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디도서1강/믿음을 온전케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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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디도서 제 1 강
말씀 / 디도서 1:1-16
요절 / 디도서 1:13
믿음을 온전케 하라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디도서는 디모데전후서와 함께 목회 서신으로 분류됩니다. 디도는 본래 이방인으로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듣고 양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 바울과 동역을 하다가 그레데 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고린도전후서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후 63-64년 경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바울과 디도는 그레데를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얼마 후 그곳에 디도를 남겨 두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디도는 그곳에서 부족한 것을 바로 잡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저희의 믿음을 온전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장로를 세우라 (1-10)
디도서는 바울이 그레데의 책임 목자인 디도에게 쓴 서신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디도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그를 통해 양육을 받고 목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후 8:23절에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양이었던 디도를 어린 아이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속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요 함께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동역자로 여겼습니다. 바울의 디도에 대한 이런 자세는 그의 믿음이 어렸을 때나 성숙했을 때나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디도는 바울과 함께 선교 사역을 감당한 듬직한 동역자요, 능력있는 사역자였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할 일이 많아지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자신의 본분에 대해서 혼돈을 겪기가 쉽습니다. 평신도 목자는 평신도로서 자비량하면서 캠퍼스 목자로서의 일이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바 일에 대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을 때 헤매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풍성하게 하며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사도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고 훈련하고 성숙하게 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사도로서 복음 역사의 전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영적 사령관으로서 영적 전쟁을 진두 지휘해 나갔습니다. 그의 선교 정책은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는 도시를 거점으로 장로들을 세워 나가면서 전 세계 복음화를 성취해 나갔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그레데 체재 기간이 너무 짧았으므로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디도에게 맡겼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 있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퍼뜨려진 교리적인 과오를 바로 잡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레데 교회는 개척된 지ㅏ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믿음에 따르는 선한 행실이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레데는 제주도보다 4배 이상 컸기 때문에 많은 교회가 있었고 또 일군도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장로의 자격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첫째,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도덕적 인격이나 신앙 생활에서 타인에게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책망할 꼬투리가 잡히면 계속해서 양들에게 걸림이 됩니다. 교회 지도자의 명예 손상은 곧 하나님의 명예 손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완벽하다기 보다는 진실되게 선한 믿음의 싸움을 하는 사람, 부족하더라도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하지 않으면 실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젊은이들이 실수하는 것은 특권으로 여기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를 키우는 길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실수는 문제가 다릅니다.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검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지도자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이는 단 한 번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즉 재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당시 장로의 순결한 삶에 대한 기준이 이렇게 높았습니다. 그 당시 일부다처제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는 한 아내를 둔 자로서 불륜의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욕 문제에서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도덕적인 타락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성범죄 1위 국가입니다. 미국의 한 회사에 매년 60억원의 돈을 음란물을 보기 위해서 지불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시대에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셋째,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두는 것은 가정 교육이 잘 되어야 합니다. 방탕은 돈을 낭비하는 것, 도덕적 방탕을 포함하여 무절제한 생활과 쾌락의 추구로 삶을 허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 받는 목자요 지도자가 되려면 가정과 교회라는 두 축에서 교육을 잘 해 나가야 합니다. 불순종은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자녀들에게서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부모가 가정에서 모순되게 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아주 친절한데 가정에서는 폭력적이라든가, 밖에서는 사랑이 많고 겸손한데 가정에서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이라면 자녀들이 잘 따를 리 없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가정에서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이 넷을 키우면서 이들을 동역자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들이 목자가 되도록 비전을 심고 사랑해야 우리 모임과 나라는 미래가 보장됩니다. 이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이들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반발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가정에서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아이들은 세 살부터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가르치고 말씀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이번 주 토요일에 전국 CBF교사 수련회를 하고자 합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7-9절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교회의 재산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감독은 교회에서 설교, 교훈, 치리, 훈련 등 교회의 성숙을 위해서 여러 가지 필요한 봉사를 감당했습니다. 감독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 고집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급히 분내지 말아야 합니다. 또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러운 이를 탐한다는 것은 부당한 거래를 통한 이익으로서 언제나 정당한 거래를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 재정적인 보상 때문에 그의 사역이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감독은 비록 가난하지만 물질 문제를 깨끗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8,9절은 감독으로서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여행 중인 신자나 순회 전도자를 잘 대접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낯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선교사들이 많은 우리 실정에서 선교사들을 잘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또 선을 행하고 선하게 되는 일에 자신을 즐겁게 또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근신하여 습관적인 자제로 인해 잘 균형 잡힌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아니하며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는 중용의 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의로워야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기준을 따라서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거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입니다. 지도자는 솔선수범하는 자입니다. 본을 보이는 자입니다. 자기가 본을 보여야 다른 사람을 책망할 수 있습니다. 감독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인들을 잘 위로하고 권면하여 성숙하게 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왜곡하고 사도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들을 징계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감독의 기능입니다. 남의 잘못을 책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책망을 하다가 오히려 반감만을 사게 되고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책망을 한 사람이 심한 모욕과 멸시를 받을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잘못을 알고도 책망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을 알고도 책망치 않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한마디의 충고나 책망보다도 따뜻하게 그의 잘못을 감싸줄 때 더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면에서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분명하게 책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단순히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됩니다.
II. 할례당과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 (10-16)
10-16절에서는 할례당과 이단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할례당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가운데서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고 할례를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혼합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이단은 영지주의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복종하지 않습니다(10a). 그들의 특징은 바른 진리에 대해 복종치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 교회와 관계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전하는 말씀은 듣지 않고 영적인 질서를 어지럽히고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고 신화를 좇은 자들이었습니다(딤후 4:3-4). 그러므로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인정치 않고 성경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 말씀에 순종치 않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악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둘째, 헛된 말로 속이는 자였습니다(10b). 헛된 말을 한다는 것은 아무 유익도 없고 행위도 따르지 않는 말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헛된 말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켜 잘못된 길을 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내용이 없는 허황된 말을 하여 어린 양들을 속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매우 지혜있는 척 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요,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자신도 똑같은 길로 빠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악한 영향력을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이러한 헛된 말이나 속임수에 의해 더럽혀 질 수가 없습니다.
셋째, 더러운 이를 취하는 자입니다(11). 그들은 명분은 그럴 듯 하나 그들의 목적은 더러운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속이거나 희생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와 같이 그레데 교회 내에서도 복음의 훼방꾼들은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진리에 합당치 않는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훌륭한 교사인척 하며 양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을 가르쳐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야 할 목회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만을 위한다면 이는 거짓 교사에 해당이 됩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은 교회나 성도들 가운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복음의 순결성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방해꾼들은 또한 건전한 믿음의 가정을 온통 뒤엎습니다(12b). 그들은 부정한 물질을 취할 목적으로 성도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될 허무맹랑한 이단 사상을 가르쳐 성도들의 집을 뒤집어 놓고는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라고 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사도 바울은 그레데 사람들의 나쁜 본성을 징계하여 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라고 했습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병들고 무력하여서 심히 위험한 단계에 있으므로 그들을 잘 도와 믿음을 온전케 하고 건강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것이고 건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신자들도 믿음이 많이 병이 들어 있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떤 점에서 병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고 병든 점을 고침을 받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의 믿음의 특징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말씀에 절대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기 위해서 믿음의 훈련을 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방향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아내 사라와 같이 나아갔습니다. 결국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도 그가 순종치 아니했더라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뿐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시대를 섬겼습니다(히11장). 순종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5를 보십시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마음과 생활이 깨끗해야 합니다(15a). 여기서 깨끗한 자란 율법을 지켜서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깨끗하게 된 자입니다. 그리하여 선한 양심과 깨끗한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일꾼이 된 신자들은 더욱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여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모든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또한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린 사람들은 예수님의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거듭난 자들이요 또한 거룩하다 인정을 받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더럽고 헛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양심이 더럽혀진 자들입니다(15b). 양심이 더러워 졌다는 의미는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그 존재의 중심까지 부패했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고와 의지의 중심이므로 마음이 더러워졌다는 것은 생각과 생활 등 모든 것이 오염된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이 더러워질 때 영혼도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죄로 오염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죄 씻음은 오직 진실된 회개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다음으로 더럽고 헛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6a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생활 가운데서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중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과 같이 종교적인 이중생활을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딤후 3:5).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볼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신앙고백을 하지만 생활이 믿음을 뒤따르지 못하고 이중생활을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많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이중생활에 빠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되 자신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2:21). 양들에게는 1:1 말씀을 통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회개의 소감을 쓰도록 합니다. 그러나 양을 열심히 가르치다 보면 자신이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진실되게 써서 회개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합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이 되면 자연히 이중생활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21세기 바리새인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되 또한 자신도 말씀공부를 하여 말씀에 의거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열심히 가르치지만 또한 그 이상으로 자신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에 의거해서 회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앞에 진실된 신자요 영적인 리더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디도서 1:1-16
요절 / 디도서 1:13
믿음을 온전케 하라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디도서는 디모데전후서와 함께 목회 서신으로 분류됩니다. 디도는 본래 이방인으로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듣고 양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 바울과 동역을 하다가 그레데 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고린도전후서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후 63-64년 경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바울과 디도는 그레데를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얼마 후 그곳에 디도를 남겨 두고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디도는 그곳에서 부족한 것을 바로 잡고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저희의 믿음을 온전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장로를 세우라 (1-10)
디도서는 바울이 그레데의 책임 목자인 디도에게 쓴 서신입니다. 바울은 디도를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디도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그를 통해 양육을 받고 목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고후 8:23절에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양이었던 디도를 어린 아이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속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요 함께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동역자로 여겼습니다. 바울의 디도에 대한 이런 자세는 그의 믿음이 어렸을 때나 성숙했을 때나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디도는 바울과 함께 선교 사역을 감당한 듬직한 동역자요, 능력있는 사역자였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할 일이 많아지고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자신의 본분에 대해서 혼돈을 겪기가 쉽습니다. 평신도 목자는 평신도로서 자비량하면서 캠퍼스 목자로서의 일이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바 일에 대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을 때 헤매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풍성하게 하며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사도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고 훈련하고 성숙하게 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사도로서 복음 역사의 전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그는 영적 사령관으로서 영적 전쟁을 진두 지휘해 나갔습니다. 그의 선교 정책은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는 도시를 거점으로 장로들을 세워 나가면서 전 세계 복음화를 성취해 나갔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그레데 체재 기간이 너무 짧았으므로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디도에게 맡겼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 있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퍼뜨려진 교리적인 과오를 바로 잡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레데 교회는 개척된 지ㅏ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믿음에 따르는 선한 행실이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레데는 제주도보다 4배 이상 컸기 때문에 많은 교회가 있었고 또 일군도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장로의 자격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첫째,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도덕적 인격이나 신앙 생활에서 타인에게 흠 잡힐 데가 없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책망할 꼬투리가 잡히면 계속해서 양들에게 걸림이 됩니다. 교회 지도자의 명예 손상은 곧 하나님의 명예 손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완벽하다기 보다는 진실되게 선한 믿음의 싸움을 하는 사람, 부족하더라도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하지 않으면 실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젊은이들이 실수하는 것은 특권으로 여기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도자를 키우는 길입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실수는 문제가 다릅니다.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검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지도자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이는 단 한 번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즉 재혼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당시 장로의 순결한 삶에 대한 기준이 이렇게 높았습니다. 그 당시 일부다처제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로는 한 아내를 둔 자로서 불륜의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정욕 문제에서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갈수록 도덕적인 타락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성범죄 1위 국가입니다. 미국의 한 회사에 매년 60억원의 돈을 음란물을 보기 위해서 지불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시대에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셋째,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두는 것은 가정 교육이 잘 되어야 합니다. 방탕은 돈을 낭비하는 것, 도덕적 방탕을 포함하여 무절제한 생활과 쾌락의 추구로 삶을 허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 받는 목자요 지도자가 되려면 가정과 교회라는 두 축에서 교육을 잘 해 나가야 합니다. 불순종은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자녀들에게서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부모가 가정에서 모순되게 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아주 친절한데 가정에서는 폭력적이라든가, 밖에서는 사랑이 많고 겸손한데 가정에서는 이기적이고 권위적이라면 자녀들이 잘 따를 리 없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가정에서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이 넷을 키우면서 이들을 동역자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들이 목자가 되도록 비전을 심고 사랑해야 우리 모임과 나라는 미래가 보장됩니다. 이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이들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반발하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가정에서 자녀들의 신앙 교육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아이들은 세 살부터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가르치고 말씀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이번 주 토요일에 전국 CBF교사 수련회를 하고자 합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7-9절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교회의 재산과 사람들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감독은 교회에서 설교, 교훈, 치리, 훈련 등 교회의 성숙을 위해서 여러 가지 필요한 봉사를 감당했습니다. 감독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 고집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급히 분내지 말아야 합니다. 또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러운 이를 탐한다는 것은 부당한 거래를 통한 이익으로서 언제나 정당한 거래를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 재정적인 보상 때문에 그의 사역이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감독은 비록 가난하지만 물질 문제를 깨끗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8,9절은 감독으로서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여행 중인 신자나 순회 전도자를 잘 대접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낯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선교사들이 많은 우리 실정에서 선교사들을 잘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또 선을 행하고 선하게 되는 일에 자신을 즐겁게 또 희생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근신하여 습관적인 자제로 인해 잘 균형 잡힌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아니하며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는 중용의 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의로워야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기준을 따라서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거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입니다. 지도자는 솔선수범하는 자입니다. 본을 보이는 자입니다. 자기가 본을 보여야 다른 사람을 책망할 수 있습니다. 감독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인들을 잘 위로하고 권면하여 성숙하게 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말씀을 왜곡하고 사도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자들을 징계하고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 감독의 기능입니다. 남의 잘못을 책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책망을 하다가 오히려 반감만을 사게 되고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책망을 한 사람이 심한 모욕과 멸시를 받을 위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잘못을 알고도 책망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을 알고도 책망치 않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한마디의 충고나 책망보다도 따뜻하게 그의 잘못을 감싸줄 때 더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면에서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분명하게 책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단순히 목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됩니다.
II. 할례당과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 (10-16)
10-16절에서는 할례당과 이단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할례당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가운데서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고 할례를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혼합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이단은 영지주의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복종하지 않습니다(10a). 그들의 특징은 바른 진리에 대해 복종치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 교회와 관계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전하는 말씀은 듣지 않고 영적인 질서를 어지럽히고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고 신화를 좇은 자들이었습니다(딤후 4:3-4). 그러므로 진리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인정치 않고 성경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 말씀에 순종치 않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악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둘째, 헛된 말로 속이는 자였습니다(10b). 헛된 말을 한다는 것은 아무 유익도 없고 행위도 따르지 않는 말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헛된 말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켜 잘못된 길을 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내용이 없는 허황된 말을 하여 어린 양들을 속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매우 지혜있는 척 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자요,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자신도 똑같은 길로 빠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악한 영향력을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이러한 헛된 말이나 속임수에 의해 더럽혀 질 수가 없습니다.
셋째, 더러운 이를 취하는 자입니다(11). 그들은 명분은 그럴 듯 하나 그들의 목적은 더러운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속이거나 희생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와 같이 그레데 교회 내에서도 복음의 훼방꾼들은 더러운 이익을 취하려고 진리에 합당치 않는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훌륭한 교사인척 하며 양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을 가르쳐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야 할 목회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만을 위한다면 이는 거짓 교사에 해당이 됩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은 교회나 성도들 가운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복음의 순결성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방해꾼들은 또한 건전한 믿음의 가정을 온통 뒤엎습니다(12b). 그들은 부정한 물질을 취할 목적으로 성도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될 허무맹랑한 이단 사상을 가르쳐 성도들의 집을 뒤집어 놓고는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레데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라고 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사도 바울은 그레데 사람들의 나쁜 본성을 징계하여 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라고 했습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건강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병들고 무력하여서 심히 위험한 단계에 있으므로 그들을 잘 도와 믿음을 온전케 하고 건강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단순한 심판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것이고 건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신자들도 믿음이 많이 병이 들어 있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떤 점에서 병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믿음을 진단하고 병든 점을 고침을 받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의 믿음의 특징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말씀에 절대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기 위해서 믿음의 훈련을 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방향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아내 사라와 같이 나아갔습니다. 결국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도 그가 순종치 아니했더라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뿐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시대를 섬겼습니다(히11장). 순종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15를 보십시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마음과 생활이 깨끗해야 합니다(15a). 여기서 깨끗한 자란 율법을 지켜서 깨끗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깨끗하게 된 자입니다. 그리하여 선한 양심과 깨끗한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일꾼이 된 신자들은 더욱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여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모든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또한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린 사람들은 예수님의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거듭난 자들이요 또한 거룩하다 인정을 받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더럽고 헛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양심이 더럽혀진 자들입니다(15b). 양심이 더러워 졌다는 의미는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그 존재의 중심까지 부패했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고와 의지의 중심이므로 마음이 더러워졌다는 것은 생각과 생활 등 모든 것이 오염된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이 더러워질 때 영혼도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죄로 오염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죄 씻음은 오직 진실된 회개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다음으로 더럽고 헛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6a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생활 가운데서 믿음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중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과 같이 종교적인 이중생활을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들입니다(딤후 3:5).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볼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신앙고백을 하지만 생활이 믿음을 뒤따르지 못하고 이중생활을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많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이중생활에 빠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되 자신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2:21). 양들에게는 1:1 말씀을 통해서 열심히 가르치고 회개의 소감을 쓰도록 합니다. 그러나 양을 열심히 가르치다 보면 자신이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진실되게 써서 회개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합니다. 이런 생활이 반복이 되면 자연히 이중생활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21세기 바리새인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되 또한 자신도 말씀공부를 하여 말씀에 의거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열심히 가르치지만 또한 그 이상으로 자신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에 의거해서 회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 앞에 진실된 신자요 영적인 리더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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