계속해서 선한 일에 열심인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I. 믿음을 온전케 하라 (1-10)
1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거짓 교사들은 헛된 고백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디도는 오직 바른 교훈에 합한 것들을 말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바른 교훈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진리야 말로 잘못된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가르치되 날카롭게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날카롭게 전하는 방법은 다양한 상황에 따라서 올바르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인본적이고 세속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책망이 없는 말씀 공부는 사람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전 영역에 침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가 가르쳐야 할 대상을 어떻게 권면해야 하는지 세심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 종들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늙은 남자에게. 늙은 남자란 교회에서는 장로급에 해당되고 우리에게는 시니어 목자님들에게 해당이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늙은 남자들은 절제하고 근신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늙은 남자들은 신앙과 언행을 체크할 사람이 없습니다. 체크할 사람이 있어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무절제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또 육체의 노쇠와 나이를 핑계 삼아 무절제를 합리화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늙게 되면 쉽게 소외감을 느끼고 섭섭한 마음을 갖습니다. 활동력이나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늙은 남자는 모든 일에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근신하는 것은 맑은 정신을 가진 온화함입니다. 늙은 사람들은 산전 수전을 다 겪었기 때문에 사람의 속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쉽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늙은 분들을 보면 절로 경외심이 생깁니다. 저는 전요한목자님에게서 아름답게 늙어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사실 그 분은 젊은이들보다 더 건강하고 활동적이시고 생각도 무척 젊습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그 분의 놀라운 절제와 근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라고 권면합니다(3). 시니어 사모님들은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먼저 행실이 거룩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나이 들면 조심성이 없어집니다. 늙을수록 여자는 남성 호르몬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거칠어지고, 남자는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가 되어 공손해진다고 합니다. 공손한 여자는 아름답지만 사나운 여자는 추해 보입니다. 또 늙은 여자는 참소치 말아야 합니다. 참소란 사악한 말거리를 뜻합니다. 참소는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마귀가 날뛰는 꼬투리를 마련해 줍니다. 대신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시니어 사모님들은 허물을 덮어주고 열심히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또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아마 늙은 여자들은 자녀들이 다 커서 시간이 많이 남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삶이 재미가 없기에 TV 드라마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는 ‘시집 살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한테서 며느리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남자가 군대 생활을 통해서 인생 훈련을 받듯이 젊은 사모님들은 시니어 사모님들에게, 자매는 젊은 사모님들을 통해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젊은 여자들은 어떤 훈련을 받으라고 합니까?
셋째, 젊은 여자들에게. 4,5절을 보십시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젊은 여자들이 배울 것이 많지만 특히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자녀 교육과 살림살이를 잘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훈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도 있듯이 가정이 화목해야 교회와 그 사회가 건강하고 나라가 건강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목자님들은 동역자와 대화하는데 매일 30분 이상씩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가정이 화목하게 됩니다. 사모님이 행복해야 자매 목자들과 자녀들을 잘 섬기게 되고 남편된 자신도 행복해 집니다. 사도 바울이 가정을 중요시했던 것은 당시 거짓 교사들이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이혼율이 39%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가정에서의 사랑과 교육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자녀들의 복지보다 자신의 경력을 앞세우는 풍토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정의 질서가 서게 됩니다. 각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미션을 잘 감당하려면 가정에서 동역이 잘 이루어져야 하고 가정들을 통해서 양들이 살아나야 합니다.
넷째, 젊은 남자들에게. 6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근신한다는 것은 자기훈련을 하는 것이요 자기를 통제하는 것이요 자기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젊은 남자들은 성취욕이 강합니다. 또 스트레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에게 40대 사망률이 가장 높습니다. 목자님들은 직장에서 일이 많아 피곤하기 때문에 새벽 기도도 잘 나오지 못합니다. 일 속에서 영적인 중심을 잡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신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과도한 욕구와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해결책은 쉬는 것과 운동입니다. 특히 일용할 양식과 기도에 힘쓰고 친구와 속 이야기를 터놓는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팀 별로 진실된 소감을 나누는 것은 경건 생활에 매우 좋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목자가 먼저 범사에 모든 선한 일에 본을 보여야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책망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먼저 모범을 보인 다음에 교훈을 주라고 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모범은 교훈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모범을 수반하는 교훈은 최고의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로 다 하고자 합니다. 즉 입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모든 가르침이 다 입으로 됩니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가장 강력한 효과를 보이는 것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함께 하면서 진리대로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함께 운동도 하고 함께 일도 하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시장도 보고 함께 심방도 가고 함께 전도도 하면서 성숙한 크리스챤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목양을 잘하는 사람들은 양들과 항상 함께 하면서 진리대로 사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목자로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모습, 성경을 읽는 모습, 믿음의 투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목자님이 새벽 6시에 출근을 하느라 새벽기도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도 힘들고 직장과 센터에서도 여러 가지 일이 꼬여서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 지나가는 말로 새벽 5시에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듣고 하루 이틀 하다 멈추는게 아니고 몇 달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자 내면 문제도 풀리고 직장에서도 새 일을 감당할 능력을 덧입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결혼 문제가 있는 리더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하며 매일 같이 기도로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우리의 특성이 있지만 새벽을 깨우는 기분은 매우 좋습니다. 또 그 시간대에는 운동하러 다니는 사람, 일하러 가는 사람, 청소하는 아저씨 등 많은 사람들이 몇 시간 자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보다 행동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본을 보이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입니다. 특별히 목자 행위에 대해서 악한 말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진실되게 회개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질 때에 고민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마 26:37).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목자의 본을 보였던 모습은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에 부닥칠 때 좋은 모델이 됩니다.
다섯째, 종에게. 9,10절을 보십시오.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종들은 자기 상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레데 기독교인 중에서 종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찾은 해방감을 남용하려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종에게 거스려 말하지 말라는 것은 반대하다, 주인의 계획을 방해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떼어 먹지 말라는 말은 사소한 도둑질을 일컫는 말입니다. 특별히 좀도둑질은 종들이 유혹받기 쉬운 악입니다. 종들은 도둑질을 하지 말고 도리어 정직하게 선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신자의 직업관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칠 것이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종들이 사회의 각종 밑바닥에서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 때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양떼들을 잘 알고 그들을 적절하게 돕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II. 은혜의 능력 (11-15)
11,12a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을 세우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당시 노예들에게까지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것입니다. 살인자에게도, 강간범에게도, 강도에게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양육합니다. 바울은 연약한 디모데에게 은혜 속에서 강하게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분명할 때 이 세상의 정욕을 더 잘 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할 때 현재적으로도 능히 경건하고 근신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서 힘있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훈련, 투쟁,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의 유혹은 중력과 같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 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를 양육하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선한 믿음의 실천을 하도록 성숙시키는 원동력은 교사의 훈육이나 지도, 성도의 자기 훈련이나 노력 보다 더 큰 비중이 오히려 어린 아이를 젖 먹여 양육하듯이 우리 영혼을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소극적으로는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소망하는 그 소망의 내용은 크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입니다. 우리가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한 일을 하는 열심은 구속 받은 자들의 주요한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소극적으로 죄사함의 은혜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 6:13,14). 본문에서 선한 일이란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데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서 꼭 복음 역사를 섬기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환경 운동, 구제 역사, 경제 정의 실현 운동, 공정한 선거 운동 등등도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선한 일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대로 복음 역사를 섬기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를 섬기는 일입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습니다. 악한 일, 더러운 일, 돈 되는 일, 돈 안되는 일, 무의미한 일, 그저 그런 일 등등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열심인 사람, 채팅에 열심인 사람, 더러운 일에 열심이지는 않지만 무의미한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한 일은 그저 체면 유지 정도만 하고 돈 되는 일은 열심히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선한 일을 향해 방향 전환을 하는 것으로 자족해서는 안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한 고등학교에서 일등하는 한 여학생의 책상에는 ‘공부하다 죽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속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신다고 했습니다(사 9:7b). 그러므로 그의 친백성된 우리도 최소한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제까지 열심을 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열정으로 시작했다가 탈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탈진하지 않는 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대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데 대학생 사역은 무엇보다 생존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다가 힘들다고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열심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러면 바쁘게 사는 것 보다 균형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개 목자들은 양을 치다가 정서적으로 지치면 육체적, 영적으로 약해집니다. 극도의 좌절, 분노, 실망, 상처, 외로움 등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모든 희생을 베풀었는데 단물만 쏙 빼먹고 배반을 당하는 경우에도 열심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제자 양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 양들을 사랑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목자는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성령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런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음란하고 교만한 죄악을 책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살도록 섬겨야 합니다. 목자의 훈련을 업신여기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를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야겠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목숨을 내 놓고 전도하고 목숨을 내 놓고 제자 양성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기쁨을 회복하게 될 줄 믿습니다.
말씀 / 디도서 2:1-15
요절 / 디도서 2:14
선한 일에 열심인 하나님의 친 백성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음이 살아 있다면 선한 일에 열심을 내고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행실을 보이는 것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의 능력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 계속해서 선한 일에 열심인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I. 믿음을 온전케 하라 (1-10)
1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거짓 교사들은 헛된 고백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디도는 오직 바른 교훈에 합한 것들을 말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바른 교훈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진리야 말로 잘못된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가르치되 날카롭게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날카롭게 전하는 방법은 다양한 상황에 따라서 올바르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인본적이고 세속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책망이 없는 말씀 공부는 사람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전 영역에 침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가 가르쳐야 할 대상을 어떻게 권면해야 하는지 세심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 종들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늙은 남자에게. 늙은 남자란 교회에서는 장로급에 해당되고 우리에게는 시니어 목자님들에게 해당이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늙은 남자들은 절제하고 근신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늙은 남자들은 신앙과 언행을 체크할 사람이 없습니다. 체크할 사람이 있어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무절제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또 육체의 노쇠와 나이를 핑계 삼아 무절제를 합리화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늙게 되면 쉽게 소외감을 느끼고 섭섭한 마음을 갖습니다. 활동력이나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늙은 남자는 모든 일에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근신하는 것은 맑은 정신을 가진 온화함입니다. 늙은 사람들은 산전 수전을 다 겪었기 때문에 사람의 속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쉽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늙은 분들을 보면 절로 경외심이 생깁니다. 저는 전요한목자님에게서 아름답게 늙어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사실 그 분은 젊은이들보다 더 건강하고 활동적이시고 생각도 무척 젊습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그 분의 놀라운 절제와 근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둘째,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라고 권면합니다(3). 시니어 사모님들은 무엇을 조심해야 합니까? 먼저 행실이 거룩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나이 들면 조심성이 없어집니다. 늙을수록 여자는 남성 호르몬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거칠어지고, 남자는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가 되어 공손해진다고 합니다. 공손한 여자는 아름답지만 사나운 여자는 추해 보입니다. 또 늙은 여자는 참소치 말아야 합니다. 참소란 사악한 말거리를 뜻합니다. 참소는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마귀가 날뛰는 꼬투리를 마련해 줍니다. 대신에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시니어 사모님들은 허물을 덮어주고 열심히 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또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아마 늙은 여자들은 자녀들이 다 커서 시간이 많이 남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삶이 재미가 없기에 TV 드라마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는 ‘시집 살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한테서 며느리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남자가 군대 생활을 통해서 인생 훈련을 받듯이 젊은 사모님들은 시니어 사모님들에게, 자매는 젊은 사모님들을 통해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젊은 여자들은 어떤 훈련을 받으라고 합니까?
셋째, 젊은 여자들에게. 4,5절을 보십시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젊은 여자들이 배울 것이 많지만 특히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라고 합니다. 자녀 교육과 살림살이를 잘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훈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도 있듯이 가정이 화목해야 교회와 그 사회가 건강하고 나라가 건강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목자님들은 동역자와 대화하는데 매일 30분 이상씩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가정이 화목하게 됩니다. 사모님이 행복해야 자매 목자들과 자녀들을 잘 섬기게 되고 남편된 자신도 행복해 집니다. 사도 바울이 가정을 중요시했던 것은 당시 거짓 교사들이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이혼율이 39%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가정에서의 사랑과 교육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자녀들의 복지보다 자신의 경력을 앞세우는 풍토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정의 질서가 서게 됩니다. 각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세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미션을 잘 감당하려면 가정에서 동역이 잘 이루어져야 하고 가정들을 통해서 양들이 살아나야 합니다.
넷째, 젊은 남자들에게. 6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근신한다는 것은 자기훈련을 하는 것이요 자기를 통제하는 것이요 자기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젊은 남자들은 성취욕이 강합니다. 또 스트레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에게 40대 사망률이 가장 높습니다. 목자님들은 직장에서 일이 많아 피곤하기 때문에 새벽 기도도 잘 나오지 못합니다. 일 속에서 영적인 중심을 잡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신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과도한 욕구와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해결책은 쉬는 것과 운동입니다. 특히 일용할 양식과 기도에 힘쓰고 친구와 속 이야기를 터놓는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팀 별로 진실된 소감을 나누는 것은 경건 생활에 매우 좋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목자가 먼저 범사에 모든 선한 일에 본을 보여야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책망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먼저 모범을 보인 다음에 교훈을 주라고 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모범은 교훈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모범을 수반하는 교훈은 최고의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말로 다 하고자 합니다. 즉 입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모든 가르침이 다 입으로 됩니다. 그러나 청년들에게 가장 강력한 효과를 보이는 것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함께 하면서 진리대로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함께 운동도 하고 함께 일도 하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시장도 보고 함께 심방도 가고 함께 전도도 하면서 성숙한 크리스챤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목양을 잘하는 사람들은 양들과 항상 함께 하면서 진리대로 사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목자로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모습, 성경을 읽는 모습, 믿음의 투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목자님이 새벽 6시에 출근을 하느라 새벽기도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도 힘들고 직장과 센터에서도 여러 가지 일이 꼬여서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 지나가는 말로 새벽 5시에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듣고 하루 이틀 하다 멈추는게 아니고 몇 달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자 내면 문제도 풀리고 직장에서도 새 일을 감당할 능력을 덧입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결혼 문제가 있는 리더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하며 매일 같이 기도로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우리의 특성이 있지만 새벽을 깨우는 기분은 매우 좋습니다. 또 그 시간대에는 운동하러 다니는 사람, 일하러 가는 사람, 청소하는 아저씨 등 많은 사람들이 몇 시간 자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보다 행동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본을 보이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입니다. 특별히 목자 행위에 대해서 악한 말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진실되게 회개하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질 때에 고민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마 26:37).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목자의 본을 보였던 모습은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에 부닥칠 때 좋은 모델이 됩니다.
다섯째, 종에게. 9,10절을 보십시오.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종들은 자기 상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레데 기독교인 중에서 종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찾은 해방감을 남용하려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종에게 거스려 말하지 말라는 것은 반대하다, 주인의 계획을 방해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떼어 먹지 말라는 말은 사소한 도둑질을 일컫는 말입니다. 특별히 좀도둑질은 종들이 유혹받기 쉬운 악입니다. 종들은 도둑질을 하지 말고 도리어 정직하게 선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신자의 직업관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칠 것이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종들이 사회의 각종 밑바닥에서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 때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양떼들을 잘 알고 그들을 적절하게 돕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II. 은혜의 능력 (11-15)
11,12a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을 세우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당시 노예들에게까지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것입니다. 살인자에게도, 강간범에게도, 강도에게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도록 양육합니다. 바울은 연약한 디모데에게 은혜 속에서 강하게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분명할 때 이 세상의 정욕을 더 잘 버릴 수 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할 때 현재적으로도 능히 경건하고 근신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서 힘있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훈련, 투쟁,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죄의 유혹은 중력과 같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 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를 양육하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선한 믿음의 실천을 하도록 성숙시키는 원동력은 교사의 훈육이나 지도, 성도의 자기 훈련이나 노력 보다 더 큰 비중이 오히려 어린 아이를 젖 먹여 양육하듯이 우리 영혼을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소극적으로는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소망하는 그 소망의 내용은 크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입니다. 우리가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한 일을 하는 열심은 구속 받은 자들의 주요한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소극적으로 죄사함의 은혜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 6:13,14). 본문에서 선한 일이란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데 선한 일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서 꼭 복음 역사를 섬기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환경 운동, 구제 역사, 경제 정의 실현 운동, 공정한 선거 운동 등등도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선한 일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대로 복음 역사를 섬기는 일,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를 섬기는 일입니다. 세상에 이 보다 더 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습니다. 악한 일, 더러운 일, 돈 되는 일, 돈 안되는 일, 무의미한 일, 그저 그런 일 등등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열심인 사람, 채팅에 열심인 사람, 더러운 일에 열심이지는 않지만 무의미한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한 일은 그저 체면 유지 정도만 하고 돈 되는 일은 열심히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선한 일을 향해 방향 전환을 하는 것으로 자족해서는 안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한 고등학교에서 일등하는 한 여학생의 책상에는 ‘공부하다 죽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구속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신다고 했습니다(사 9:7b). 그러므로 그의 친백성된 우리도 최소한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제까지 열심을 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열정으로 시작했다가 탈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탈진하지 않는 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대학생 사역을 하고 있는데 대학생 사역은 무엇보다 생존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 역사를 섬기다가 힘들다고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열심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러면 바쁘게 사는 것 보다 균형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개 목자들은 양을 치다가 정서적으로 지치면 육체적, 영적으로 약해집니다. 극도의 좌절, 분노, 실망, 상처, 외로움 등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모든 희생을 베풀었는데 단물만 쏙 빼먹고 배반을 당하는 경우에도 열심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제자 양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서 양들을 사랑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목자는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성령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런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음란하고 교만한 죄악을 책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살도록 섬겨야 합니다. 목자의 훈련을 업신여기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를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야겠습니다.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목숨을 내 놓고 전도하고 목숨을 내 놓고 제자 양성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기쁨을 회복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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